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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사랑 받는 사람 / 요 11:1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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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 받는 사람
요한복음 11장 1-5절


< 좋은 친구를 가진 삶의 축복 >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교제를 나누며 사는 삶입니다. 제가 행복하게 목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성도들이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대단한 능력을 가진 신령한 사람은 별로 없지만 서로 부족한 사람끼리 지난 4년여 동안 이렇게 교회를 무난하게 섬기며 왔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웬만한 교회를 가보면 능력 있는 사람들이 한두 분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누가 봐도 깜짝 놀랄만한 헌신을 합니다. 그런 교회들에 비교하면 우리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도 저는 다른 목사님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저는 우리 교인들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저의 솔직한 생각입니다. 다른 교회처럼 대단히 능력 있고 신령한 성도들은 없어도 부족한 사람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교회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진정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 서로 영혼의 쉬는 그늘을 제공해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친구를 가지는 것처럼 복된 것은 없습니다. 제가 인터넷 말씀 사역을 하면서 가장 축복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런 친구 몇 명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 친구가 우리 곁에 있어준다면 삶이 울적해도 금방 미소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목회하면서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목회 동역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신학을 하지 않아서 저의 신학교 동기와 동역자들은 거의 대부분 미국에서 사역하기 때문에 가끔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미국에 갈 기회가 있어서 그분들을 만나서 마음을 털어놓는 대화를 하고 나면 속이 뻥 뚫리는 것을 느낍니다. 그처럼 찾아가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미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는 한 아름씩 선물도 받습니다. 처음 개척할 때도 친구 목사님들의 도움을 받았고, 다급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받았고, 생활이 어려울 때에도 그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밤늦게 교제를 하고 다음날 아침 그분 집을 떠나서 주머니를 뒤져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주머니에 달러를 넣어 놓은 목사님도 있었고, 공항에서 마지막 헤어지기 전에 휙 달러를 넣어주고 도망가는 목사님도 있었습니다.

2001년에 마이너스 통장을 쓸 수 있는 한도까지 다 써서 아내 보기가 민망할 뻔했을 때, 뉴욕에 사는 친구 목사님이 "한번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그리고 뉴욕, 텍사스, LA 등지를 돌고 한국에 도착하니까 주머니가 두둑해 있었습니다. 그때 마이너스 통장을 일거에 플러스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심신이 피곤할 때 찾아갈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제가 그런 은혜를 받고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지금은 제가 은혜 받은 똑같은 일을 선교사님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요삼일육선교회에서도 그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런 정성을 받을 때마다 어려운 곳에서 힘들게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습니까? 얼마 전에는 우리 교회도 승합차가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보다 선교사님의 차량 마련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흐뭇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늘과 쉼터가 되어주는 주님의 친구'가 되어야 하고, 우리 교회는 '그늘과 쉼터가 되어주는 주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다니의 3남매인 나사로,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이 3남매의 집은 화려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그 3남매의 집을 자주 들리시면서 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마리아)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도대체 그 3남매가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을까요? 오늘은 3남매의 모습을 통해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사랑 받는 사람이 되는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께 사랑의 헌신을 하는 자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막내 마리아는 예수님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시집을 가려고 준비해 두었던 향유를 주님께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아마 이처럼 아름다운 장면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주님께 더 드릴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생각만 하는 것은 초신자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릴 생각까지 하는 것은 성숙한 자의 신앙입니다. 받은 생각을 하는 성도가 많은 교회는 죽어갑니다. 그러나 드릴 생각을 하는 성도가 많은 교회는 살아납니다. 처음에는 교회에 올 때 문제를 해결 받고, 상처를 위로 받고, 소원을 응답 받기 위해서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10년, 20년을 그런 모습으로만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차원 높은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의 신앙이 드리고, 섬기고, 헌신하는 신앙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쓰다 남은 돈을 드리고, 활용하다 남은 시간에 봉사하고, 마음의 중심이 아닌 구석에 주님을 모시는 모습은 복된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이 계산하는 복은 '취하는 것'으로 계산되지만 하나님이 계산하는 복은 '드리는 것'과 '나누는 것'으로 계산됩니다. 또한 취할 생각을 많이 하면 온통 섭섭한 마음뿐이지만 드릴 생각을 하면 섭섭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8남매의 막내인데, 형제가 많은 것에 대해 부모님께 감사 드립니다. 5년 전에 첫째 누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 명 줄었지만 아직 7명이 남아 있는데도 팍 줄은 것 같고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적다면 얼마나 그런 느낌이 크겠습니까? 세월이 지날수록 가족이 많은 것이 큰복이라고 생각됩니다.

약 30년 전, 첫째 형님이 군대에 갈 때 애인도 못 만들고 군대에 갔습니다. 체격이 적은데도 훈련이 심하다는 맹호부대로 배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이 첫째 형님에게 힘이 되도록 우리 형제들에게 매일 편지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몇 달간은 8명이 매일 순번을 정해 편지를 썼고, 그 다음에도 며칠 간격으로 돌아가면서 편지를 썼습니다. 아마 그 부대 역사상 제대할 때까지 형님처럼 많은 편지를 받은 분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이 많으니까 이런 위로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이 많으니까 가끔 섭섭하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누구에게는 전화했는데 자기에게는 전화 안했다고 섭섭해합니다. 자기가 전화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누구는 만났는데 자기는 만나주지 않았다고 섭섭해합니다. 자기가 만나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부모님이 누구는 이렇게 해주었는데 자기는 안해 주었다고 섭섭해합니다. 자기가 부모님께 해드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시부모님이 누구는 이렇게 도와주었는데 자기는 도와주지 않았다고 섭섭해합니다. 자기가 시부모님께 도와드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느 가족에서든지, 어느 교회에서든지 섭섭해하는 분을 보면 꼭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면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드리고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면 웬만하면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섭섭함이 자주 생기면 대뜸 "아! 나는 지금 받을 것만 더 생각하는 얌체가 되었구나!"라고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받기보다 드리기를 힘쓰고, 이해 받기보다 이해해 드리기를 힘쓰고, 사랑 받기보다 사랑해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 삶에는 절대 섭섭함이 틈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구원을 비롯해서 수많은 가치 있는 것을 이미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항상 드리고, 헌신하는 데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드릴 줄 아는 사람을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2. 주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있는 자

본문에서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어떤 조치를 취합니까?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그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면서 나사로에 대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주님의 사랑 받는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확신이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요? 그들이 지위가 높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부모가 없이 자란 요즘 말로 하면 소년 소녀 가장의 집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완벽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마르다는 주님 앞에서 실수를 많이 있습니다. 말실수도 많이 했고, 주님 앞에서 동생 마리아 문제로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부족한 부분이 많아도 베다니의 3남매는 자기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그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행위나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보다 주님의 사랑 받는 자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행위를 보여드리는 사람보다 신뢰를 보여드리는 사람을 더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본래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처럼 주님은 우리의 외적인 조건을 보고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사랑의 확신이 어떤 행위나 조건이나 환경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분의 마음에 지속적인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자세히 보면 지금 그분이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어떤 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도 역시 그분이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등학교에 불량 학생이 있었습니다. 부모의 골칫덩어리이고, 학교에서도 항상 말썽만 피웠습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무리 벌을 내려도 그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학생이 이웃의 여고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고생이 술 담배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면 우리의 방황은 끝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더욱 주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3. 주님을 기쁘게 환영하는 자

요한복음 11장 20절과 28-3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시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아직 베다니 마을로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멀리까지 나와 맞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 베다니의 삼남매는 주님을 항상 기쁘게 맞이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섬기고 대접하니까 주님을 그들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입니다. 실질적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발벗고 참여하는 일도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 자신을 보면 주님 앞에 보여드리기에 너무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진정으로 주님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있다면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알아도 덮어주시고 용서하실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 글에서 이런 간증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중학교 때 용돈이 필요하니까 어머니를 이렇게 속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어머니! 영어 사전 사게 돈주세요" 하고 돈을 타고, 며칠 후에 "어머니! 딕셔너리 사게 돈주세요" 하고 돈을 타고, 다시 며칠 후에는 "어머니! 콘사이스 사게 돈주세요" 하고 돈을 탔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하기에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속아주었는데 그 어머니 모습을 통해서 은혜와 사랑을 배워 지금 큰 교회 목사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르고 속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결코 철폐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허술하게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그 믿음 때문에 더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령한 행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항상 주님을 기뻐하고 환영하는 마음입니다.

4. 심령이 가난한 자

누가 항상 주님을 기뻐하고 환영합니까? 주님이 없으면 즐거움이 없고 사는 길이 없는 줄 아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주님을 기뻐하고 환영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높아져서는 안됩니다. 영성이 있다는 사람이 가장 크게 실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1등 신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받는 신자는 1등 신자보다 평범한 신자입니다. 왜냐하면 1등 신자는 이미 자기 상을 다 받았지만 평범한 신자는 아직 하나님이 주실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을 말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고,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기도하는 마음이며, 연약한 사람을 살피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사귀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자기 자녀가 많이 갖춘 자녀와 사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성품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조건은 따지지 말고 겸손한 사람을 찾고, 자녀들에게 그런 친구관계를 가지도록 시야를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녀가 바르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 받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요즘 저희 아버님이 가끔 눈물을 흘리신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평생 한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해방 후 조만식 선생님 밑에서 친위대 대장으로 있다가 1946년 김일성에 의해 무장 해제된 후 3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6.25 때에 수개월을 서울 인왕산에 숨어 지내도 눈물 한번 보이지 않았고, 그 뒤 어렵게 8남매를 키우면서도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병상에서 LA 나성 한인교회 김영진 목사님이 심방을 와서 예배 드릴 때 눈물을 펑펑 흘리시고, 2주 전 첫째 형님 내외가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부모님에게 마지막 큰절을 올릴 때에도 눈물을 펑펑 흘리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약해진 모습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난한 심령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금 의사 선생님은 길어야 3개월 정도 보시는데, 저는 하나님께 그 눈물을 보시고 5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령이 강할 때에는 외롭고 고독하게 하시고, 심령이 가난할 때에는 더 큰 위로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5. 주님의 친구가 되어드리는 자

요한복음 11장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여기서 주님은 나사로를 보고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누가 친구입니까? 저는 친구에 대한 수많은 정의 중 이 정의를 가장 좋아합니다. "친구란 어려운 때에 내 곁으로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

좋은 친구는 친구가 잘되고 어려운 때에는 잘 나타나지 않다가 어려울 때에는 어느새 나타나서 그 필요를 채워주는 친구입니다. 왜 사람에게 어려운 순간이 필요하고, 기도제목이 필요합니까? 그때 진짜 친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새 '바른 정치'를 내세우면서 '빠른 정치'를 추구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바른 정치'를 내세우면서 자기의 위치를 빨리 확보하려고 '약삭빠른 정치'를 하는 정략적인 의도 때문이 아닙니까?

인간관계를 하면서도 우리는 어려울 때 곁에 있어주는 '바른 친구'가 되기를 힘써야지 이익에 따라 왔다갔다하고 기회를 엿보는 '빠른 친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인시대에서 이의방, 이고, 채원이 의형제를 맺어 권력을 잡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친구관계는 권력을 얻으려고 일시적으로 뭉친 관계였습니다. 결국 서로 이용해 먹으려다가 다 망하게 됩니다. 공동 이익을 위해 뭉치는 친구는 진짜 친구가 아닙니다. 어려울 때에 마음을 같이 하며 '자기의 일부'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친구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적절한 비전을 가지고 추진하는 교회 이전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축복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 이전이 친구를 새롭게 발견하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그때 새롭게 발견한 친구들을 보면서 목회자도 힘을 얻고, 성도들도 힘을 얻습니다. "이런 친구가 우리 곁에 있었구나! 진정 이분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었구나!" 그 경이로운 발견이 우리의 영혼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번 교회 이전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필요한 구석을 볼 수 있는 사랑의 시야가 열리고, 그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나의 일부를 떼어낼 수 있는 마음의 여백도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교회 이전을 통해서 지난 4년 동안 안전을 희구하던 여러분들의 마음에 처음으로 불안의 불꽃을 지펴진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상황을 한번쯤은 넘어야 헌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교회사랑이 무엇인지를 체험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저는 교회 이전을 위한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님! 친구를 보내주세요!" 하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저의 그 기도가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 여러분들의 심금을 퉁겨 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 17장 17절은 말합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여러분! '저의 성도'가 아닌 '저의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우리 주님은 어려운 때에 친구가 되어주려고 나타나는 사람을 그분의 친구로 삼아주시고 신비한 사랑과 풍성한 축복의 손길을 펴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 >

그런데 요한복음 11장을 보면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베다니의 3남매는 주님의 사랑 받는 존재였는데, 왜 주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듣고도 바로 가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까? 왜 주님은 사랑 받는 자의 고통에 바로 반응하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를 당하면서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신앙인들은 가끔 회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만나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틀 때문에 나사로는 죽었지만 결국 그가 다시 살아나면서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처럼 때로 믿는 우리에게 고통의 순간이 오래 지속되고 심지어는 "다 끝났다!"는 상황이 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좋은 것'입니다(마 7:9-10). 처음에 야탑동에 있는 그 성전을 보고 "하나님! 주세요!" 했는데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오포 땅을 보고 "하나님! 저 땅을 주세요!" 했는데 주시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장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항상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새 전도사님이 결혼하고 싶어서 많은 자매를 만나는데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그래도 너무 속상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분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관심은 항상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사랑 받는 자로서 맑고 깨끗한 영혼을 소유한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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