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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려가면서도 읽게 하라 (합 2:2-4; 눅 23: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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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달려가면서도 읽게 하라 (합 2:2-4; 눅 23:13-25)


오늘 봉독한 하박국 말씀은 남국 유대의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이 가물거리는 위기의 순간에 하박국 선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했다. 문자 그대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이다.

어떤 점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이다. 달려가면서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달려가면서까지 읽어야 할 필요성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의아심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과 진의를 파악할 때 이 말씀처럼 하박국 시대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없었다.

이 하박국 시대는 북쪽 앗수르 대제국이 신흥제국 바벨론에게 주전 612년 멸망을 당하고 새로운 정치적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이 호시탐탐 유대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는 때였다.

"달려가면서도 읽게 하라." 우리는 이 명령 가운데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없고 달려가면서 읽어야 할 절박한 현실의 위기와 극한 상태를 암시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적군의 침입으로 일어나고야 말 피난민의 도망치는 비극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절박한 위기와 참상은 곧 저들에게 일어나고야 말았다.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23장 13-25절에 나타난 본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바로 우리의 시대와 우리사회에 있어서 달려가면서도 읽고 묵상하며,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된다.


1. 군중의 어리석은 선택이다.

삶은 선택이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선택을 잘 하면 행복하고 성공하며 복을 받는다. 그러나 잘못 선택을 하면 자기 한 사람뿐 아니라 자기 가족 아니 후손과 공동체 전체가 고난을 당하고 불행해지며 비극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악을 선택함으로 자신들뿐 아니라 후손들까지도 불행해지고 큰 비극을 경험하는 비극의 씨를 뿌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중대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될 때 또는 개인적으로 중대한 선택과 결단을 내리게 될 때 선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깨닫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2. 그럼 왜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가?

인간은 죄로 타락해서 100% 완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지만 하나님이 주신 양심과 이성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어느 정도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실 처음부터 이스라엘 군중들이 이성을 잃고 올바른 판단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한 때는 그리스도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특히 예루살렘 입성 때는 저들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고 호산나 만세를 부르며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옛날 다윗의 환영이나 솔로몬의 영화가 무색할 정도로 그 환영이 절정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저들이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예수를 석방하랴, 바라바를 석방하랴?" 하는 빌라도의 물음에 살인자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소리쳤다.
본문 23절에 보면 "저희 소리가 이긴지라" 했다. 그럼 무엇이 이렇게 저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았는가? 무엇이 저들을 우매한 이성을 상실한 대중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마태복음 27장 20절에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막 15:11절에는 무리를 충동했다고 기록했다.

권한다(epeisan)는 대중 앞에서 선동하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꾀이고 타이르는 계획적 선동을 의미한다. 이 몇몇 지도자들의 epeisan(선동) 때문에 결국 민중은 이용당한 것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서 악을 조성하는 유대 지도자들, 불의에 이용당하는 어리석은 군중들,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에 공의의 판정을 내리지 못하는 빌라도의 고민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민중을 위해 오시어 민중을 위해 살다가 민중에 의해 희생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3. 민중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시다가 희생된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생의 자세와 나아갈 방향을 제시받게 된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했다. 최근에 A Higher Standard Leadership(섬김과 나눔의 경영자 간디)라는 책을 읽으면서 간디는 교회는 안 다녔지만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섬김과 나눔의 삶을 열심히 실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교회에 수십 년간 다니고 열심히 섬기노라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섬김과 나눔의 삶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며 위선적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오늘의 사회는 개인의 선한 생활이나 윤리, 도덕, 종교생활이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사회는 극도로 제도화되고 조직화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선이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현대선교는 개인의 구원 이상으로 사회 구조악을 깨고 사회 전체까지 구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는 모든 것을 이웃과 사회에 주어야 한다. 마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주신 것처럼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주어야 한다. 교회는 너무나 긴 세월 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나만이 깨끗하고 거룩한 체 살아오며, 교회 자체만을 살찌우며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아가서 사회 속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종의 모습을 찾아 그와 함께 세상을 섬기고 구원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이 때 오히려 교회는 잃어버린 권위와 능력과 생명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에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거룩한 변화산상으로 오르는 말씀과 기도와 경건한 삶을 힘쓰는 신령한 길이며, 다른 하나는 변화산에서 체험한 은혜를 가지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와 병든 자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섬기고 치유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섬김의 길이다. 이 두 가지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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