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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로운 전쟁과 배타적 종교 / 사 2:4, 막 9: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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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로운 전쟁과 배타적 종교
                    이사야 2:4, 마가복음 9:38~42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email protected])



지금 세계 각국은 불타는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보면서 서로 자기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전세계적 반전 시위를 무릅쓰고 전쟁을 시작한 미국이 예상 밖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정작 더 큰 어려움은 앞으로 다가올 전후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이라크 전쟁 배경은 사실 반전주의자들이 지적하는 중동 석유에 걸린 이권이나 종교적 차이 이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은 전쟁의 명분으로 테러조직의 손에 핵무기와 생화학무기가 주어지는 상황을 염려하며 이를 명분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의 이라크의 전황에 관계없이 앞으로 전후중동지역에는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키려는 미국에 의해 정치적 회오리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도 새 전기를 맞게 될 것 같습니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형제를 억압하는 이스라엘을 증오하고 있고, 이 증오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이 전쟁 중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태 등 조속한 해결을 다짐한 것은 아랍국들과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 해결이 되어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가 세워 질 경우 이라크 정부와 함께 주변 아랍 국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며 종교간의 갈등도 또다시 생겨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4월 2일자 국민일보 기사에서 보면 노스엔젤레스의 이태형 기자는 이런 기사를 주었습니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는 반이슬람주의자이며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에 이어 "빌리 그레이엄 전도단" 대표를 맡고 있고, 현재는 이라크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라크인들을 위해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구호활동을 펼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평소 그레이엄 목사는 이슬람을 사악한 종교라고 지칭하며 이슬람 세계에 기독교를 지원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선교사역이라고 강조했던 인물입니다. 아버지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미국 부시대통령이 신앙의 지도자로서 존경하는 인물이고, 이 전쟁을 배후에 조종하는 것을 볼 때 이 같은 구호 활동은 미국 언론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우리는 현재 미국의 용감한 지도자 조지 부시 대통령과 군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동시에 선한 이라크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다"고 하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이들에게 가까이 할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단지 생필품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도 전하면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도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의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같은 그레이엄 목사의 구호 계획에 대해서 일부 모슬렘들은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슬람 관계위원회 대변인 아브라함 후퍼씨는 "그레이엄 목사는 명백하게 이번 전쟁을 이슬람에 대한 전쟁으로 보고 있다.  그는 부시대통령에게 이슬람은 나쁜 종교라는 확신을 갖게 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라크인들을 도우려 하는지 의심스럽다. 그의 선행은 단지 이슬람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술책이라" 고 폄하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무거운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말에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전쟁을 일으켜서 승리를 얻으려는 전쟁광들은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삶의 고통을 당하게 하여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이럴 때 신앙은 전쟁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강도 만난 이웃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강도가 곧 사마리아 사람이라면 병 주고 약 준다는 우리말이 실감나게 들립니다. 우리는 국민일보 기사 속에 나온 두 그레이엄 목사를 보면서 두 가지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하나는 의로운 전쟁의 명분으로 평화주의자 사랑의 기독교를 드러내려 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자기가 믿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분이라고 고백하여 건전한 종교 다원주의를 배타하는 신앙인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라크 전쟁을 통하여 많은 용어들을 듣습니다. 평화주의자, 양심적인 기피자{conscientious objector}, 불의한 전쟁,  반(反)인도적 범죄 또는 전범 같은 말들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칭 평화주의자들은 자신의 이념적 타당성을 주장합니다. 즉 그것은 구속적인 사랑에 대한 신약성서의 교훈에 따라 악과 싸우는 평화주의적 방식이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부합된다는 것 그리고 동종요법(同種療法)적 원칙은 의약품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관계에서도 궁색한 안내자라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것이다. 폭력을 옹호하는 자들 보다도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좀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평화주의자들은 사악(邪惡)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선량함이라고 주장합니다. 인내와 사랑의 정신으로 가장 완고한 심령이라 할지라도 결국 부드러워질 것이며 만약 공포와 미움을 가지고 접촉을 한다면 똑같은 공포와 미움만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공격을 당하는 순간에 무기를 들고 간섭함으로써가 아니라 폭력을 발동하기 이전에 공격적인 경향들을 미리 내다보고 중화시킴으로써 무고한 자들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평화주의자들은 얼마 안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감화를 미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완강한 자들에게는 억지로라도 옳은 일을 시키고 악한 일을 하지 못하게 억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곤 합니다. 십자군 전쟁, 묵시록 전쟁 ,혁명이 모든 의로운 전쟁의 규범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중요한 이것에 있어서 이들은 의로운 전쟁과 다른 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로운 전쟁" 이론의 모든 견해는 이중적 원리에서 추론합니다. 즉 정의에서 악과 대항하는 물질적 자원을 배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이러한 물질적 자원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대의(大義)를 내세웁니다. 의로운 전쟁은 정당 방위, 약자 보호, 조약의 준수, 권리의 옹호 등 대의를 내세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의를 내어 걸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의로운 전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의 외에도 마땅히 정당한 의도 그리고 선을 진작시키고 악을 억제하겠다는 신중한 소망을 가진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조그마한 침범을 나쁘게 이용하여 영토 확장의 구실로 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엄청난 규모의 고통과 죽음을 수반하는 행위이므로 이를 결코 가볍게 생각에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는 그 모체인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소중히 하는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생명에 본래적인 고귀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왕자인 에라스무스가 안티폴레무스에게 말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대표이며 세상에 사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성육신의 은총을 받은 인간이 동료 인간을 살해하거나 해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해치는 일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음서들은 평화를 지키고 미움을 사랑으로 갚으며 다른 쪽 뺨까지 내어주며 악에 대하여 저항하지 말라는 권면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친구릍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더 이상 값진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명분을 정의로 선포하고 전쟁을 치뤘던 사실들을 역사를 통하여 보와 왔습니다. 또한 보호자적이며 자기 희생적인 사랑 그리고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하려는 염원이 칼을 빼야 하는 유일의 또는 주요 목적이 되었던 것도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책 "유럽의 재난과 기독교 신앙"에서 "어떤 나라도 자국의 국가 이익과 문명 또는 진리의 문제가 서로 부합하지 않는 한 문명 또는 진리를 수호 하지 않는다"고 니버는 말을 합니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의 전쟁관은 양심적인 사람들이 폭력적인 사태에 직면할 때마다 내용을 느끼게 되는 불안을 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전통과 교조(敎條)에 의하여 그 배타성이 강화되고 있는 그 반응들이 폐쇄된 사상 체계로 간주될 때에 그 반응들은 화해하기 어려운 것이 됩니다. 이들을 향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미국의 행위를 일컬어 "양심의 기피자"라 부릅니다.

반이슬람주의자 프랑크린 그레이엄 목사의 이라크의 구호품 동정기사에서 이슬람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그 술책을 보면서 건전한 종교 다원주의를 배타하여 자기 종교를 강요하는 전쟁에 연결시키고자 했던 의도에 대해 다시 한번 종교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아랍어 문명권과 서구 기독교 문화권의 대립 양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종교를 일컬어 궁극실재(窮極實在, Ultimate Reality)에 대한 추구라고 했습니다. 이 추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종교들은 각자 자기들만이 옳다는 자기들의 유일성(Uniqueness)과 자기들의 가르침이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한다는 보편성(Universality)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생래적(生來的) 충동을 가진 것입니다. 많은 종교들은 자기들의 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것,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참 길로서 참 계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내면적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들은 궁극 실재에 대한 표현으로서 자기 자신들 이외의 것을 받아들이면 자가당착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의 세계를 특징짓는 것들 중 하나는 종교적 다원주의 혹은 다종교현상(Religious Pluralism)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적 다원성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세상에 상존해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화적, 언어적, 지리적 경계선들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규모로 붕괴되고 있습니다. 유사이래 처음 우리는 급속도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 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날 서양은 더 이상 그 자체 내에 폐쇄적으로 안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서양은 이제 더 이상 스스로가 세계의 역사적, 문화적 중심이라고 자처할 수도 없고 스스로 유일하게 타당한 종교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자위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모두가 서로 이웃집이요, 서로 영적 이웃입니다. 다른 종교의 신도들이 신봉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경청하고 동정하고 진지하게 여기기를 거절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 보편적인 다종교 현상에서 요청되는 것은 오만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허함입니다. 어느 기독교 신앙가가 "누구든지 실제로 세상 사람들에게 나가 경건하고 명석한 동료 인간들을 향해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너희들은 정죄함을 받았다고 외친다든가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우리의 생각은 옳고 너희도 너희가 하나님 알고 믿고 있는데, 너희 생각은 틀렸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불가능한일이다."라고 했다. 기독교 윤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이 다른 신앙인들에 대해 더욱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안점을 갖습니다. 요한은, 예수 제자 조직에 들어 있는 사람은 정통이고 그것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은 이단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는 잣대가 요한은 예수 제자 집단에 속하였느냐 속하지 아니하였느냐에 따라서 결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말하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유일신론자들이고 예수님은 종교 다원주의자처럼 생각 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종교의 핵심을 41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는 각자 자기의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신의 척도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 경우 그리스도가 판단 기준이 되었으면 어느 종교가 참으로 참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할 때 그 종교에다 그리스도라는 척도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코란이 다른 모든 계시들을 저울질하는 판단 기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역사에서 어떤 몫을 담당하도록 "야훼"로부터 선택을 받았는가 안받았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이해하려 합니다. 힌두교의 경우 유일한 브라만이 모든 길들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로 봅니다. 그리스도, 마호메트, 모세 등을 판단할 때 그들이 브라만의 아바타르(현신)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가지고 따집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본성의 심리학자 철학자 제약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각 종교의 판단 기준이 그 종교가 타종교들과 접촉한 후에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기독교가 채택한 판단 기준은 그것이 희랍철학 및 영지주의와 접촉한 후에 형성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서 기독교 목회자들이 취해야 할 입장은 남의 종교에 구원이 있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정말로 기적을 행하여 병자를 고쳐 주고 있는가 하는 자기 성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로운 전쟁과 배타적 종교" 라는 말씀 드리면서 본문에 있는 말씀으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이야기한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예수께 당신을 따르겠다는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금하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께서 특별히 권능을 주신 자들은 제자들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권능을 행하는 자를 강력하게 금지 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들이 권능을 받았는지 간에 분명한 것은 귀신을 쫓아냄으로서 주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미쳐 알지 못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우월의식, 특권의식,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금하지 말라"고 단호한 책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문제는 어떤 행위의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면 예수에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의의 열매를 내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예수의 뜻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로 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쫓는 지구촌의 한 형제로 평화공동체를 일구어야 합니다. 샬 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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