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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찔리시고 상하셨는가? / 사 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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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3:4-9
왜 찔리시고 상하셨는가?


오늘부터 한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은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한주간동안 고난받으심과 죽으심을 기억하여 교회가 함께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 생활을 한 것이 어느덧 25년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전도를 받아서 교회 생활을 시작하엿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17년전입니다. 대학교 2학년를 갖다와서 복학을 앞두었을때에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생활을 시작하고 약 8년이란 시간 뒤에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걸렸던 것입니다. 주님믿지 않았어도 예배드렸고 기도하였고 봉사하였습니다. 찬양대도 했고 교사도 했습니다. 그가운데 제가 가졌던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였습니다. 어떻게 2000년전에 돌아가신 주님이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믿는 것같았고 순종하는 척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내 안에서는 커다란 나의 생각과 고집이 철저하게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이유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였지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해놓으신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열심히 해놓으신 것을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열심을 갖고 해놓으신 사랑의 가장 완벽한 일이 바로 십자가사건입니다.

제가 오랜시간후에 그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이 바로 나를 위한 일임을 믿게 되었을때 나의 삶에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을 주신 것을 알고 또 나에게 엄청난 계획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습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나의 마음과 삶에 영접하셨습니까? 우리 모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내 중심에 영접하심으로 만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먼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제자들은 우리 주님을 알때까지도 여전히 복음서에 보면 부인하고 도망가는 등 연약한 모습이었습니다.그러나 오순절에 성령님을 통하여 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삶 속에 폭발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서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리워지는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언의 말씀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이사야 53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년전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땅에 예수님이 오시기전 오래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고난받으시고 죽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1. 예수님은 나의 질고와 슬픔을 담당하셧습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질고는 육체적인 질병을 의미합니다.슬픔은 정신적인 질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과 슬픔의 고난을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병은 우리에게 질고와 슬픔을 가져옵니다.육체적인 질병 깊은 곳에는 죄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질병의 배후에도 죄문제가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파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모든 질병과 슬픔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질병과 슬픔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삶에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사역하실 때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의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많은 치유의 사역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치유의 사역이 우연히 일어나는 능력이 아니라 바로 에수님이 구약에서 약속한 예언을 성취하는 일임을 말씀합니다. 마태복음8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과 귀신들린 자들의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치유의 사역을 행하십니다.이렇게 예수님께서 치유의 사역을 행하신 것은 마8: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이미 이 목적을 분명히 이해하시고 사역하셨습니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질병에 포로되어 눌려사는 사람들에게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역 속에서 이런 말씀을 통하여 능력을 통하여 많은 자들에게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질병의 댓가인 죽음의 값을 지불하심으로 모든 이들에게 이런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게 하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아 영원무궁토록 예수님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믿을때 예수이름으로 정신병과 육체의 질병이 고침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믿음으로 질병이 고침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가 이전에 교회에서 경험한 일입니다.오랜기간 경찰서에서 형사로 근무를 하신 성도님이 한분계셨습니다. 이미 저는 고향교회이기 때문에 이분의 소식을 어느정도 알 고 있었습니다. 아무 똑똑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항상 보면 하나님 말씀보다는 자기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을 해도 늘 감시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항상 지병이 있었습니다. 심한 두통 때문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너무 아플때에는 눈알이 빠져나올정도로 아팠습니다. 그래서 병원에도 이곳 저곳 다녔지만 낫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충 약을 먹고 진정시키곤 했습니다. 하루는 주일 낮에 예배를 드리는데 누군가 머리를 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뒤에서 누가 장난을 치는가 하고 뒤를 돌아다 보았는데 아무도 장난을 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시 예배를 드리는데 이번에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머리에 와서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손을 들어 머리를 만져보앗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언가 머리에 와서 만지고 뜨거운 것을 경험한 후에 마음이 시원하고 평안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후로 그 분이 신앙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특별하게 역사를 통하여 치유하시는 경우도 있고 또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고 믿음을 통하여 치유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예수님믿으면 모든 질병이 깨끗하게 치유받고 예수님믿으면 질병에 걸리지 않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낳을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치료받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때문입니까? 자기때문입니까? 그 부모때문입니까?”그러자 주님이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낳게 하여 주십니다. 이미 낳을때부터 소경된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위한 뜻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님믿는다고 모두가 질병에 걸리지 않고 모두가 낳음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믿는 사람이 질병에 걸리는 이유가 단지 죄 때문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부주의하여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매일 담배피우는 사람은 결국 간암에 걸릴 수 있고 매일 짜증부리면서 스트레스받으면서 사는 사람은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질병은 하나님의 자연 은총 범위 안에서 고쳐질 수도 있고 안고쳐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조차도 몸에 안고 있는 가시인 질병을 고침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이 고침받고 새생명얻은 주의 백성들은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래서 새생명얻고 용서받은 주의 백성들은 살아도 감사 죽어도 감사입니다. 병이 들어도 감사 병이 낳아도 감사입니다.중요한 것은 이미 내가 새생명얻은 자 영생의 삶을 살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의 것이므로 모든 삶에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시고 하나님을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나의 죄악과 허물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해 고난받으셧습니다. 여기 허물은 무엇입니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사람들의 범죄입니다..죄악이란 당연히 해야 할 것은 하지 않는 죄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말씀을 어긴 불순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죄인에게는 죄의 값을 적용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죄를 지었음으로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죄의 값인 사망을 치루기 위해서 모두가 멸망받아 지옥에 가야 되었습니다. 미련하게 우리 사람들은 허물과 죄악의 방향으로 자꾸만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합니다.
6절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짐승 중에서 양에다 비유를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잘났고 똑똑하다고 높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피조물이 바로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양에다 비유를 합니까? 특별히 양이란 짐승은 방향감각이 아주 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있어야만 제집을 찾아오는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나 고양이들은 스스로 자기 집을 얼마나 잘 찾아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양은 매일 갔던 길도 못찾고 헤맨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헤매면서 온전한 방향감각없이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바로 허물과 죄악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허물과 죄가 가득차 있는 사람은 인생의 방향을 온전히 찾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없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보십시오. 우리 믿음의 사람들과는 완전히 180도 반대방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방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방향입니다. 우리는 천국방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옥방향입니다. 우리는 생명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망길입니다. 죄와 허물은 인생을 미련하게 어리석게 하여 파멸로 인도하는것입니다.

물론 세상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이런 저런 가르침 교육 도덕 철학들이 있습니다.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저희가 둘다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라고 합니다. 이세상의 많은 종교와 좋은 가르침과 고상한 이론들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십자가 속에는 바로 죄문제를 해결한 기쁨의 소식이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죄악과 허물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인간들의 허물과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여기 “담당”이란 말은 “대신 짐을 지다”라는 것입니다.이것은 마치 죄를 범한 사람처럼 되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모든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래서 허물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기 위해서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바로 나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기 그분이 그렇게 담당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합니다. 여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허물과 죄값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평화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불안하여 합니까? 왜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음식먹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보십시오. 그것이 우리 삶를 평안하게 하여주지 못합니다. 제가목장교회에 갔더니 어떤 성도님들이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과거에 좋은 집에서 예수없이 부자로 살때에는 오히려 더 피곤하고 싸우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지금 가난한지만 예수믿고 사니까 삶은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평화는 어디서옵니까? 평화는 바로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하나님이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형상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왜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 닮게 만들엇습니까? 인간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평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화목의 예수님이 죄값을 담당하심으로 다시 하나님과 평화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제가 가끔 초신자들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예수님믿고 가장 찾아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마음이 평안합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찾아오면 그 순간 하늘의 평안이 찾아오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얻은 평안이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얻은 이 평화는 바로 예수님의 피값을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정말 주의하고 조심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의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그것은 바로 개가 토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다시 죄악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의 모습처럼 다시 구원받고도 그렇게 마음으로 몸으로 육신의 죄악된 삶을 살아간다면 십자가의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더 이상 세상의 자랑과 세상의 명예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나를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를 자랑하시고 우리 주님을 소망하시고 우리 주님을 사랑하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애굽을 떠나 광야로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보았고 체험했습니다. 전투에서 이기기도 하였고 날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였지요.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했습니까? 그들은 애굽에 돌아가서 고깃국먹고 사는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망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명심할 것은 우리가 자꾸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바꾸 우리가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세상을 본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나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가운데서 구원하셨습니까?
흔히들 사람들은 왜 사십니까? 하고 물으면 보통 2가지 말을 합니다.
부모들은 ‘자식새끼들 때문에 살지요“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를 위해 살지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허물과 죄를 용서받은 바울은 고백합니다.

갈2:20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서 사는 것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 속에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고 우리에게 잃어버린 삶의 의미와 목적을 회복합니다. 우리가 이리저리 방황하던 살의방향을 회복시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본래 주었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물과 죄로부터 용서받은 주의 백성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땅에서 우리 주님이 살았던 것처럼 살고자 합니다. 이땅에서 주님이 관심가졌던 것을 향해 가고자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 주님이 추구했던 비젼을 갖고자 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시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너무 현실이라는 세상에 타협합니다. 그것을 붙들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속에 이 아름다운 삶의 고백과 결단들이 다시한번 회복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잠잠한 어린양같이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여기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다고 합니다.복음서에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웁니다. 그리고 갈대를 오른 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합니다.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칩니다. 그 희롱을 다한 후에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시고 끌고갑니다. 그때 우리주님은 잠잠하셧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셨을때에도 사람들이 희롱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 주님은 잠잠하셨습니다. 모진 고문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침묵하셨습니까?
우리주님의 침묵은 바로 우리를 위한 침묵이었습니다. 이미 주님은 고난받으실 것과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몸으로 친히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희생하라 말씀하시는데서 그치지않고 스스로 희생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죽으라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죽음으로 복종하셨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실천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땅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연약한 몸을 입으시고 고난 앞에 순종하실때의 핵심 정신이 무엇입니까? 정말 주님도 고난과 죽음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기도에서는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라면 고난이 있어도 순종해야 합니다. 희생이 있어도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댓가도 지불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의 삶에서 주님의 심정을 갖고 기도하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새벽에 기도축제를 통하여 주님의 고난을 마음에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주님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는 고난도 경험하여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금주 한주간은 특별히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기도하심으로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우리가 순종해야 할일이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일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주님처럼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는 고난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권리 자기의 평안 자기의 모든 것을 쳐서 복종하였습니다.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통하여 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어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손해가 있어도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저는 매주일 목요일마다 짧은 시간에 복음을 증거하러 가가호호 전도지를 돌릴때마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안따깝습니다. 그 많은 아파트 호수에 비해서 사람들의 수에 비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안따깝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을 사람이 많으니 할 일 많아서 기쁘다는 마음도 들어갑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때 사람들은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미련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면서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미련한 십자가의 복음을 갖고 주님 가신 길을 순종으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전도가 미련하게 보이고 복음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복음을 위한 고난의 자리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왜 주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습니까?
바로 나의 허물과 죄때문이었고 나의 질고와 슬픔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이루셨습니다.
오늘 받아야 할 모든 형벌과 고통을 대신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구원받은 감사와 기쁨을 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귀한 뜻을 위해 복음을 위해 고난받으시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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