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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료하시는 하나님 / 출 15:22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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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하시는 하나님
(출15장22-26) 


사랑의 연고

어느 엄마가 부엌에서 국을 많이 끓여서 옆집으로 가지고 가는 것을 보고, 유치원 다니는 딸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는 왜 옆집에 국을 가지고 가는 거야?" "옆집 아줌마의 엄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가슴에 상처를 입으시고 누워 계신단다"라고 대답하고 국을 가져다주고 돌아오니까, 딸아이가 무엇을 찾아 가지고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일회용 반창고를 가지고는 옆집 아줌마에게 간 것입니다. "엄마가 그러는데 아줌마 가슴에 상처가 있다면서요.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면 곧 나을 거예요" 이 딸아이가 가져온 반창고는 마음을 치료해 주는 반창고입니다. 반창고에 연고도 없지만 깨끗한 사랑의 연고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슬픈 마음, 괴로운 마음, 억눌린 마음을 치료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착각은, 출애굽만 하면 즉시로 가나안에 입성하여 행복하게 살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과 불평이 어디서 기인했습니까? 생각지 않던 광야에서, 생각지 않던 시련과 궁핍 때문에 왔습니다. 광야의 생활! 한마디로 혹독한 연단의 생활이요, 긴장의 생활인만큼 심신이 고달팠던 생활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성도들의 착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달라지고 만사형통하며 부귀와 영화가 보장되어 있는 냥 생각했다가 환난과 위기가 오면 주님을 원망하거나 등지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안식이 오기까지 광야는 필수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는 것을 이제는 눈으로 보면서 피부로 느끼면서 홍해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홍해를 건널 때 그 다음이 어찌될지를 잘 몰랐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적어도 40년 동안 이 백성을 이끌어 가나안땅으로 들여보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를 돌아서 그리고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인도하겠다는 하나님의 일정표가 정해져 있는데 그 40년 동안에 물을 먹고 싶을 때에 물먹지 못한 때가 없으며 배고파 한 적이 없습니다.

매일 먹을 수 있는 만나와 그리고 물을 내어 주었습니다. 물이 없는 곳에서도 반석이라도 반드시 생수를 내어 주어서 물을 마실 수가 있었고 그리고 뜨거운 햇살에 타지 아니하도록 구름 기둥으로 그리고 추운 밤에 얼어죽지 않도록 그리고 불기둥으로 그리고 밤에도 여행할 수 있도록 40년 동안을 하루도 빼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한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첫 치료는 쓴 물

그런데 하나님께서 3일 동안을 물을 먹지 못하는 곳으로만 인도해가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큰 이적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 마시게 할 힘이 없었겠습니까? 얼마든지 물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의도적으로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해서 가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물이 없었습니다. 3일을 물 마시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목마르겠습니까?

사람이 먹지 않고는 적어도 한 40일까지는 살수 있습니다만 물을 마시지 않고는 1주일 이상 살지를 못합니다. 벌써 3일되면 죽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래서 3일 동안이나 물을 전혀 마시지 못하고 여행을 많이 했으면 얼마나 목마르겠습니까? 그것도 가만 앉아 있었으면 모르지만 3일 길을 가는 동안에 물 없었더라면 그것이야말로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저들이 갖고 나온 음식은 그럭저럭 먹었다 할지라도 물이 없으니 굉장히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들을 3일 동안 물 없는 곳으로 목마르게 하다가 한 샘에 도달하게 하는데 그 샘의 물이 쓴 물이었습니다. 썩은 물 있는데는 보지만 쓴 물이 나오는 샘은 좀처럼 보지 못할 겁니다. 만약에 쓴 물의 샘이 있다면 그것은 약 샘이 되겠지요. 보통 3일을 목마르게 되면 무슨 물인들 마시지 않겠습니까? 우선 먹어야 사는데 쓰다고 안 먹겠습니까? 그러나 이 백성들은 쓰다고 먹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홍해를 건너게 한 다음 40년 동안을 목마르게 한 적이 없는 하나님께서 3일 동안을 물 없는 곳으로만 이끌고 다니시다가 만나게 한 샘이 썩은 물이 아니라 쓴 물의 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3일 동안 물을 굶긴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아프지 아니하기 때문에 쓴 물 주면 먹지 않습니다. 목이 마르면 먹을 줄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생의 심리를 잘 아십니다. 급하면 먹을 줄로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들에게 쓴 물을 먹이려고 했던 겁니다. 약을 먹이려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3일전 큰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쓴 물먹지 않고도 떠들어대면 반드시 좋은 물 주실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장엄한 역사를 본 것이 며칠 전이기 때문에 믿는 데가 있어서 '이물 안 먹겠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부르짖는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참 이 사람들 대단하구나. 먹기는 먹어야 되겠으나 쓰니 먹기 좋지 않겠지, 마시기를 거절하는 도다." 그랬습니다.

마시기를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거절하는 그들에게 놀라운 치료법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 물을 달게 만들어 주시고 그 단물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치료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나 여호와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왜 '치료'라는 말이 나왔는지를 살펴보면 이 쓴 샘으로 이끌었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15장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5:22-26)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현장에서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했을까요? 병들었다고 고쳐 달라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백성으로 하여금 병들지 않게 하겠다고 하지 않고 치료하겠다고 하시고, 치료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병이 발병은 안 했지만 병의 요인이 그 속에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너희로 병들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너희를 치료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전혀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누가 병들었다고 병 고쳐 달라고 했습니까? 지금 신나게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이 사람들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 내가 내린 재앙으로 말미암아 나쁜 공기를 애굽 사람과 함께 마셨고, 나쁜 물을 또한 먹었고 그리고 오염된 식품을 먹었으니 다 죽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치료를 받아서 계속해서 생육하고 번성했지만 이스라엘이 나온 후에 애굽은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병들어서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우선 병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병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은 건강하기 때문에 쓴 물을 안 먹겠다고 합니다. 이만큼 목말라서 먹을 줄로 알았습니다. 먹으면 전부 치료가 되겠지만 그러나 이들은 먹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우리가 이 고생하고 나왔는데, 썩은 물이라도 애굽에서 먹을텐데 무엇 때문에 쓴 물을 우리에게 주느냐고 불평합니다. 그것을 먹지 않으려 하니까 하나님께서  "먹기 싫어하면 어찌 내가 쓴 물을 먹도록 강요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하여 "옆에 있는 한 나무를 보라." 그랬습니다. 그 곳에 마라에는 쓴 기운을 내는 쓴 물의 나무가 있는가 하면 또 달게 하는 나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달게 하는 나무를 꺾어서 던지니 그 나무가 쓴 기운을 다 해독시켜버렸고 물이 달아지기 시작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5:25-26)

애굽 사람에게 이미 병을 내렸습니다. 그 내린 병은 이스라엘 사람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그 원인이 다 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는 하나도 발병되게 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첫 치료는 쓴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쓴 물먹기를 싫어하고 치료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또한 율법과 계명을 그들을 위해 거기에서 내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계명을 내시고 지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내신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을 위하여 내신 것입니다. "너희가 청종하고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지키면 너희 속에 죄의 원인이 있을지라도 하나도 애굽 사람이 병드는 것처럼 병들어 죽지 아니하게 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건넌 후에 3일길 목마르게 끌고 간 것도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쓴 물의 샘을 만나게 한 것도 그물을 마셔서 속에 들어간 모든 오염된 병균을 죽이려고 했던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백성은 "내가 사는 것도 좋지만 쓴 약을 먹기는 싫습니다. 쓴 물은 마시기는 싫습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들에게 율법과 계명을 주시면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치료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쓴 약을 두려워하고 먹기 싫어하는 자에게 율법과 계명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셔서 그 뜻대로 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병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치료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고 있으므로 고통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 죄를 지었으니 죄 값을 치러야만 할 사람들에게 쓴 물을 먹어야 할 사람들에게 나무를 던져줌으로써 그 나무는 쓴 물을 빼앗아가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리시므로 우리가 당할 고통을 그가 당하신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은 저질러놓고, 죄는 우리가 저질러놓고, 병은 우리가 들었는데도, 저주는 우리가 받을 일을 했는데도, 주님께서 고통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그 나무에 달리사 우리가 마셔야 될 쓴 기운을 주님이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 율법과 계명은 불신자에게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낸 모든 율법이 우리를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참 사랑인줄을 그 강령을 통해서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율법의 대 강령은 사랑이라고 한 말씀을 여기서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쓴 것을 싫어하는 백성에게 나무를 던져 물을 달게 해 주신 하나님, 병은 우리가 들었으나 수술을 싫어하고 약을 싫어하는 우리들, 병 고치기 위해서 운동하라고 해도 하기 싫어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그것이 싫더냐? 그러면 내가 계명과 율례를 줄 것인즉 이것을 지켜보아라. 그러면 치료가 될 것이니 나는 너희를 통하여 시험해 보겠노라. 내 말의 위력을 시험해 보겠노라. 율법과 계명이 쓴 물 보다 더 효과 있는지 없는지를 너희를 통하여 시험해 보겠으니 너희는 율법과 계명을 지켜라. 나는 그러면 그 계명을 지키는 너희에게 치료를 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모든 율법과 계명으로 우리를 치료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압력을 높이자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는 3중고의 고통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듣지 못했고 말하지 못했고 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만 해당되어도 '불행하다' 생각하고 비관 내지는 절망할 터인데, 헬렌 켈러가 살던 집 앞에는 이런 글귀가 써 있다고 합니다. '나에게는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우리 자신과 헬렌 켈러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심각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말하고 듣고 보는데... 그리고 아직 남은 것과 받은 복이 더 많은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아마도 우리가 살던 집 앞에 훗날에 이런 글귀가 써있지 않을지 부끄럽습니다. '나에게는 불행한 날이 더 많았습니다."

일본 작가(현재는 목회자 사모)인 우지끼 노부로 여사는 청소년 시절의 사고로 두 다리와 한 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작가가 되어 책을 썼는데 팔 하나만으로 쓴 그분의 책제목은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입니다. 헬렌 켈러와 우지끼 노부로 여사를 그토록 행복하게 하고 황홀하게 만들었던 행복의 원천은 무엇일까? 를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우리와 동일하게 주님을 섬기고 사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의 삶의 내용과 믿음의 결과가 다를 수 있는지 무거운 숙제로 남습니다.

생각과 고민, 묵상만으로는 우리의 짐이 가벼워 질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숱한 고난으로 길들여져서 그런지, 아니면 험악한 세월로 인하여 마음이 강퍅해져서 그런지 어디가 아파도 그냥 버팁니다. 삶이 버겁고 힘들어도 그냥 운명처럼 받아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문제와 짐이 있어도 할 수만 있으면 홀로 지고 가는 일에 학습 된 듯 합니다. 깊은 상심과 바다 만한 상처로 아파도 혼자 묵상하며 '시간이 약'이라 말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엉금엉금 이라도 기어 나와 엎드려야 합니다. 생각과 고민 그리고 묵상만으로는 우리의 짐이 조금도 가벼워 질 수 없습니다. 짐을 맡기는 기도 없이는 우리는 앞으로도 날마다 행복할 수 없을지 모를 일입니다.

깊은 바다 속의 수압은 대단하여 잠수함도 찌그러뜨릴 정도입니다. 그러나 작은 물고기는 유유히 그 속에서 생존하며 살아갑니다. 잠수함도 일그러지는 심해 속에서 작은 물고기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바다 속의 수압보다 물고기 속의 압력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불철주야 다가오는 무수한 압력들로부터 우리가 터지고 깨어지지 않을 충분한 이유는 우리 속의 믿음의 압력을 올리는 것입니다. 질병의 압력, 물질의 압력, 가시의 압력, 상처의 압력.....들이 우리를 쉬지 않고 누를 때 우리 속에 있는 은혜와 영성의 압력을 높이면 우리도 헬렌 켈러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승리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그 사람들이 위대하고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 속에 있는 믿음의 압력이 날마다 상승되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 학습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짖 누르는 무거운 짐의 압력보다 우리의 짐을 날마다 짊어지시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압력이 더 크면 하루하루를 넉넉히 감당하고 이겨나가고 버텨낼 수 있습니다. 그 짐이 태산 같을지라도...

우리가 이처럼 매일 매일 힘들지만 매일 매일 엎드려 기도할 수 있다면 먼 훗날에 성도의 집 앞에도 이렇게 씌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때문에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과 감사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비록 그날이 더딜지라도...

어쩌면 우리 인생 전체의 삶이 마라와도 같습니다. 마라의 쓴잔 앞에 괴로움을 당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십자가 밑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나타나는 신비한 권능의 치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갈보리 언덕 위에서 주님 달려 죽은 그 십자가는 바로 나와 우리 인류역사의 구석구석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들의 삶을 바꾸어 주셨음을 굳게 믿으시고 쓴 물 나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 단물의 변화의 축복을 받아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원망했던 사람도 절망했던 사람도 치료하신다.

원망은 질병의 쓴 뿌리가 됩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내면의 세계가 황폐하게 됩니다. 모든 정신적 질병이 이때에 공격해 옵니다. 홍해의 기적을 보고 감사 찬양했던 그 백성들이 불과 사흘 후에 그 입술로 원망한 것은 모든 질병을 불러들이기에 적합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원망하는 자도 치료했습니다. 쓴 물이 기적으로 단 물이 되게 하여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원망 사건 이후에 백성들은 회개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그 어떤 질병도 그 여호와께서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이 언약은 불변합니다.

광야의 출애굽 백성은 쓴 물 때문에 원망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고 크게 절망했습니다. 원망과 절망은 쌍둥이입니다. 남을 파괴하는 것이 원망이라면 절망은 자기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바다를 가르는 홍해의 기적을 보고도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절망했던 이 백성에게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질병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소망이 없는 환자는 의사도 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쓴 물을 단 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데도 그 하나님은 의식하지 않고 현실만 바라보고 낙심, 좌절, 절망하면 응징과 징계의 질병이 따라옵니다.

말씀을 청종하는 것은 치유의 길입니다. 원망했어도, 절망했어도 이제 여호와 말씀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먼저 내적 치유가 발생합니다. 감사가 회복됩니다. 전천후적인 감사,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감사는 영혼의 질병을 낳게 합니다. 근본적 치유입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이 치유되면 영혼의 질병과 함께 육신의 질병도 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 마라의 쓴 물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달게 만들어 주는 관문이 됩니다. 쓴맛을 알아야 단맛을 압니다. 쓴 것을 모른 혀는 단 것을 모릅니다. 세상이 쓴 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단 줄을 압니다. 세상이 허무한 줄 알아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마라의 쓴 물은 엘림의 축복으로 가는 하나의 필연적인 통로였습니다. 마라의 아픔은 하나님께서 더 큰 위험을 막아 주시고 믿음의 날개로 세상을 날게 하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은혜의 장소입니다. 인생이란 뚜껑을 열면 쓴 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라는 쓴 물, 고통의 인생, 쓴 가정, 쓰디쓴 세상사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십자가는 모든 것을 고치고 치료하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상처가 있든지 이 십자가를 내 인생 가운데 던지면 내 안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 십자가는 치료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지난 수 천년 동안 갈보리 언덕에 서 있는 이 십자가는 인류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들에게 삶의 질병을 고치고 삶의 맛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십자가 나무가 던져진 곳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무의미하게 보람없이 살던 사람들이 보람을 찾았고, 슬픔 속에 살던 사람들이 기쁨을 찾았고, 다툼 속에 파괴되었던 가정들이 평화와 사랑을 찾았고, 질병에 시달리던 자들이 건강을 찾았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는 다리입니다. 마라에서 엘림으로 나아가는 다리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예수님은 뭇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제자들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았으며 마지막 십자가의 상처를 받고 그는 거기에서 살이 찢겨지고 피 흘리면서 죽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상처받은 생애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자기 백성들로부터 상처받고, 제자들로부터 상처받고, 마지막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처를 온 몸에 지니고 죽은 상처의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상처를 원망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모든 상처를 홀로 체험하신 예수님은 결국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위대한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상처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으면 받은 만큼 상처받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아픔을 겪는 분이 있습니까? 이제는 그것이 사명이 되어 배고픈 이웃들을 치유하고 도와주는 사명임을 느껴야 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친구로부터 배신을 경험한 쓰라린 상처가 있는 분들은 그것을 가슴에 품고 원망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이 그런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치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질병 가운데서 치유 받고 회복되신 분들은 바로 내 주변에서 그런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하고 좋은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과거가 상처로 얼룩져 있을 때 생각하면 아프고 쓰라린 나날을 살수밖에 없는 연약한 삶이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운명을 비관하거나 원망하고 상처 입힌 사람들을 증오하고 원수를 맺지 말고 자기 자신이 그 상처를 사명으로 바꾸어서 치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상처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상처를 상처로 두지 말고 그 상처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모든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상처를 예수님이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처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부활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상처로 모든 아픔을 겪고 죽음의 고통을 겪었지만 결국 그 상처가 부활로 승리해서 상처입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허덕이는 모든 인류에게 치유자로서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봄이 왔어도 겨울을 사는 사람이 있고, 새벽이 왔어도 아직 밤중인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좀처럼 요동치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지만 그 때뿐이고, 기도를 열심히 해도 그 때뿐이고, 말씀을 듣지만 역시 그 때뿐이고 감동을 받아 눈물도 흘리지만 역시  그 때뿐입니다. 깨달음은 많으나 적용에 실패하고, 은혜의 도가니 안에 온몸을 담근 듯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이며 문제는 문제로 남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구원의 시작이라면 구원의 성숙은,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겨우 산소마스크로 생명을 연명하시는 앉은뱅이 신자들이 많습니다. 웃음 뒤에 그늘이 보입니다. 눈물 뒤에 한숨이 보입니다. 뜨거움 뒤에 한기가 느껴집니다. 즐거움 뒤에 외로움이 보입니다. 봉사 뒤에 허전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봄에 겨울을 살고 새벽에도 한 밤중을 살고 하늘에서도 땅을 사는 것입니다. 묶음과 눌림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질병,궁핍,상처,열등감,우울증,미움,사람,가시,외로움,억울함,돈.... 결박이 건강을 누르면 병이 생길 수도 있고, 결박이 생각을 누르면 우울해질 수도 있고, 결박이 마음을 누르면 상처가 될 수도 있고, 결박이 영혼을 누르면 영성이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봄이 왔어도 겨울을 사는 것과 아침이 되었어도 밤중을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충분히 겨울 중에도 봄을 살수 있고 밤중에도 새벽을 깨울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한 의인은 없습니다. 사랑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한 자도 없습니다. 용서받지 않아도 될 만큼 깨끗한 사람도 없습니다. 치유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완전히 건강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치료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며 상처 입은 치료자 되시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모든 아픔과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온갖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반전의 의식을 가지고 전쟁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이념과 사상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어져있는 사람들 사이에도 상처가 깊게 파여 있습니다. 자기 갈등과 죄와 죄책감, 미움과 증오, 자기 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 내면에 깊게 드리워져있는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밑에 가까이 나오셔서 온전한 치유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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