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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천하와도 바꿀 수 없어서 / 마 16: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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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일시 : 2003.04.13
† 설 교 자 :손상률
† 설교제목 :천하와도 바꿀 수 없어서
† 성경본문 :마태복음 16:26∼28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사람마다 좋고 나쁨에 대한 사리판단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교육정도나 생활환경 또는 문화의 수준에 따라 다른 가치관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衣食住) 문제와 같은 현실적인 것에 비중을 두고 물질 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경우는 권력이나 명예에 집착하여 물불 안 가리고 이를 위해 전력투구합니다. 그 외에도 육신의 쾌락과 세상적 즐거움에[ 자기를 던지기고 하고, 어떤 이는 학문이나 예술, 또는 남보다 우월한 도덕률에 자기 인생을 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6:25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것 한가지도 가치 없는 것이 없겠지만 그 비중에 있어서는 단연 사람에게 비길 것은 없습니다. 본문 말씀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천하를 주어도 바꾸지 않을 그 가치 때문에 하나님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그것을 지키려 하십니다.

오늘날 지상에 있는 자기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다지도 소중히 여기며 가치를 부여하는 그 생명을 맡기고 관리하도록 분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이 일에다 자기 교회의 존재 이유를 실어 놓은 것입니다.


Ⅰ. 인간생명의 존엄성

세상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권력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하는 경우가 있고, 또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폭력으로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오늘날 일부 단체에서는 자연 환경을 보호한다고 하면서 그보다 귀중한 인명은 무시하는 행동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들입니다.

(1) 생명이 있고 천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좋다는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은 사람도 막상 그 생명을 잃고 나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옛날 마게도냐의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은 약관 20세에 제왕이 되어 세계를 제패하였습니다. 당시 세계 곳곳에는 그가 정복한 땅에 자기 이름을 딴 도시(Alexandria)만 70개가 넘게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그처럼 광활한 영토에 찬란한 희랍문명을 꽃 피우는 등 불세출의 인물이었지만,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남으로서 인생의 허무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알렉산더가 바벨론에서 열병으로 죽어가자 그의 부관이 "폐하께서 서거하시면 이 넓은 땅을 누가 맡을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알렉산더는 귀찮다는 듯이 "힘센 자가 다 가지라고 해라"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곡간을 크게 하고 곡식을 많이 쌓아둔 어떤 농부가 스스로 자기의 부요함에 도취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눅 12:15-21).

(2) 생명을 위해서 천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위해서 사람을 지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물질을 있게 하였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짓기 전에 차례대로 천지와 만물을 먼저 만드셨습니다(창 1:1-14). 창세기 2:4-7에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다 지으신 다음 사람을 지으시고 그것들을 경작하고 다스리게 하신 것으로 보아 자연과 만물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생계의 수단으로 산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꿩과 산비둘기들이 씨앗을 주어 먹어 버립니다. 이 농부는 새총을 가지고 그것들을 막아내며 작물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세상은 이 사람에게 삼림을 훼손한 것과 야생 동물을 포획했다는 죄목으로 제재를 가하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삼림이나 야생동물보다도 사람의 생명이 더 소중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볼 때 세상의 제도나 관행도 당연히 생명을 위한 생존의 수단이 우선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그 어떤 것도 생명의 가치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누가복음 14:1-6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가셨을 때 고창 병 든 사람을 보시고 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곧 안식일에 해서 안 될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조문이나 그들의 생활 관습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귀할 수 없다고 정의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 가셨는데 거기서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무덤 사이로 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그곳에 돼지가 이천 마리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있는 귀신을 나가게 하시니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그 많은 돼지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 몰사했습니다(눅 8:26-39).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는 재산상으로 엄청난 액수이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귀신 들린 한 사람의 생명에 비하면 그 가치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Ⅱ. 가장 가치 있는 생명은,

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평가가 다르듯이 사람의 생명에도 가치가 다릅니다. 가령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버린 가룟 유다의 경우 그는 가치 없는 인생으로 분류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 대하여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20:24). 세상을 사는 사람 중에 가룟 유다처럼 멸망을 위하여 예비된 자식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17:12, 살후 2:3). 이들의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영생을 위하여 예비된 생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는 생명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뿐 만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까지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되는 자들입니다(마 13:43).

(1) 거듭난 자의 생명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에게서 구별된 사람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연인인 본래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3:3). 여기 거듭난다고 하는 중생(重生)의 도리를 니고데모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도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요 3:4).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3:5). 거듭난다는 말은 육체가 두 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을 가진 자연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신비로운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생명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 갈 때는 송아지와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그 몸을 불태워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제단에서 피를 흘리고 불태워지는 제물은 제사 드리는 사람을 대신하여 희생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찾아보아야 됩니다. 히브리서 9:13-14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존귀한 생명의 소유자들입니다. 사도행전 20:28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만물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로마서 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기대가 있는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의 피로 속죄하시고 거룩한 신분에 걸맞게 하사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2:32에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눅 22:29-30).

성도는 내세에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 받을 자일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어 드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에 맡기신 사명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펼쳐나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욱 존귀하게 여기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예레미야 1:18-19에는 내가 너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과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Ⅲ. 이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

천하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다고 한 생명이라면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신 내용입니다. 이사야 43:4에는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애착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자기가 가장 아끼는 귀한 물건이 있으면 아무데나 방치하지 아니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며 마음을 쓰게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의 생명에 대하여 보배처럼 존귀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사 43:4). 이사야 49:16에는 "내가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2:10에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9:4에는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건넸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9:15에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잃거나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요한복음 10:28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된 우리들을 각별히 아끼시고 관심을 갖는 것만큼 절대로 잃거나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두고 부모와 자식간의 애정으로 묘사한데가 많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3:16-28에는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나옵니다. 거기에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솔로몬은 칼을 가지고 그 아이를 반으로 쪼개서 나누어주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산 아이의 어머니는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그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어도 좋으니 아무쪼록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자식을 향한 모정이 동물적인 본능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었을 때 "백발이 음부로 내려가는 고통" 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창 42:38).

(3) 기어이 찾아내고 맙니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따라 오시며 어느 곳에 숨어 있어도 기어이 찾아내시고 만다고 하였습니다(시 139:7-12). 중생한 영혼을 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잃거나 빼앗기고도 그냥 넘어가실 리가 없습니다. 역사 이래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를 통하여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는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역대의 선지자를 보내기도 하셨고, 계시와 환상을 보이기도 하셨으며, 급기야는 독생자 예수님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세상에 보내시고 찾아내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9:10).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자를 찾는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목자가 백 마리 양떼 중에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것과, 여인이 열 드라크마 중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는 것과, 그리고 두 아들 중하나를 찾는 아버지의 심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다 찾기 위해서 애를 태우고 노력을 한 끝에 기어이 찾아내고 맙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그 중에도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경우 이웃을 다 모아 놓고 크게 잔치를 하면서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하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천하를 다 준다해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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