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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과거`현재`미래 / 히 4:9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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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식 목사 
구원의 과거`현재`미래 히브리서 4장 9절 ~ 11절


우리 교회는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새벽마다 출애굽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에도 출애굽을 묵상하게 됩니다. 저는 출애굽을 묵상 할 때마다 얼마나 큰 은혜를 경험하는 지 모릅니다. 이라크에 전쟁이 일어나던 날에는 10가지 재앙을 묵상했습니다. 무시무시한 미국의 무기들과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모래 폭풍이 서로 over lap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모래폭풍으로 인하여 최첨단의 무기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뉴스로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지난 수요일에 묵상 한 말씀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12장 1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출애굽 12장은 애굽을 탈출해야 하는 임박한 시간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유월절 규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이 달을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출애굽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장소를 성경에서 보고 너무나 큰 은혜를 보았습니다. 출애굽 12장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시작에 대하여 말씀하신 장소는 애굽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서 광야에서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애굽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런 인생을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자유를 허락하시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멋지게 출발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는 인생들입니다. 우리 조상들 중에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남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 조상 들 중에는 살인자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 에게는 감추고 싶은 어두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애굽에 있었던 인생이었습니다. 노예의 인생이었고 죄인 된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신림 교회 성도님들이 모두 이것을 기억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과거는 자랑할 것이 없다 고 우리의 과거는 애굽의 삶이었다 고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9-11절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9-11절

3절 모두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안식입니다. 그런데 안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각각의 절들이 서로 약간 씩 다른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9절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 에 들어갈 시간적 여유가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절은 이미 안식에 들어가 하나님처럼 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1절은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고 권면 합니다. 한국말은 한국말인 거 같은데 도무지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세 절을 묵상하면서 혹시 10절과 11절이 위치가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읽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9절에서 안식 할 때가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다음에는 들어가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11절이 10절에 와야 하고 그리고 이어서 들어가야 할 사람이 노력해서 들어갔다 고 마침표를 찍는 10절이 11절의 자리에 와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10절과 11절을 자리바꿈 하면 이 말씀에는 은혜라는 단어가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9절에 이어서 10절은 바로 은혜를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안식할 때가 남아 있는데 그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힘써 노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표현한 대로 다시 표현해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미 아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구원의 은총을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11절은 무엇입니까? 11절은 구원받은 백성이 이 땅에서 성화 되어야 할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식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맞추어 보십시오. 9절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10절은 출애굽 하여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11절은 가나안에 들어가 거룩한 삶을 위하여 싸워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먼저 9절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9절

그렇습니다. 복음은 어느 특정인의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지금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의 품군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포도원에 일하기 위하여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전 9시에 어떤 사람은 정오에 어떤 사람은 오후 3시에 그리고 마지막에 일하러 온 사람은 오후5시에 왔습니다. 일이 끝나는 시간은 오후 6시입니다. 이렇게 일군들이 시간차를 두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임금을 정산할 때 포도원 주인은 놀랍게도 모든 일군들에게 그 날 하루의 임금인 1데나리온을 일율적으로 주었습니다. 이런 임금 정책에 가장 감격한 사람은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일하고 1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일 것이고 가장 불만이 많았던 사람은 아침 9시부터 와서 일하고도 1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와서 일한 사람이 노골적으로 주인에게 화를 내면서 이것은 부당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부당합니다. 이런 임금체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임금체계를 가지고 사업을 하다가는 금방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업하시는 분으로서 이렇게 사업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것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보고 부당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많이 투자되었느냐 로 기준을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마태복음 20장이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천국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말씀이 포도원 품 군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실 때 왜 일찍 온 사람이 화를 내면서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종교의 잣대로 구원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인간의 기준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의 투자와 노력에 있지 않습니다. 마감직전에. 오후 5시에 온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바로 옆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어 가는 사형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구원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없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방인의 수가 충만 할 때까지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이 문을 하나님이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시면 누구도 닫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철학으로도 이 구원의 문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 구원의 문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문을 닫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문을 닫으시면 어느 누구도 열 수가 없습니다. 종교의 힘으로도 열 수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은 곧 오실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 닫힐 것입니다. 속히 들어오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전하셔야 합니다. 구원의 문은 지금도 열려 있다고 가서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어린양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위하여 준비된 흠 없는 어린양을 3일 동안 말뚝에 메어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어린양을 바로 잡지 않고 3일 동안 말뚝에 메어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구원의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이게 뭐에요? 네..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대신 죽어야 할 양 입니다. 이 양의 피를 바르면 죽지 않아요 라고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집 대문을 들락거릴 때마다 묻습니다. 엄마? 이게 무어에요? 그러면 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어린양이란다 라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 동안 말뚝에 메어 있는 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장자의 죽음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출애굽 12장 38절에 보면 중다한 잡족들이 같이 나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애굽을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문은 유월절 어린 양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이 땅에 주님이 재림하실 때 어린 양의 피로 여러분의 모든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10절입니다. 이제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절대로 다시 애굽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홍해바다가 다시는 갈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홍해바다는 구원을 위한 바다입니다. 홍해바다는 다시 애굽으로 가려는 사람을 위하여 열리는 바다가 아닙니다. 이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나와야 합니다. 이미 자유는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가기를 거부합니다. 다시 애굽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놀이 공원에 가서 회전 열차를 타 보셨습니까? 일단 자리 잡고 앉아 있으면 물릴 수가 없습니다. 무섭다고 내릴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이미 그 사람은 회전 열차에 몸을 맡긴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 사람은 도착지까지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미 와 아직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직 이라는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 것입니까?--11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로 나와 지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것은 나 하나 편하자 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마음에 안식을 얻기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메었던 나의 멍에를 버리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이웃을 위한 멍에입니다. 이 멍에는 메는 것을 배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해 주시는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계3:20

여러분! 이 말씀은 지금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3:14절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문밖에서 문을 두드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여러분! 그러면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이 교회는 지금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는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22절에 성령 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말씀 앞에 부끄럽습니다. 아마도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 목사가 교회나 일반 시민들에게 돈과 여자 문제 앞에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하여 대화를 요구하여도 전혀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어제 신문에 새 정부에서 민정 수석으로 일하는 사람이 속내를 이야기하면서 사회에서 정말 신망 받고 존경받는 인물이어서 새 정부에 지도자로 세워 드리려고 알아보면 대다수가 전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문을 닫아 걸고 자기 편하면 된다는 인생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과 교회를 가르켜 운동선수 인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에는 한 반에 한 명 정도 운동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선수는 일년에 한번 정도 교실에 들어 올 까 말까 합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 학생이 우리 반인지 모릅니다.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을 전혀 배우지 않고 졸업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도 이런 운동선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주님은 지금 그런 사람에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종교적인 안위나 위로를 받는 것을 그만하고 문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서로가 광야에서 나누고 격려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공사중인 인생은 보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공사를 중단한 인생은 정말 보기 흉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 면 거기서 중단하지 마십시오. 가나안에 갈 때까지 힘써 노력하는 거룩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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