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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아름다운 발걸음 / 사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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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참 아름다운 발걸음 
본 문 / 사 52:7
설교자 / 박봉수 목사


  마라톤 경기는 고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주전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가 다티스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세워 그리스 아테네를 침공해왔습니다. 전함 6백 척에 보명 10만에 기병 1만 명, 당시 실로 어마어마한 병력으로 아테네를 침공해왔습니다. 당시 이들과 대항한 아테네의 군사는 불과 1만 명의 기갑병이었습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아서 아테네는 멸망 직전으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아테네 군은 장군 밀티아데스의 지휘 하에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맞서게 됐습니다. 밀티아테스 장군은 교묘한 전술로 페르시아 군을 협곡으로 유인했습니다. 매복했던 아테네 군이 일시에 공격해 페르시아 군대의 주력부대가 궤멸되었고, 나머지는 급히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밀티아테스 장군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필리피데스를 보내어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필리피데스는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까지 40여 키로를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는 소식을 기다리던 수많은 아테네 시민들에 둘러 싸여 “우리가 승리했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근대 올림픽이 아테네에서 시작되었을 때 마라톤 경기가 육상의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필리피테스의 이 아름다운 발걸음을 기리기 위해서 마라톤 경기를 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안 게임이 1974년에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렸을 때 이 마라톤 종목은 열리지 못했습니다.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 사람들에게 이 마라톤은 더 이상 아름다운 발걸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테네의 사신 필리피데스와 같이 정말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을 현대어 성경을 통해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승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평화와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시온을 향하여 `네 하나님께서 세계의 왕이 되셨다.'고 외치면서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이의 발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롬 10:14-5에서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주님께 보내심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복음 전함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께 보냄을 받아서 낯설고 물설은 타국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주님께 보냄을 받아서 길거리를 누비고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마음속에 태신자를 품고 위하여 기도하고 저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을 주님께서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길거리에 나가보면 정말 사람들의 수많은 발걸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어디론가 분주하게 달려갑니다.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 공부하기 위해 학교로 달라가는 사람들, 장사하기 위해 가게로 달라가는 사람들, 여가를 즐기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 이 많은 발걸음들 중에 특별히 주님께서 주목하시는 발걸음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달려가는 발걸음입니다. 그 발걸음을 주님께서 아름다운 발걸음이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발걸음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냄을 받았습니다

  롬 10: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들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막 16:15를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또한 마 28:19을 보면 “너희는 가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모두가 이 파송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나는 파송받아 온 사람이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일터에서 그리고 삶의 터전 그 어느 곳에서라도 나는 주님께 파송받은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그들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저녁 예배 때 특별 기도를 하곤 합니다.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을 위해 주의 종이 안수하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를 처음 실시하던 5년 전 어느 주일에 한 청년이 이 기도를 받기 위해 앞으로 나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소감과 기도 제목을 말해 보시오.

  그 청년이 말하기를 “저는 상도중앙교회에서 군에 파송하는 군선교사라는 생각으로 입대하겠습니다. 군에 가서 선교사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물론 우리 당회가 이 청년을 군선교사로 결정해서 파송한 일이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군에 입대하면서 우리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파송했다고 믿고 가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청년이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경황이 없어서 이 기도를 받지 못했습니다. 군 입대가 연기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렵게 됐습니다. 그런데 입대하는 날이 바로 할아버지 장례식이었습니다. 입대 시간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장례식에 허겁지겁 달려온 것입니다.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것이 아니고 바로 제 파송기도를 받기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장례식 시작을 잠깐 뒤로 미루고 조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가 안수하고 기도했습니다. 이 청년은 기도 후에 장례식도 보지 못하고 바로 입대했습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너무 고맙고 대견스럽습니다. 군에 가든지 학교에 가든지 외국에 유학을 가든지 주님께 파송을 받아간다는 파송의식을 가지고 믿음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이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발걸음이 아름다운 발걸음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볼 때 사람들의 발걸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향해 나아오는 발걸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에클레시아(ecclesi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로 나오는 발걸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드린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교인들을 두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에클레시아가 신앙생활의 전부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신앙생활에 최우선적인 초점은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일 지키는 것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신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에클레시아는 기본이고 디아스포라에 신앙생활의 무게가 실려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의 주 관심사가 세상에 파송받아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에 두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을 ‘제자’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많으나 제자는 적습니다. 주님께서는 신자들을 보내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보내심을 받든 제자들의 발걸음을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기왕이면 세상에서 제자로 살아가십시오.


복음을 가졌습니다

  본문 사 52:7을 보면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발걸음이 이름다운 이유는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와서 꼭 필요한 좋은 소식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요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시다가 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 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신 이야기가 길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원래 이 여인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았습니다. 문란한 성관계 때문에 이미 그 마을에서 고개를 들고 살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예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서 그 심각한 문제를 풀었습니다. 영적인 해갈을 얻었습니다. 세상을 떳떳하게 살 용기를 얻었습니다.

  요 4:28 이하를 보면 이 여인이 물동이를 그대로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소리쳤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분이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우물가로 달려 나왔습니다. 저들도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예수 만나서 그 삶에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만나서 그 삶이 행복해 진 사람들입니다. 예수 때문에 더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그 예수가 오늘도 내게 좋은 소식이어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 때문에 내 인생이 행복해야 합니다. 과거에 예수 때문에 은혜 받고, 과거에 예수 때문에 문제를 해결 받고, 과거에 예수 때문에 큰 기쁨을 느껴보았고... 이것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가 여전히 오늘도 내게 좋은 소식이어야 합니다.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예수가 좋다오”가 있습니다. 그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많은 사람들 참된 진리를 모른 채 주님 곁을 떠나가지만

          내가 만난 주님은 참 사랑이었고 진리였고 소망이었소

          난 예수가 좋다오 난 예수가 좋다오

          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 난 예수를 사랑한다오.

  바로 지금 나는 예수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예수 때문에 인생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병원 심방을 했습니다. 신장에 큰 문제가 생겨서 신장이식을 하지 않고는 정상생활을 하기 어렵게 된 분이십니다. 이제 하루에 네 번이나 투석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말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분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목사님 병상에서 깨달은 것이 너무 많아요. 주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정말 건강할 때는 몰랐는데 투석을 하면서 깨달았어요. 이제 예수 없이는 못살아요. 저는 정말 행복해요...”

  저는 돌아오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우리 인생의 환경과 조건이 좋을 때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구나! 인생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그 심령 속에 좋은 소식을 주시는 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주님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예수가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수고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 하반부를 보면 “산을 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었다는 것입니다. 난관을 극복했다는 것이고, 큰 수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모두에 말씀드린 아테네의 사신 필리피데스가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40키로가 넘는 그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고 그래서 끝내 숨을 거두어야 했던 것처럼 수고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 10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그 중에 16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제자들이 지금 좋은 소식을 가지고 알려주러 나가는데 그 소식을 듣는 사람들이 마치 양을 공격하는 이리처럼 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7절 이하에는 그 내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심하게 핍박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들을 핍박할까요? 간단합니다. 아직 몰라서 그렇습니다.

  고전 1:23을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좋은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두 종류라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는 이미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저들에게 좋은 소식은 거리끼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을 보니까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 좋은 소식을 들을 때 비위에 거슬려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보신탕을 싫어하는 분이 자기도 모르게 먹게 됐을 때 비위가 상해서 토하려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심령 속에 이미 우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종교는 가지고 있지 않아서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저들에게 좋은 소식은 미련한 것입니다. 어리석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2000년 전에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저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라 하는 청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데 그것과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왜 그를 주라고 불러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 경우 바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바울을 심문했던 베스도처럼 미쳤다고 말합니다. 저들이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좋은 소식을 전해 줄 때 사람들이 비위에 상해하거나 어리석다고 미쳤다고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도 계속 복음을 전하면 핍박을 가해옵니다. 모욕을 줍니다. 기존의 좋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때론 육체적인 가해를 합니다.

  이런 핍박을 견디며 그래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려니까 마치 산을 넘는 것과 같은 큰 수고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큰 수고를 할 때 우리 혼자가 아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 10:19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나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즉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 핍박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우리가 실제로는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지만 실제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전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핍박을 이길 수 있는 지혜도 주시고, 견딜만한 힘도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비위상해하던 사람이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어리석다고 했던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로 저들 심령 속에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 그 심령을 움직여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믿고 기대하면서 우리는 수고를 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오늘 태신자를 작정했습니다. 아직 작정하지 못하신 분들은 다음 주까지 작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작정하신 분들은 이제 구체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파송의식으로, 예수 믿고 깨달은 이 좋은 소식을, 큰 수고로 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 기도/

        파송의식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가 좋은 소식인 삶을 살게 하옵소서.

        복음을 전하는 큰 수고를 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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