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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안은 극복할 수 있다 / 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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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극복할 수 있다
요한복음 14:27


우리 가운데서 불안을 느끼지 않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태연한 것 같아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불안을 안고 살아 갑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불안의 장애를 가지고 밤낮없이 시달리면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부딪히고 다루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 대부분은 우리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할 때에는 불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내일을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무슨 일이 기다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불안을 주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아무리 총명한 부모라도 내 자녀들이 어떻게 될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죽을지,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미지의 세계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들려오는 소문들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걱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요즘 이라크 전쟁이나 북한 핵의 향후 전망을 가늠해 보면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앞으로 경제가 잘 풀릴지 아니면 더 늪으로 빠질지 아무도 진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어떤 점에서 불안이란 우리가 평생 함께 걸어가야 할 반갑지 않은 길동무일지도 모릅니다.

다음은 어느 주간 잡지사에서 지난 3월 '한국사회 불안감 조사'라는 제목 아래 "당신은 불안을 느낍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많이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73%, "조금 느낍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20%가 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열에 아홉은 다 불안을 안고 산다는 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가운데서 80% 이상의 사람들이 "작년보다 금년이 더 불안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 지수가 더 높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게 불안을 느낍니까?"라는 질문에는, 북핵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경제가 점점 나빠지지 않을까, 잦은 구조조정으로 해고가 계속되면 직장을 잃지 않을까, 건강이 잘못되지 않을까 등 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불안의 요인으로 꼽은 것은 교통사고였습니다.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지 않을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나서 얼마나 많이 죽는지 모릅니다. 교통사고는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불안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20대, 30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데가 점집이라고 합니다. 점을 치는 운세 문화는 사회가 불안할수록 점점 번창하고 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젊은 애들이 불안하니까 점집에 가서 뭔가 기분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불안이 짙게 깔려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불안은 한번 처리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난제와도 같습니다. 익히 경험하듯이 한번 불안을 잘 처리했다고 해서 계속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항상 재발이 됩니다. 한때는 은혜 받고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면서 찬양을 했지만, 언젠가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져 기도도 안되고 밤낮없이 시달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불안을 다루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이 불안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지고, 평생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이 불안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 여부에 따라 불안에 끌려 다닐 수도 있고, 불안을 극복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속적으로 이 불안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평생 독특한 평안을 가지고 사신 분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이 이번에는 무사할 수가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돌아가는 상황도 너무나 살벌했습니다. 제자들의 장래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모두가 밥맛을 잃어버리고 잠을 제대로 못 자는 환경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자기 마음에 갖고 있는 평안, 즉 자신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주님이 평생 세상을 살면서 마음에 간직하고 누렸던 그 평안을 지금 공포에 짓눌려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과연 이런 평안이 어떤 평안일까요? 열이 날 때 아스피린을 먹으면 금방 열이 떨어지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 주여, 주시옵소서." 하고 받아 먹으면 그 시간 마음에 있던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는 무슨 특효약과 같은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를 처음 믿은 자녀들에게는 자주 체험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신비스러운 평안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어제까지 걱정하고 불안해 하던 사람이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찬송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처럼 아스피린을 먹듯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일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한 자매가 세례 간증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불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미션 스쿨에 들어가서 성경도 배우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마음이 끌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졸업을 하고 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과 가정에 대해 푸른 꿈을 가지고 시작을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 허전함과 불안함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애를 낳고 키우면서도 계속 마음이 허전하고 마음 속 공간이 점점 텅 비어가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늘 창문을 열면 내다보이던 큰 건물을 바라보다가, '내가 오늘은 저기를 한번 가봐야지. 저기가 교회라는데....' 하고는 애를 안고 혼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밀려서 들어왔는데, 바로 사랑의교회였습니다. 처음에는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다 할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두서너 번 계속 참석하면서 드디어 설교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참으로 안식과 평안이 밀려왔습니다. 그러자 저를 짓누르던 답답하고 무거운 짐이 순식간에 벗겨지던 것 같이 느껴지더군요."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믿고,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고, 이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언젠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라는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에 있던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평안이 가득 차는 것을 체험합니다. 물론 강하게 체험하는 사람, 약하게 체험하는 사람, 정신이 없을 정도로 체험하는 사람, 조용하게 체험하는 사람 등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이런 놀라운 평안을 체험하고 기쁨을 누리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할 때 '나의 평안'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다른 평안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제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별별 근심을 다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신변도 안전하지 못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위기로 인해 불안해 하며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 받은 자에게 하늘로부터 주시는 은혜의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현실 문제에 부딪혀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평안'은 다른 데가 있습니다. 이 평안은 삼키면 금방 열이 떠나는 아스피린 같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고 아느냐 하면 지금 제자들 11명이 앉아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마음에 금방 평안을 느껴야 하는데 그 자리에서 즉시 평안함을 얻었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두가 똑같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날만 아니라 그 다음날도 계속 불안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평안'은 금방 얻어서 먹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날, 그 말씀을 듣고도 불안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그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 이분이야 말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하는 믿음이 회복되자마자 주님이 말씀하신 평안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나라의 비전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을 때, 비로소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평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평생 그들은 그 평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순교하는 자리에 이르러서도 그 평안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주님을 위해 바쳤습니다. 따라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할 때 눈 감고 기도하면 바로  받는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나의 평안'은 우리가 합당한 조건들을 갖출 때 뒤따라오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어떤 합당한 조건들을 갖출 때, 잘 기억하세요. 조건들을 갖출 때 항상 뒤따라오는 은혜에요. 이게 주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이에요. 예수님을 주목하세요. 그는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를 향하여 돌을 드는 사람들과 상대해서 그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한 때는 임금을 삼으려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지만, 나중에는 모두가 다 버리고 도망가는 삭막한 분위기에서 한평생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음 속에 평안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평안이 가능했을까요? 주님의 한 생을 우리가 조용히 묵상해보고, 주님의 말씀을 검토해보면 어느 선까지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주님은 평안을 유지하셨구나!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할 때는 내가 이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 것처럼 너희도 이렇게 하면 이 평안이 너희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구나!'

이제 3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첫째 조건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평안을 늘 유지하는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에, 신구약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뭐가 대단하냐? 예수님이 항상 그렇게 불렀지 않느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불러도 그저 막연히 어떤 격식을 차려서 부르는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6절에 보면,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특별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여."라는 호칭을 보릅니다. 이 말은 4~5살 먹은 어린애가 아빠를 부를 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현대 아랍어에서는 '지바'라고 합니다. "지바, 지바" 하면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향해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른 것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언덕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기도를 이 말 속에 있는 뉘앙스를 그대로 살려서 다시 표현한다면 "아빠, 아빠! 아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잖아요. 무엇이나 하실 수 있잖아요. 무엇이나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십자가를 안 지게 해주세요." 완전히 어린애와 같은 모습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을 보실 때 하나님은 항상 아버지요, 자기는 항상 어린아이처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마음 자세였습니다.

에레미야스라고 하는 유명한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문학과 경전, 전통을 연구한 매우 깊이 있는 학자입니다. 그분이 다 조사를 해본 결과 이런 결과를 내렸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이야기이다. 유대 나라에서 하나님을 예수님처럼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도 없고, 더욱이 예수님처럼 "아바 아버지"라고 어린애와 같이 매달리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추종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으면 항상 평안할 수 있는 든든한 분이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에는 항상 평안이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빠, 아빠라고 부르는데,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 그리면서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라는 말은 다 큰 자식이 자기 아버지에게 나와 점잖게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이 말엔 '아빠' 하는 뉘앙스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 마음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친근하신 분이십니까? 얼마나 크신 분입니까? 얼마나 든든하신 분입니까? 얼마나 전능하신 분입니까? 그분이 내 옆에 아버지로 계시는데 뭐가 두려우며 불안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보는 믿음을 가지고 자기 마음에 있는 평안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의 평안'은 이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라크에는 끔찍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연일 연야 공습이 이어지면서 많은 불상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끔 TV에 비치 때면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런데 TV에 비치는 열 몇 살쯤 되는 소년, 소녀들의 얼굴들을 보면 생각보다 굉장히 평안해 보입니다. 마치 걱정이 없는 애들 같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아주 평안하게 웃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내 카메라에 그 옆에 누가 있어요? 든든한 누가 있어요? 아버지들이 있어요. 아버지가 있어요. 그러니까 애들이 철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겁이 안 나는 거예요.

예수님도 세상에 사시면서 하나님을 어린아이가 자기 아빠를 보듯이 보면서 믿고,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주님이 가지신 그 평안을 우리의 것으로 늘 마음에 간직하고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됩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항상 나의 아빠로, 내 곁에 계시는 든든한 분으로 믿기가 힘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막연히 읽는 것이 아니라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얼마나 지성껏 돌보고, 사랑하시고, 인도하셨는지 마음에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떠나는 야곱을 얼마나 자상하게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던 다윗을 얼마나 지극하게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평안하게 하셨는지 계속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도 그렇게 하실 거야.' 하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책임져 주셨고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는데, 내가 왜 불안해 합니까? 

시편 27편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런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십시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마음에 잘 담으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를 마음에 담고 운전할 때도 묵상하고, 설거지할 때도 묵상하고, 불안이 고개를 들 때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것이 느껴지면서 내 마음의 불안이 슬슬 힘을 잃어버리고 쫓겨나갑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다는 그 평안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노력하십시오. 가만히 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불안할 때 엎드려서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 마음이 불안합니다.'라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로 느껴지는지 한번 자기를 점검하십시오.  대여섯 살 먹은 애한테 진짜 아버지가 느껴지듯이 나에게도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로 느껴지는지 한번 자기 자신을 보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이 주시는 '나의 평안'은 철저한 순종에서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생명보다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이것이 주님의 확신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편에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혼자 두시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혼자 두지 않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내가 왜 불안 하느냐? 내가 왜 두려워하느냐?' 주님은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한 생을 평안 가운데 사셨습니다.

우리가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면 하나님과 충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불순종할 때 하나님과 충돌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집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과 불편해지는데 그 마음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을 때 마음이 평안했습니까? 어머니와 여러 가지 일로 다투는데 마음이 평안한 날이 있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안을 늘 유지하려면 하나님과 항상 조화로운 마음,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비결이 바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우리에게 불안의 씨앗을 심습니다.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과 평안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링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모를 받는 대통령입니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마자 그 다음해부터 남북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얼마나 그 전쟁이 비참했는지, 전사자만 해도 북군에서 36만 명, 남군에서 25만 명, 총 60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생겼습니다. 시체로 산을 이루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전하고 나서 한 1년 동안 계속 북군이 밀렸습니다. 나중에 굉장히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링컨은 온갖 스트레스를 다 받았습니다. 심지어 83kg에서 57kg로 떨어질 정도로 체중이 감소했습니다. 그만큼 지도자로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메릴랜드 주 앤티담 전투에서 처음으로 북군이 이겼습니다. 그 희소식이 백악관에 전달됐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참모가 링컨에게 축하를 했습니다. "각하, 이제부터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북군 편입니다." 그러자 링컨이 정색을 하면서 내 밷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염려하고 마음에 걱정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하나님 편에 바로 서 있는가 서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편에 서 있을 때 나는 걱정을 안 한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가 문제이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 되실 수 있어. 하나님은 성경의 다윗을 통해서 내게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게 해 주셨네." 가끔 참모들은 이런 링컨을 보고 어떻게 저리 태평할 수 있는지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링컨에게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링컨은 항상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이 평안할 수 있었고, 그 평안 때문에 그는 흔들리지를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편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편이 되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배웠으면 지키십시오. 진리라는 것을 확신했으면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 됩니다. 그럴 때 내 마음에 평안이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충돌하면서 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다고 늘 하나님께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유치한 일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주시는 '나의 평안'은 간절히 기도하는 데서 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불안을 극복하는 비결이었습니다. 주님이 드리신 기도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가장 크고 쓴 잔을 입술 가까이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더할 수 없는 약함, 더할 수 없는 슬픔, 더할 수 없는 고뇌가 그분을 사로잡고 그 영혼을 쇠약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놀라움이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은 사탄의 시간이었고, 어두움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잠깐 주님은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때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피 땀을 쏟으며 전력을 다해 "아바 아버지여"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평안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기도하는 자리에서 일어서 담대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들이 가까이 왔느니라." 얼마나 담대합니까? 얼마나 평안합니까? 얼마나 든든합니까? 바로 기도함으로 이러한 평안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나처럼 기도하면 이 평안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평생 많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후 7:5) 사도 바울은 정말 하루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빌립보 4장 6, 7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가 두려움에 휩쓸릴 때마다 이 말씀대로 기도했더니, 실제로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불안할 때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이 불안해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이 3가지 중요한 조건이 따르는 평안이라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마음에 정리하십시오.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질 때까지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이 평안이 내 것이 됩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이 평안이 내 것이 됩니다. 간절히 자주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 평안이 항상 내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요즘 암 때문에 많이 걱정들을 하곤 합니다. 암으로 고생하다 세상 떠나는 분들이 많아서 누구나 암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암에 걸리지 않을지 여러 가지 이론과 학설들을 주워 모아 나름대로 처방을 스스로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육류를 적게 먹는다, 담배는 아예 끊는다, 스트레스를 가급적이면 받지 않는다, 채소를 많이 먹는다, 생식을 많이 먹는다, 공기 좋은 데 가서 산다, 할 수 있으면 웃으면서 산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라, 화내지 말라, 심지어 탄 음식은 입에 넣지 말라 등등. 물론 우리가 이런 예방을 해야 됩니다. 또 그런 사람은 아무래도 건강을 지키는데 도움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은 암보다 더 무섭습니다. 불안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계속 이 불안을 놓고 싸워야 되고, 이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됩니다. 암은 걸리지 않으려고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왜 불안에 대해서는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까? 왜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성경적인 방법이 있는데도 소홀히 합니까? 아무리 불안이 산적한 환경에 있더라도 예수님이 주시는 '나의 평안'을 갖고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실천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불안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까? 불안을 항상 이기고 살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빠로 항상 느끼고 그분을 절대 신뢰하면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다시 말해 하나님 편에 서서 순종하십시오. 시시때때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불안이 우리를 절대 지배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평안합니까?" 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뭔가 매력을 주는 귀한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코넬(W. P. Cornell)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찬송가 469장 2절을 한번 부르겠습니다.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 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예수님이 이 험한 세상, 무서운 세상을 사시면서 항상 그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평안을 마음에 담고 사는 아름다운 주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항상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심을, 그리고 내가 기도할 때마다 들으시는 아버지 되심을 늘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름답고 복된 삶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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