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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야의 기도 / 왕상 18: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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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기도
왕상18:30-40

요즘 미국과 이라크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이 연일 티이부이와 신문을 통해서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뉴스중에서 목회자인 저에게 유독 눈에 띄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미군에 의해 포로가 된 이라크 군인들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이라크병사가 대열을 이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순간 감시를 하고 있던 미군 병사가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손으로 기도의 흉내를 내는 것이엇습니다. 그리고 이내 땅에 엎드려서 이슬람교의 전통대로 땅에 엎드리어 기도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과연 저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기도할까? 생각하였습니다.

또 한번은 신문을 보는데 한 기독교인 미국병사가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을 실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과연 그 미군병사는 무엇이라고 기도할까? 저는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위기를 맞이할 때 기도를 선택합니다. 기도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요즘 국내적으로 국외적으로 나라의 상황이 심히 힘든 시기입니다.
국내적으로는 대국지하철 사고로 인한 민심이 흉흉하고 또 북한 핵문제로 인하여 평화의 우려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특히 북한은 유엔의 핵사찰단을 내쫓고 미국이나 유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을 하고 있어서 앞으로 이 문제는 한반도 평화의 중요한 이슈가 될 것입니다.
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보십시오.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이라크의 전쟁은 세계 모든 나라를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져도 문제고 이겨도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번 전쟁은 전쟁의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의 결과는 엄청난 피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교계에서도 일제히 “이라크 전쟁 반대” 성명을 내걸고 있고 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데모또한 거세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위기를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데 과연 어떻게 우리는 위기를 받아들여야 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한자어 위기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라는 말의 복합어입니다. 그러니까 위기라는 말은 위험도 있지만 기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위험이 올때를 기회로 삼아서 이겨나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살던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국가적인 큰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쪽 유대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나라 왕 아합 왕은 역대 최악의 왕이었습니다. 처로 에돔 왕의 딸 이사벨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 여자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저들은 징계하사 3년 6개월 동안 지면에 우로가 내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큰 애로를 겪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니 농사가 되지 않습니다. 물이 없으니 가축도 잘 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식량의 기근이 와서 총체적인 불경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왕 아합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부르게 됩니다.
이에 부름을 받은 엘리야는 아합에게 어느 신이 참신인지 대결하기를 제안합니다.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대결하자고 합니다.이에 아합왕도 동의를 합니다.그래서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모아서 대결이 되었습니다.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은 송아지를 잡고 아침부터 늦게까지 바알의 신 이름을 부르면서 응답을 요청합니다.그러나 아무 응답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습니다.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에 엘리야가 드디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소개됩니다.과연 위기 속에서 엘리야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오늘 우리는 위기 속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1. 엘리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했습니다.

32절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제단이 무너진 것을 봅니다.왜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단이 무너졌습니까 이스라엘은 아합왕이 이방여인 이세벨이라는 여인과 결혼하면서 바알신이 이스라엘에 들어왓습니다.이미 바알신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있었던 신입니다.아합왕은 바알신을 섬길 것을 강조하여 바알신을 섬기는 산당을 만들엇습니다.그대신 하나님을 섬기던 제단을 허물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바알신이 축복하여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농사를 지을 때 모든 살을 형통하게 해주는 신은 오직 바알신이라고 믿었습니다.그런데 오늘 엘리야는 먼저 무너진 제단을 신축하기로 합니다.
지금 엘리야가 무너진 제단을 재건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지금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거짓선지자들과 악한 대적자들과 대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심정에서 그가 먼저 의지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어디에 함께 하십니까? 구약에는 제단의 제사드릴때에 그곳에 임재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따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무너진 신앙의 제단을 회복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기 엘리야가 어떻게 제단을 회복합니까?

엘리야는 갈멜산 정상에 먼저 여호와께 에배할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전에 세워졌던 것을 다시 재건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엘리야는 그곳에 이스라엘 12지파를 따라 열두돌을 세워 그 제단을 수리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12개의 돌을 세워서 단을 쌓음으로써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임을 상기시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위치를 망각하고 신앙의 제단을 떠난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축된 제단 위에 송아지의 각을 떠서 제물로 삼습니다. 그리고 통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통넷에 물을 기르다가 번제물과 나무위에 붓습니다. 그런데 여기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다시 그리하라’고 3번 그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잘 계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물이 단에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채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엘리야가 기도하기에 앞서 제단에서 번제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번제물에 나무 위에 무엇을 붓고 있습니까? 물을 붓고 있습니다. 번제물은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번제물인 고기와 태울 나무에 물을 충분하게 부으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인간적인 수단으로 나무에 불이 붙지 않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만을 의지하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굳건히 의지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물가운데서도 불을 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그는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850대1의 다수 속에 혼자의 외로운 상황이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기에 앞서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당시에 왜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바알신을 섬기고 타락하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절대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확신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의지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또 세상을 의지합니다. 자꾸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면서 중간지대에서 갈팡질팡할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또 내 힘으로 살려고 하는 나의 고집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평생을 우유부단하게 차지도 덥지도 않는 신앙으로 그럭저럭 세월만 허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 “큰 위기”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럴까 저럴까’ 우유부단하게 하나님을 재는 분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데교회가 책망을 받을때 차지도 덥지도 않는 미지근한 믿음을 책망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쉽게 타협하고 너무 쉽게 신앙의 자리와 위치를 이탈하여서 믿음의 자리에서 멀어지고 기도의 자리에서 멀어질때가 많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전적으로 믿고 확신하십니까? 저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참으로 주의해야 하는 것이 ‘머리로만 믿는 하나님,이론적인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체험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할수 없습니다. 기도의 체험을 하지 못하면 끝까지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기도의 체험이 없으면 신앙 생활이 너무 밋밋하고 재미없고 현실감이 없습니다. 기도의 체험을 하게 되면 신앙 생활이 힘이 있고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낙심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위기에 있습니까?
그 위기를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사람 의지하여도 한계가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바라시는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우리가 4월 한달동안 24시간 연속기도회와 새벽기도축제를 통해서 기도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때에는 전적인 믿음의 자세로 해야 합니다. 먼저 이 시간 머뭇거리는 마음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무너진 믿음을 회복하여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면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시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먼저 거룩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기를 갖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엘리야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주관자요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기를 소원했습니다.
36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절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하였습니다.
여기 “알다”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본래 히브리어 ‘알다’에 해당하는 ‘야다’라는 원어는 ‘경험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경험할 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가령 남자가 여자를 알때가 언제입니까? 그냥 외모만 보고 대화한 해서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아는 단계는 결혼하여서 함께 경험할 때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잠도 자고 함께 몸을 섞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알았더니 좋은 사람이면 더욱 신뢰하고 배신하지 않고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때로 인간은 알면 알 수록 실망스러운 적이 있습니다. 멀리서 볼때에는 좋은 줄 알았는데 가까기 사귀어보면 실망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가까이할수록 사귀면 사귈수록 더욱 우리에게 매력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엘리야는 위기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한 필요는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 관하여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생과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특별히 24시간 연속기도회와 기도축제를 통해서 이런 선한 동기를 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개인 개인이 이번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시간이 되는 영적인 소원을 갖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기 자기 개인의 차원에서 머물지 말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는 단순히 자기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소원하고 온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소원했습니다. 먼저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기도문에서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이름,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뜻을 구하라고 합니다.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마음 속에 무엇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영광의 소원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것도 그냥 되어지는 것은 아니고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선한 소원함들이 풍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강릉에 살면서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원하는 소원함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주관자이심을 인정하는 백성이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소원을 갖고만 있으면 안되고 그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그 소원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 소원함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원함을 갖고 기도의 자리를 갖고 갖으시기 바랍니다.

3. 엘리야의 기도는 구하는대로 응답되었습니다.
38절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의 '여호와의 불'이란 '번개'와는 다른 초자연적인 불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Lange, Keil & Delitzsch, H. Austel). 구약시대 당시 하나님께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불을 내리셨습니다. (1) 당신의 언약을 보증하실 때(창 15:17), (2) 하나님께서 친히 현현하실 때(출 3:2),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증거하실 때(출 9:24) (4) 인간의 제사를 열납하실 때(레 9:24)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삶 속에 분명하게 응답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시대마다 사람마다 형편마다 다양하게 응답하여 주십니다.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응답하심은 우리의 생각과 지헤를 뛰어넘는 경우가 많습니다.“깊도다 하나님의 지헤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의 차이점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기도가 잇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능입니다.
제가 어릴적 자라던 마을에 성황당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새벽으로 밤으로 촛볼을 켜 놓고 부지런히 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지금도 마음이 불안하여 무언가 위로받기 위하여 스스로 비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의 기도는 기도를 통하여 도를 닦고 스스로 깨닫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혼자서 하는 참선이나 명상이 아닙니다. 기도는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대화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기도를 강조하면서 언제나 병행구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응답의 약속입니다.에레미야29: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에레미야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에수님도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여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고 합니다.

한 사람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 문을 여시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듯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진지한 마음으로 살펴 보아야 합니다. 기도없이 주안에서 위대한 역사를 이룬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반대로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무능력하게 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역사적인 놀라운 부흥의 역사마다 간절한 기도운동의 결과로 일어났습니다. 기도는하나님의 능력을 얻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저는 강동교회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 지금까지 이곳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들의 기도를 많이 응답하여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자훈련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을 주신 것처럼 큰 응답이 없습니다.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일꾼들을 세워주시고 보내주신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이 채워졌습니다. 예배를 위한 프로젝트와 식당과 화장실과 자동차와 사택과 또 휴게실까지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십니다.
특히 우리가 2010 비젼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2010년까지 내적으로는 예배자의 수가 1000명으로 부흥하고 최소한 100명의 성숙한 제자들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3천평의 대지위에 1000평의 예배와 교육과 선교와 섬김을 위한 건물을 세울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기준은 작년의 10배기준입니다. 저는 이것들을 우리가 믿고 바라고 구할 때 응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한 것은 약 3천평의 대지는 이미 하나님이 예비하여 두신 것같습니다.여러분들도 기도하였고 저도 기도하고 있었던 무거운 제목이 땅이었습니다. 아직 단언하기에는 좀 이릅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에 그 땅을 가보았습니다. 그곳은 넓은 도로를 끼고 도심 속에 전원교회를 하면서 우리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다목적의 꿈의 교회를 이루는데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그 땅의 주인이 우리 주님의 백성인 것과 또 한평당 25만원밖에 하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비젼에 걸맞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으로 인도하심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크고 비밀한 일로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런 약속의 믿음을 갖고 우리는 이번에 기도하기를 원합니다.4월에 있을 새벽기도축제를 통해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우리 이웃과 우리 가정과 개인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합니다.엘리야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엘리야에게 응답하여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살아게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지금도 일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모두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선한 동기로 기도할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풍성한 응답을 누리게 될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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