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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름이 주는 감동/ 골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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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주는 감동/ 골로새서 3:1-11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미국에는 교회가 한 30~40만개가 될 정도로 많습니다. 알다시피 그 나라는 기독교를 믿는 나라이고, 기독교 사상이 뿌리가 되어서 발전한 국가입니다. 헌법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가치관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미국 기독교 중 대형 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감리교, 장로교, 회중교회 등과 같은 교단들이 6, 70년대부터 계속 쇠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놓고 로버트 핑크라는 학자는 왜 큰 교단들에서 계속 성도들이 빠져나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지 연구하여 책을 발간했습니다. 그 책을 읽다 보면 대답이 아주 간단합니다. 교인들에게 너무 적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큰 교단들이 쇠퇴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 말입니다. 교회들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려 애를 썼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적게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많이 요구하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신자가 될 수 있는데, 적게 요구하므로 세상 사람과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교회 나름대로는, 그런 식으로 신사적인 이미지를 심으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매력을 느낀 나머지 교회를 찾아 나올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적게 요구해서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컬러가 비슷해지자, 성도들이 먼저 교회를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대해서 매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회중교회의 경우 1987년 한 해동안 170만 명이 그 교단에서 빠져 나가버렸습나다. 물론 지금도 계속 감소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반면에 90년대에 들어와 미국에서 아주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교회 500여 개를 조사한 결과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강하게 요구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서 컬라를 분명히 하며 살도록 교회가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거부반응을 일으킬지 모르지만, 성도답게 살도록 성도들을 바로 세우는데 온 교회가 힘을 집중했더니 교회가 강해진 것입니다. 달라진 성도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히 교회가 부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우 귀담아 들어야 될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고향에서 불러냈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 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흐르는 모든 사상의 주제를 보면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라'는 말을 바꾸면 '다른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빛과 어두움이 다르듯, 소금과 썩은 고기가 다르듯,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거나 세상과 같으면 그날로부터 교회는 죽음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성도의 삶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잘 간직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왜 세상 사람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는지 4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때 '아, 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분명 세상 사람이 아니야. 나는 달라.' 하는 의식이 항상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이 생각을 통제하고, 말을 지배하고, 행동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4가지를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로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4가지를 한 가지씩 검토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에는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을 보면 이것을 좀 더 보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을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역하던 우리의 옛 사람도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었다는 말의 의미는 끝이 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죽으면 끝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라도 죽으면 끝입니다. 처음에는 시체를 끌어안고 몸부림을 치며 울지만, 며칠 지나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던 아기라도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 시간 예배 드리는 성도들 가운데서 아직도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그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주님의 십자가를 보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주님과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던 내 자신과 함께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정과 육체의 욕심으로 살던 내 옛 자아, 옛 사람은 완전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그 자아가 살아서 내 안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 사는 것이 얼마나 다릅니까? 세상 사람들은 죄를 짓는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은 옛사람이 살아있습니다. 그들은 옛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옛사람으로 숨쉬고 있습니다. 옛사람으로 한 생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과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우리가 이런 것을 행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좋아하던 내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 장사를 지낸 지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면서 한 때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던 그 순간, 나의 모든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다 처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생활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과 다른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1

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가 부활하실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던 내 자신이 새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어 내가 살아났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주님의 새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생명을 소유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다음에 부활하겠지만, 우리의 영혼은 이미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런 모습이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릅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주신 새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born again'(다시 태어나다)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우리와 같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에게 천사가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를 안 믿는 남편과 사는 부인이 있다면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남편이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면 너무나 다른 사람과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어떤 부인은 3일, 1주일 동안 금식하면서 남편이 교회에 나올 때까지 사생결단을 하고 투쟁하기도 합니다. 결국 나중에는 그 남편이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예수님의 새 생명을 간직하고 사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으니 옛날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을 가지고 다시 사는 우리들은 10절에 있는 말씀처럼 벌써 지향하는 목표가 다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어 이제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닮아 계속 주님처럼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경에서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해간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겉 사람은 후패하여 젊었을 때의 아름다웠던 얼굴이 변해가긴 하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계속 변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어떻게 세상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절) 이 구절은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이란 우주적인 권세를 가진 상징적인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다음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전능자, 만 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는 권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님은 그 우편에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는 그 시간에 우리도 함께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에베소서 2장 6절에 나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자, 살아서 부활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때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앉히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고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하늘에 앉아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제 머리 속에 떠오른 표현인데 참 멋진 말입니다. '하늘에 앉아서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얼마나 멋있는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가 예수 믿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고 말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국적이 바뀐 것도 아니고 피부색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못난 얼굴이 잘 생겨졌다거나 못 살던 사람이 잘 살게 된 일도 없습니다. 믿기 전의 모습이나 믿은 후의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진짜 생명이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 지금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약간만 보여질 뿐입니다. 띠라서 세상 사람이 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감추어진 생명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번 예수님을 그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사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오실 때 평범한 남자의 모습으로 오셨고, 가난한 사람들이 걸치는 외투를 걸친 채 평범하게 사셨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다니시고,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들으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한낱 나사렛에서 온 청년쯤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진짜 모습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영광스러운 모습인데, 세상에 살 동안은 그 모습이 감추어져 있어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다면 나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을 가지고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내 초라한 신분을 가지고 탄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내 모습이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존재지만, 세상에서는 평범한 시민으로 보입니다. 사실은 하나님나라의 부요를 다 소유한 자이지만, 세상에서는 가난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세상에서는 병도 들고 남보다 먼저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보이는 그런 모습들은 우리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짜 아름다운 생명의 모습을 따로 비밀리에 갖고 있는 우리가 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하고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땅에서 보이는 게 전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얼굴도 예쁘게 해보려고 갖은 수를 다 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모아서 남에게 으스대면서 살고 싶은 것이 전부입니다. 남을 짓밟고서라도 내가 성공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사람들에게 더 인정 받고 싶은 것이 전부입니다. 거기에 생명을 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과 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같고자 몸부림을 쳐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진리를 얼마만큼 가슴 깊이 간직하고 그것이 생각을 좌우하게 만드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넷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4절) 이처럼 지금은 감추어져 있는 영광스러운 모습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고 스스로 놀랄 날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까무러칠 날이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의 진짜 모습이 나타날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서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며 살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육체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밀감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광 중에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환희를 맛보며 살 것입니다. 불확실성의 안개는 걷힐 것입니다. 의심과 어두움의 시간은 끝이 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믿음도 소용이 없습니다. 일부러 믿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보고 듣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전부이자 마지막으로 생각하여 여기에 마음을 다 쏟는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생명과 영광이 나타날 그날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와는 도저히 같을 수가 없습니다. 미래가 없는 존재와 미래를 안고 있는 존재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사람과 다를 수 밖에 없는 4가지 근거를 생각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현재에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감춰진 채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미래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온 세상 앞에 우리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나타날 그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죽고 살고, 현재에 주님의 생명 안에 감추어져 있고,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우리들! 이렇게 세상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 모든 것을 평가하는 가치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다른 가치관을 일컬어 본문에서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1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2절) 그래서 항상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는, 곧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언제든지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고 예수님을 먼저 사모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치관입니다.

땅의 것과 하늘의 것 중 어떤 것이 좋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하늘의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하늘에 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중 어떤 것이 더 귀합니까? 당연히 영원한 것이 귀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자연히 영원한 것에 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달리 영원한 것, 하나님의 나라의 것, 미래에 관한 것,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땅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므로 자연히 마음이 위엣 것을 향하고 영원한 것에 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의 것을 볼 때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위엣 것, 하나님나라에 관한 것, 영원한 것을 배경으로 하여 땅의 것을 본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돈을 보는 눈이 같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명예를 보는 눈이 같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세상의 고난과 슬픔을 보는 눈이 같을 수가 있습니까? 절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과 땅에 두고 사는 사람의 차이를 아십니까? 마음을 영원에 두고 사는 사람과 육신에 두고 사는 사람의 차이를 아십니까?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사람과 자기에게 두고 사는 사람의 차이를 압니까? 마음을 영원한 곳에 두고 사는 사람과 일시적인 것에 두고 사는 사람과의 차이를 아십니까? 그 차이를 알아야 됩니다.

C.S. 루이스가 귀중한 말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치관이 있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는 것은 영원히 무용지물이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건지 모릅니다. 제 나이 정도 되면 젊다는 것이 매력입니다. 젊은 사람을 쳐다보면 어떤 때는 샘이 날 정도로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 젊음이 영원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은 마음이 하늘에, 영원한 것에 가 있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는 것은 다 무용지물입니다. 우리가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데 특별히 자연풍경을 찍길 좋아합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제 찍을 만한 데가 없습니다. 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햇살입니다. 햇살이 오는 각도를 살피고 구름이 끼인 날씨 속에서도 햇살을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햇살에 따라 앞에 보이는 피사체가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꽃 모양도 틀리고, 색깔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은 항상 햇살을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을 보고 평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생각이 위에 가 있기 때문에 위에 있는 것, 영원한 것을 놓고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나라를 모르는 사람들, 영원한 것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보는 것을 우리가 똑같이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16세기에 설교자이자 순교자였던 존 브래드포드라는 훌륭한 분이 계십니다. 다음은 그 분이 하신 웅변적인 이야기입니다. "내 영혼아 일어나 고개를 들라. 하늘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날아 올라라. 여기는 수고와 시련과 슬픔과 재앙과 불행과 죄의 문제와 두려움과 모든 기만과 파괴적 허영 밖에 없는 곳이니, 이 초라한 곳을 더 이상 네 거처로 삼지 마라. 네 모든 사랑을 저 위 아름다운 곳으로 보내라. 거기는 네 구주께서 사시며 다스리는 곳이다. 보고에 기쁨이 쌓여 있는 곳이다. 그분의 공로가 네 공로가 되고, 그분의 온전함이 네 온전함이 되고, 그분의 죽음이 네 영생이 되고, 그분의 부활이 네 구원이 되는 곳이다." 정말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감동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 가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만큼 세상 사람과 다른 가에서 기독교의 감동이 나옵니다. 우리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때 세상이 반응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감동을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느끼면 그들과 접촉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비슷해져야 합니까? 그것은 마귀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비슷해지거나 같아지면 기독교는 망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문을 닫습니다. 크리스천의 생명은 죽어버립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감추어 있고, 예수와 함께 나타날 사람이라면 달라야 합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보는 눈이 달라야 됩니다. 명예를 보는 눈이 달라야 됩니다.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보는 눈이 달라야 됩니다.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을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모든 세상의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당하는 실패를 보는 눈도 달라야 합니다. 고통을 보는 눈도 달라야 됩니다. 모든 것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감동을 느낍니다. 만일 우리와 접촉하면서도 그들 자신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벌써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동이 없는 곳에 어떤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다르구나. 정말 무언가 다르네.'라고 느낄 때에는 이미 마음속에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름이 있을 때 감동이 생기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21세기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듣기만 하는 복음으로는 전도가 안 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귀로 듣기를 원합니다. 마음으로 느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는 기독교, 성도, 교회를 원합니다.

수년 전 한국의 대학생 천 여명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자동차, 텔레비전, 컴퓨터일 것이라는 우리의 예측을 뛰어 넘어 정작 그들의 대답은 엉뚱했습니다. "나는 감동을 받고 싶다." 이것은은 지난 대선에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에게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분에게서 감동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코드는 하나, 곧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입으로는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 배만 위하는 일반 정치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출세하기 위해 여기저기 줄 서기 바쁜 정치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거를 앞두고 제가 우리 집 아이들과 입씨름을 할 때도 계속 나오는 이야기는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르다는 것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치선거에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1981년도 부림 사건이 터졌을 때, 노무현 씨는 "내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바 있습니다. 온 몸에 시퍼런 멍 자국이 남아 있고, 변호사인 자기조차도 믿지 못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이 느꼈다고 합니다. 그 후 '바르게 살아야겠다. 비겁하게 살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고는 그 즐기던 요트 타기 생활도 청산해버리고, 돈 잘 버는 조세 전문 변호사의 길도 접은 채 세상에서 억울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불이익과 고통을 당했지만 외길을 오랫동안 달려왔습니다. 이처럼 그가 다르게 사니까 젊은이들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등한히 여기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부터 감동만 받으면 이 세상은 마음의 문을 엽니다. 목사에게 감동을 받으면 이 세상에는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감동을 줄 수만 있으면 이 세상은 반응합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다른 데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감동을 못 받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서도 즐거움이나 행복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냥 억지로 교회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온 지성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없게 신앙생활을 하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한 마디 했습니다. 노원구에 어떤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를 한번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듣던 대로 그 교회는 상가에 자리잡은 70평 정도의 조그만 교회였습니다. 이미 10년 정도 되었는데, 그 담임 목사가 한두 명 앉혀놓고 시작한 교회가 이제는 천 여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그 정도 모이는 교회면 교회를 짓는다고 법석을 떨 텐데 그 교회는 교회를 짓는 데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실제로 가보니 교회 간판은 조그맣게 빌딩에 붙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고, 1층에 있는 감자탕 식당 간판이 워낙 커서 그 건물을 다 가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 교회는 감자탕교회다.'라는 소문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도 검소하여 자가용도 없이 교회 봉고를 타고 다닙니다. 그리고 날마다 전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뛰어다니는데, 먼저 목사가 모범을 보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따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매달 헌금이 들어오면 100만원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그 달 그 달 싹싹 쓸어서 다 써버리는 교회입니다. 그 담임 목사님을 저도 잘 압니다. 이미 우리 교회 세미나도 다녀가셨고, 제가 사랑하는 후배 목사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철학은 분명합니다. '건물을 남기는 목회를 나는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남기는 목회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교회를 찾아간 그 분의 누에 뭔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웬만한 교회 같으면 건물 짓는다고 법석을 떨고, 천 명이 넘는 교회가 되면 목사가 대접이나 칭찬 받기에 정신이 없고,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를 가지고 으스댈 텐데 이 교회는 도무지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 좀 뭐가 다르긴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교회 예배당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주일 마다 예배시간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도 흘리면서 자기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글로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 장, 두 장, 세 장...이렇게 써 내려 간 것이 쌓여 책 한 권 분량만큼 되었습니다. 그러자 출판하면 좋겠다 싶어 평소에 지면이 있는 유명한 출판사 사장을 만났습니다. 그 출판사는 기독교에 관한 책은 절대로 내지 않는 '김영사'라는 출판사입니다. 그 사장은 불교 신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 원고는 "교회 다니면서 감동을 받은 이야기이다.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을 받은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라고 말했더니, 선뜻 한번 책을 내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기독교 교회에 관한 내용이라고 덧붙였더니, "교회에서 나온 책이든, 절에서 나온 책이든 오늘날의 사람들은 감동을 원한다."며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면 상관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자탕교회 이야기'라는 제목을 책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25년이 넘어도 그런 책 하나 쓰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우리 교회는 감동을 덜 준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교회는 노원구에 가면 광염교회라고 있는데, 바로 그 교회 목사님이 조현삼 목사님입니다. 이처럼 교회마다 세상에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 감동을 주진 못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제 이 세상에 나가 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감동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감동을 받기를 원합니다. 감동하면 그들은 마음을 엽니다. 감동하면 그들은 반응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가를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감동만 할 수 있다면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달라야 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고 간직합시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얼마나 다릅니까? 이 다른 모습을 세상 사람 앞에 보여줌으로써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는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감동시킨다면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하루빨리 임할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처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답게 생각을 하늘에 두고 위엣 것을 찾으며 위엣 것을 생각하면서 살므로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고,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가정에서 감동을 주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이웃에게 감동을 주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사회에 감동을 던져주는 우리 모두가 되어 모든 불신자들이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축복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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