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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의 기적 / 요 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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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겸손의 기적 
본문 : 요한복음 12:12~16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나귀를 타고서 입성하시는데 수 많은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호산나 호산나 외친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외친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주님을 맞이하던 그 때를 다시 기억하는 주일이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고 호산나 호산나 외쳤을 때에 엄청난 힘을 지닌 자가 와서 자기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외침이었을 것이다. 위력있는 무기를 사용하고 엄청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강력한 요청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강력한 모습으로 입성하지 않고 힘없는 나귀를 타고서 들어오신다. 말은 전쟁과 왕을 상징하지만 나귀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말을 타고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해방시켜줄 사람을 기다렸는데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서 입성하셨다.

나귀를 타고서 입성하신 것은 이미 구약성경 스가랴에 예언된 말씀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일을 우리에게 겸손의 기적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은 자기 자랑을 해야 쓰임받는 시대인 것처럼 보이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전교 어린이 회장을 뽑는데 내가 회장이 되면 최선을 다해서 일하겠다고 강조하면서 학생들 보는 앞에서 가위로 자기의 머리 카락을 자르더라고 한다. 그것도 여자 어린이가 그렇게 자신을 나타내 보인다.

소위 말해서 자기 PR 시대이다. 자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기 자랑이 지나치면 이것은 교만이 된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시는 죄이다.

기드온 시대의 일이다. 미디안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군인을 모집했는데 삼만 삼천명이나 모였다. 충분한 인원이다. 막강한 전력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돌려보내시고 그 중에 삼백명을 추려내었다. 삼만 삼천명이 모두 나가면 스스로 교만해 질까봐서 하나님은 삼백명으로 줄이셨다.

미국 남북전쟁때의 일이다. 처음으로 방탄옷이 발명되어 사용하였다. 미시시피 전투 때 알라바마 21연대에 속한 난 남군 병사가 방탄옷을 입고 자랑스럽게 까불며 언덕에 올라갔다. 그러나 총알이 날아와 이 어리석은 병사를 쓰러뜨렸다. 총알이 방탄된 가슴에 맞지 않고 얼굴에 맞았기 때문에 총상을 당한 것이다.

자신의 방탄복을 뽐내고 자랑한다. 지나친 자랑으로 교만해 진다. 그런데 얼굴에 총을 맞았다. 교만은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
잠언의 말씀을 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한 자는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다. 반드시 쓰러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지으시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뱀이 유혹한다.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서 하나님과 같아진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는 교만한 생각 때문에 결국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을 쌓는 사건이 나온다. 그들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바벨탑을 열심히 쌓는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흩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혼란스러운 일만 생겼다.

교만한 자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 교만한 자는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다. 왜냐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만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예배당을 지어 놓았다. 그곳에 들어가는 문은 아주 작다. 서서 들어갈 수 없다. 작은 어린이나 걸어서 들어갈까 어른들은 반드시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다. 이 문을 겸손의 문이라고 부른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데 어떻게 일어서서 교만하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반드시 겸손하게 머리를 숙인자 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겸손한 자 만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제주도에 가면 분재만을 갖고서 아름 다운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작은 나무들인 분재를 보는 요령을 가르쳐 준다. 분재를 잘 보려면 허리를 숙이고 보십시오. 위에서 보지 말고 밑에서 허리를 숙이고 낮은 자세에서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 더욱 아름 다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작은 나무도 그렇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아름 다운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러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 아름 다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어느 날 랍비가 말하기를, “진리는 길에 널려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이다” 라고 말을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 그렇게 흔한 것인데 왜 사람들은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 랍비는 다시 대답했다. “그거야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에 돌을 주울 수가 없단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이같이 겸손할 때에 주님과 만날 수 있다. 겸손할 때에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신을 나타내고, 톡톡 튀게 자신을 자랑해야 쓰임받는데, 하나님의 그렇지 않으신다. 겸손한 자를 들어서 사용하신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기적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신다. 나귀가 왜 쓰임받는 축복을 받았는가? 겸손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다. 모세는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자신의 겸손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아론을 통해서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모세의 겸손함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다.

예레미야를 보라. 내가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의 대답이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얼마나 자신의 겸손한 표현인가?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다윗을 보라.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온다. 너무 좋아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춘다. 왕이 어린 아이처럼 춤을 추다가 그만 바지가 내려가고 말았다. 이 모습을 보았던 사울의 딸 미갈이 업신여긴다. 왕의 체면이 있지 왜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고 있는가? 미갈이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했느냐고 다윗 왕에게 나무란다. 다윗이 미갈에게 말하기를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 놀리라.” 다음 구절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내가 이 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을 받으리라 한지라.”

모세, 예레미야, 다윗과 같은 사람을 보라. 겸손한 자를 들어 쓰셨다. 바울을 보라. 그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다메섹 체험을 하게 하신다. 앞을 볼 수 없는 체험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바울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되는가? 사울은 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변화된 바울은 작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아진 바울을 하나님은 사용하셨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기적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에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보다는 나는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 중요하다.

어느 군부대에 젊은 군목 목사님 한 분이 부임하셨다. 헌신적으로 열심히 교회 일을 하였는데 그 군부대의 장군님이 교회에 출석을 하셨다. 그 젊은 목사님께서 헌신적으로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서 마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목사님과 면담후 (주보)를 나눠 주시고 30분 전에 오셔서 정복을 입고 안내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별을 단 장군이 젊은 소위 군목에게 이런 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열을 받았겠는가? 그러나 그 분은 인품이 훌륭한 분이었고 신앙심이 돈독한 분이었다. 그 다음 주일부터 30분 일찍 나왔고 정복차림에 별을 달고, 훈장을 달고, 교회 입구에 서서 주보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장교가 들어오든지, 하사관이 들어오든지, 일등병이 들어오든지 먼저 웃음 띤 얼굴로 인사하면서 주보를 나누어 주었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다음 주부터는 교회가 미어지기 시작했다. “야! 별 단 장군이 거수 경례하면서 주보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한 번 가서 쳐다보자.” 그러면서 사람이 막 모여들기 시작했다. 졸병이 장군에게 인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는 역사가 바뀌질 않는다. 그러나 장군이 자기의 수하에 있는 장병들에게 먼저 인사하면서 겸손히 섬길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장군은 더 큰 인물로 인정받았다. 겸손한 자에게는 능력의 주머니가 채워지며 겸손은 더 큰 역사를 이루게 하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자신을 톡톡 튀게 자랑해야 쓰임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다르다. 자신을 낮추어서 겸손한 자를 들어서 쓰신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기적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겸손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겸손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가? 곧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 그런데 겸손한 사람은 이야기 하는 사람의 생각 속에도 얼마든지 좋은 생각이 담겨져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이렇게 남을 나보다 더욱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한다.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알기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준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는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짐을 실어 주기를 기다린다. 내가 바로 낙타요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신다. 이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인가? 낙타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등에 하나님의 일을 맡기신다.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 앞에서 겸손하자. 그리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자. 이러한 겸손을 통하여 하나님께 쓰임받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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