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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석위에 세운 교회(1) / 마 16 :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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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위에 세운 교회(1)
마 16 : 13-20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저의 전공은 기독교교육입니다. 기독교교육을 전공함으로 배운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교육적 마인드와 안목 그리고 교육적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마인드와 사고방식이 저의 가정생활에도 적용되고 있고 목회생활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설교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교육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명제 중에 하나는 ‘반복되지 않는 진리는 학습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법 중에 하나는 복습입니다. 반복을 통한 학습의 원칙을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우리에게 학습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관주가 있는데 관주의 의미는 그와 같은 말씀이 다른 성경에서 어디에서 반복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어리석게 회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설교가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수 많은 말씀이 설교를 통하여 강단에서 선포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교인들에게 학습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제 개척 된지 일년 반 밖에 안 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벌써 세 번째 반복하는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높은 뜻 숭의교회를 처음 시작하면서 foundation과 basic으로 삼은 말씀입니다. 개척의 첫 설교가 이 본문의 말씀이었고 전에 등록교육을 할 때 제 강의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을 차례대로 설교하는 과정 중에 다시 오늘 이 본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의식중에 벌써 두 번이나 반복하는 내용의 말씀이니 건너뛸까 아니면 좀 다른 식으로 설교를 할까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식과 시각으로 설교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다시 전에 했던 설교를 반복하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거의 예화하나 바꾸지 않고 다시 설교를 반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셔야 할 일은 그 전의 원고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지만 새 밥을 짓듯 다시 새 마음으로 원고를 일일이 타이핑해서 하는 설교라는 사실입니다.

전에 목회하던 교회 책상 유리 밑에는 청량리 중앙교회 사진이 있었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는 제가 어려서부터 다녔던 모교회입니다. 교인들은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사진을 놓아두지 않고 아무리 모교회라고는 하지만 청량리 중앙교회 사진을 놓아두는 것이 조금은 이상한 것 같았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 사진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가 있곤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인데, 그와 같이 많은 복을 받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저는 좋은 교회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좋은 교회가 바로 청량리 중앙교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우리 아이들이 제가 받은 복을 해달라고 기도하고, 제가 목회하고 섬기는 교인들이 제가 받은 복을 받게 해달라고, 다시 말해서 좋은 교회를 만나는 복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부족하지만 저는 지금도 그와 같은 기도를 하면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운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중요성을 모르고 교회를 하찮게 여기는 어리석은 마음의 발로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이 교회도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많은 대가를 치루고서라도 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대학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좋은 대학을 찾아 나서면서, 외국까지 좇아가면서, 교회는 왜 그냥 쉽게 가까운데서 찾으려고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언제든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바르지 못하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면 일차 기도하시고 고치기 위하여 노력하시다가 그래도 안 되시거든 너무 진을 빼지 마시고 좋은 교회를 찾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좋은 교회 바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잘못을 해도 교인들이 의무감에만 사로잡혀 교회를 떠나지 않으니까 교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잘못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물론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리이며 축복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좋은 교회,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축복해 줄 교회라는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오신 분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면 우리 한번 최선을 다하여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정말 그런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공부하고 노력하십시다. 그리고 정말 좋은 교회를 만나고 다니는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교회란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그것은 가까워서 다니기 편리한 교회도 아니고, 건물이 크고 화려하며 무조건 교인이 많은 교회도 아닙니다. 좋은 교회란 간단합니다. 좋은 교인들이 많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교인입니다. 좋은 대학이란 어떤 대학입니다. 물론 건물과 시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제일가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대학의 제일가는 조건은 좋은 교수와 좋은 학생입니다. 좋은 교회의 조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인이란 어떤 교인이겠습니까? 돈이 많은 부자교인이 좋은 교인이겠습니까? 물론 부자도 좋은 교인 될 수 있지만 무조건 부자라고 좋은 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서 남선교회가 주최하는 전도집회를 맡아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둘째 날 집회를 마치고 인사를 하는데 어느 사십 대 남자 집사님 한 분이 자기 교회 목사님과 악수를 하면서 이렇게 큰 소리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오늘 대어 한 마리를 낚았습니다’

그 말은 큰 사람 하나를 전도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대체 누구를 대어라고 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은 아주 자랑스럽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네, 제가 오늘 그랜져를 타고 다니는 사람 하나를 전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랜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차 중에 하나였습니다. 큰 차를 타고 다니는 부자를 전도했으니 대어를 낚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다 피라미라는 말이냐?.....>

어느 목사님이 ‘한달에 십일조 백 만원하는 사람 백 명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하나님께 <한 달에 엽전 두 푼이라도 좋으니 온전한 십일조를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 백 명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교회는 돈보다 믿음에 승부를 걸어야만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보다 돈에 승부를 걸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돈을 무조건 백안시 할 필요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교회가 믿음보다 돈에 더 욕심을 낸다면 그 교회는 절대로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교인이 많은 교회를 의미하고, 좋은 교인이란 믿음이 좋은 교인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이 세상과 자신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죄입니다. 죄란 자신이 세상과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 구원을 얻습니다. 성공합니다. 승리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라고 고집하는 죄를 지으면 죽습니다. 망합니다. 실패합니다.

잘 사는 식이 있고 잘 사는 길이 있고 잘 사는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제일 먼저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악과나무 아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통하여 아담과 하와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네 삶의 하나님과 주인을 인정하고 네 마음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대로 순종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그리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잘 사는 식과 길과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죽고 망하는 식과 법을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네 자신이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네 스스로 네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그럴듯하고 좋아 보이지만 그게 죽고 망하는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주인이 되면 죽고 실패하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전지전능한 존재라면 우리가 하나님이 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어 우리 마음대로 살아도 잘 살 수 있겠지만 우리는 무지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 자신의 하나님과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비행기를 비교적 많이 그리고 자주 타는 편입니다. 저는 비행기를 많이 탔지만 아직 한번도 조정실 문을 두드리면 조정사에게 ‘내가 자동차 운전을 20년 좀 넘게 했는데 자동차나 비행기나 비슷할터이니 내가 한번 조정해 보자’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만일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다면 저는 미친 사람입니다.

만일 그럴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만 조정사가 같이 잘못되어 그 말을 듣고 네게 조정간을 맡겼다면 비행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틀림없이 추락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압니다. 때문에 절대로 비행기를 내가 조정 해 보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저는 비행기는 조정사가 조정해야만 안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그와 같은 사실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세상은 하나님이 조정하셔야만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조정사가 조정하는 비행기는 어쩌다가라도 떨어지는 것 보았지만 하나님이 조정하시는 세상과 사람은 추락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고 믿음입니다.

미숙한 어린이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아톰’ ‘마징거 제트’ ‘슈퍼 맨’과 같은 만화 영화가 나오면 그 다음날부터 골목에 모가지에 보자기를 묶고 날라 다니는 놈들이 많아집니다. 두 팔을 벌리고 ‘나는 아톰이다’ ‘나는 슈퍼 맨이다’를 웨치며 날아다니는 놈들이 생깁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이 그런 행동을 하건든 얼른 높은 아파트 배란다 문을 잠가야만 합니다. 뛰어 내릴 가
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네 살 쯤 된 아이 하나가 정말 목에 보자기를 묶고 3층 아파트 배란다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다행히 밑에 나무에 걸려 크게 다치지 않고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 아이가 기절했다가 깨어나면서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어~ 왜 난 안 날지?....>

나폴레옹이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다> 저는 그 말을 <나는 아톰이다>라는 말로 해석합니다. <나는 아톰이다>라는 아이나 <내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다>는 나폴레옹이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살던 궁전을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방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가 걸려있었습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 그 양반(?) 목에 보자기를 묶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당신이 그래서 망했구나....!!!!>

욥기에 보면 38장부터 욥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질문들을 하나님은 욥에게 쏟아 부으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 있었느냐? 그 주초를 어디에 놓았는지 너는 아느냐?’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이 없고 오락가락 할 때 까마귀에게 먹을 것이 준 것이 누구냐?’

수도 없는 많은 질문을 종합해 보면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것은 ‘너 아느냐?’는 질문의 유형과 ‘너 할 수 있느냐?’는 유형의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욥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우리의 무지함과 무능함입니다. 하나님은 그 질문 중에 이렇게 욥기 40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다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성경에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 중에 하나는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하나님이 자신과 세상과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자신의 하나님과 주인이심을 매사에 인정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살면 구원 얻습니다. 성공합니다. 승리합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모이면 좋은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신앙고백은 한 마디로 말씀드려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들으시고 그 믿음의 반석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면 그 교회는 반석 위에 세운 좋은 교회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는 길과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인들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신과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써 우리가 섬기는 높은 뜻 숭의교회에 사람이 주인이 되지 않고 언제나, 예수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하나님이 친히 조정하실 수 있도록 늘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리를 우리가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주인이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주인이 되셔야함을 인정하십니까?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욕심을 버리고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겨야 함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주인이 언제나 하나님이셔야 함을 믿으십니까?

그것은 말처럼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섬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리만큼 힘들고 어려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려는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이 싸움이 가장 힘들고 어렵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기도하면서 이 싸움을 구체적으로 싸워 나가겠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면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반석위에 세워집니다. 욕심에 눈 어두워 스스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면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모래위에 세워집니다. 그냥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는 별 큰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적당히 교회봉사를 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자신과 세상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철저히 자기를 부인할 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바르고 분명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교회와 자신의 삶을 반석위에 세우는 지혜로운 건축자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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