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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담대한 사람들 /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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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담대한 사람들
본 문 행 4:13~22
설교자 박봉수 목사


  우리가 인생을 한 마디로 쓸 고(苦)자 써서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인생에는 온통 우리가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고통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바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입니다. 실제로 죽음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더 할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 더 이상 죽음은 고통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실패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상실 그 자체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환란과 역경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란과 역경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우리 신앙생활에도 치명적인 해를 끼칩니다. 우리의 믿음을 뒤 흔듭니다.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소망을 무너뜨립니다. 말씀에 순종치 못하게 만듭니다. 비전을 가지고 창조적으로 사역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치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입해서 우리 건강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이 두려움은 우리 신앙생활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고 있습니다. 루마니아 공산체제 밑에서 박해를 받던 범브란트 목사님이 옥중에서 성경을 읽는 동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는 도대체 몇 차례나 있는지 성경 전체를 살폈답니다. 그랬더니 무려 365개나 찾았답니다. 그래서 1년 내내 매일 다른 말씀으로 옥중의 두려움과 싸워나갔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두려움과 싸워 이겨야 하겠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담대하여 이겨나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정말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저들이 성전 미문 앞에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친 일로 소요를 일으켰다고 산헤드린 공의회에 잡혀왔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종교재판입니다. 심각한 종교적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재판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출교를 선언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매장 당하는 것입니다. 사형을 언도 받으면 그 생명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불려갔다는 것은 모두가 두려워 떨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저들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 이하를 보면 산헤드린 공의회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앞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하게 경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그 기세에 공의회가 오히려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원래부터 이렇게 담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대제사장에게 끌려가셨을 때 두려워서 세 번이나 주를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도 아직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자기들끼리만 남았을 때 닥락방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만 했습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걸어 잠겄던 문을 활짝 열고 예루살렘 성내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소리 질러 예수를 전했습니다. 물론 심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끌려가 심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매도 맞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몇 사람은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담대해 진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한 사람들입니다. 두려움을 물리치고 용기 있게 삶의 모든 문제들과 대처해서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딤후 1:7을 보면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두려움을 이기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두려움을 압시다

  본래 에덴동산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한 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창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갖가지 두려움을 겪게 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모든 인류의 두려움의 원형인 것입니다.



1. 죄에 대한 두려움

  창 3:10을 보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니 아담이 두려워서 숨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엄히 명하신 것을 어겼습니다. 일이 저질러지고 난 후에 하나님을 만나니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전에는 이것이 그렇게 무서운 일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나무 사이에 숨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경험한 첫 두려움입니다. 원초적 두려움이요 두려움의 뿌리입니다. 바로 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하나님 앞에서만 심각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바로 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이 두려움이 비로소 심각하게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죄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할 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심령 저 깊은 곳에 이 두려움이 숨어있게 됩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는 이 두려움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사람에 대한 두려움

  창 3:12를 보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이 하와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는 장면입니다. 하와 때문에 내가 이제 망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제 하와가 두려워졌을 것입니다. ‘이 여자 말을 들어서 내가 망했다. 이 여자는 내게 큰 해가 된다. 이 여자 때문에 또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이 여자를 경계해야지 다시는 이 여자 말을 듣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겪게 된 두 번째 두려움입니다. 바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두려움 가운데 상당부분은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겪게 됩니다. 배신에 대한 두려움, 이별에 대한 두려움, 모욕과 수치에 대한 두려움, 핍박과 억압에 대한 두려움... 이런 모든 두려움들은 바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의 한 표현들입니다.



3. 삶에 대한 두려움

  창 3:16-7을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의 삶을 직접 책임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 삶의 모든 문제를 직접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고달픈 인생의 무거운 짐이 저들에게 지워졌습니다. 이 무거운 짐들이 온갖 두려움을 겪게 만듭니다.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녀들에 대한 두려움... 갖가지 두려움이 눈덩이처럼 큰 무게로 다가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저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거칠고 황량한 저 세상으로 내 쫓긴 것입니다. 앞으로 자기들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없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저들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이것이 인간이 겪게 된 세 번째 두려움입니다. 바로 이것이 삶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4. 죽음에 대한 두려움

  창 3:19을 보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죽게 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 반드시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야만 했습니다. 그 문턱 앞에서 감당키 힘든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인간이 겪게 된 네 번째 두려움입니다.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의 두려움은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죄에 대한 두려운, 사람에 대한 두려움, 삶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두려움들의 원인이 무엇인가 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에덴동산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 저들이 두려움을 겪게 됐을까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이탈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저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제일 처음 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더 멀어지니 하나님 아닌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살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 사람들에게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도움 없이 꾸려가야 할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갖가지 삶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나아가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두려움을 이깁시다

  그러면 어떻게 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두려움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겪게 된 것이니까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면 갈수록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아예 하나님과 동행하면 두려움은 전혀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마음속에 새기는 말씀이 사 41:10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근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가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면 한 순간에 죄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면 마치 골리앗 앞에서의 다윗처럼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형통케 해 주십니다. 그러면 삶에 대한 두려움은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가 하나님 품에 안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있으면 어떤 일이 생겨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들판의 양떼가 목자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알아서 다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모든 두려움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시달리는 이유는 그 문제가 크고 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품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주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요? 본문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저들이 홀로 남게 되면서 다시 두려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저들이 다시 담대함을 되찾게 됐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됐을 까요? 바로 성령충만 때문입니다.

  마 28:20을 보면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면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떠나시면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니요? 행 1장에는 이 약속과 함께 하신 말씀이 더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행 2장에 실제로 그 성령이 약속대로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함을 다시 체험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다시 담대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비결입니다. 바로 “성령이 충만하여...” 저들이 성령이 충만하자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이 자기들에게 지금 이루어지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되면서 두려움이 다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해 질 수 있었습니다.

  요 16:33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든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담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담대하라고 명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에 시달리고 계십니까? 그래서 잠이 잘 오지 않고, 불안하고, 하루하루 고통 가운데 사십니까?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성령충만을 체험하십시오.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 기도/

        담대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성령충만으로 모든 두려움을 이기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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