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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고난의 그 깊이 / 사 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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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그리스도의 고난의 그 깊이
본 문 이사야 53:1-7
설교자 박봉수 목사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함으로써 이라크 전쟁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기도대로 전쟁이 빨리 끝나가는 것은 참 다행스런 일입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건 명분이 재미있습니다.
이라크를 해방시키고, 테러를 차단하기 위해 세계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독재자로부터 이라크 국민들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테러 국가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해서 세계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 명분이 과연 정당하냐 그렇지 않으냐를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미국이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테러로부터 세계를 지키기 위해,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택한 방법을 말하고자 합니다. 지금 미국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전쟁 옹호론은 그 옛날 로마시대에 기원을 둡니다. 로마가 강력한 힘으로 전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힘으로 평화를 유지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팍스 로마나(Pax Romana)입니다. 지금 미국이 사용하고 있는 명분의 논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미국의 힘으로 세계 평화를 지켜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힘으로만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켜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전혀 다른 평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라고 했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우선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가 청산되고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기초로 사람들과의 평화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반복과 갈등과 전쟁을 극복하고 화목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님의 평화 즉 팍스 도미니카(Pax Dominica)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힘으로 지켜낸 평화가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 낸 평화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의 힘의 강요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힘에 철저하게 짓밟히셨고 유린 당하셨습니다. 그 힘의 폭력성과 악마성 앞에 온 몸으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결과 저 십자가 위에서 이 놀라운 평화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그 깊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인생의 고난과 차원이 다른 그 깊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종려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이 한 주간 주님의 고난의 참 뜻을 되새기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그 깊이를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의 그 깊이를 헤아려 보겠습니다.
자초한 고난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고난을 겪게 됩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에 누구나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게다가 살면서 인간관계 속에서 또는 어떤 목표를 추구해 가는 도중에 갖가지 갈등과 난관을 만나게 되어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뜻하지 않은 자연 재해나 사건 사고에 휘말려서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은 일종의 우리 인간의 숙명입니다.

성경은 이런 고난의 원인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되면서 인간의 삶 속에는 고난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마치 엄마 품을 떠난 아이의 삶 그 자체가 고난인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삶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래서 이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고난은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죄 때문에 생노병사의 숙명적인 고난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친히 지은 자범죄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의 악한 행동들, 이기적인 태도들, 욕망에 이끌려 사는 삶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이 만들어집니다. 그 뿐 아니라 내 죄가 아닌 우리 인류 모두의 죄의 연대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나 아닌 남의 죄의 결과로 내가 고난을 겪기도 하고, 환경파괴와 같은 우리 모두의 죄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고난은 이 땅에 넘쳐나는 우리 인간들이 지은 죄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우리가 당하는 이런 고난과는 전혀 다릅니다. 히 4:14을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시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신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로 인한 고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빌 2:6-8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분이 일부러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고난을 함께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전혀 우리의 죄와 상관이 없으신 분, 그래서 고난을 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자초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소방관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세 사람인가를 구출하고 안에 남아있는 어린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또 들어갔다가 지쳐서 쓰러져 나오지 못하고 불 길 속에서 순직했답니다. 젊은 아내가 통곡을 하면서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왜 또 들어갔어요!”

세 명 구한 것도 큰일을 한 것인데 자기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지친 사람이 왜 또 들어갔느냐는 것입니다. 안 들어가도 뭐랄 사람 없고 누가 또 들어가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왜 또 들어갔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이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 당하셔야 할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없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초하셔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을 모르셨기 때문에 자초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대부분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우리에게 닥쳐옵니다. 비록 예감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 고난이 카운트 다운하면서 우리에게 통보하고 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당할 때 그 때부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미 아셨습니다.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아셨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미 아시면서도 피하지 않으시고 그 고난을 자초하신 것입니다.

사형제도 가운데 그나마 가장 자비로운 방법은 총살형이랍니다. 아시다시피 총알의 속도는 총성이 전달되는 소리보다 빠르기 때문에 사형수는 총성을 듣기 전에 죽는 답니다. 그래서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한 답니다. 이에 비해 가장 잔인한 사형제도가 바로 십자가형이랍니다.

십자가형은 멀쩡한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서 스스로 죽을 때까지 매달아 놓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삼일도 또 어떤 사람은 일주일 동안도 매달려 견디다가 죽어간답니다. 겨우 자비를 베푸는 것은 다리를 부러뜨려 견디지 못하고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가장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자초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그 어떤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버림받은 고난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순교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십자가에 달리는 그 현장에서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 28:20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행 7:55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지금 순교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내려다보고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지켜보고 계시고, 그리고 성령께서 충만히 역사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께서 지금 스데반과 함께 하셔서 그를 지켜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비록 순교의 참혹한 고난의 자리이지만 스데반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를 지켜주시고 돌봐주시고 힘을 더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상황이 다릅니다. 마 27:45 이하를 보면 우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하늘 문이 닫힌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리고 빛이 비추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가장 힘드신 바로 그 자리에 하늘 문이 닫히고 어둠마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당신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견딜 수 있어도, 다른 고난은 다 참아낼 수 있어도 이것만큼은 참기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고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지옥의 참혹한 그 바닥까지 떨어지는 고난입니다.

하인리히 포겔(Heinrich Vogel)이란 신학자는 이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없는 자리가 어디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만 있는 병동,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 수용소, 죽음의 가스실, 죽음을 기다리며 서있는 감옥의 행렬, 평생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히로시마의 희생자들, 혹은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다른 자리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깊은 절망의 자리는 하나님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던 그 인간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달려있는 곳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으신 고난입니다. 믿는 사람들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고난이고, 앞으로도 경험해 보지 못할 두려운 고난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체험하게 될 고난입니다. 여기 주님의 고난의 또 다른 깊이가 있습니다.

대신 받은 고난

마 20:28을 보면 주님께서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친히 말씀하신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고난은 우리가 당할 고난을 대신 받으신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더욱 구체적으로 이런 내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담당시키셨다는 말은 대신 떠 넘기셨다는 말입니다.

한 사형수의 수기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자기가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자기 어머니가 면회 올 때마다 간수를 붙들고 눈물로 호소를 하더랍니다. “내가 대신 죽을 테니 제발 내 자식 좀 풀어주소! 내가 대신 죽을 테니...” 어머니의 이 절규를 들을 때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인간 세상의 법에는 대속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대신 죽겠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법에는 그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실제로 그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죄 문제를 다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사면되어 석방된 사람이 더 이상 죄로 인한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를 죄인 취급하지 않으시고 더 이상 우리에게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원주민들이 유목을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신선한 풀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곳곳에 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 속에는 악어 떼가 우굴댑니다. 가축을 몰고 강을 그대로 건넜다가는 사람도 위험하고 많은 가축의 희생이 따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축 중에 늙고 병든 놈 하나를 악어들이 우글대는 한 복판에 던져 넣습니다. 악어 한 마리가 그 놈을 물어뜯는 순간 피 냄새를 맡고 악어들이 그곳으로 몰려듭니다. 그 때를 틈타 다른 쪽으로 강을 건넌답니다.

그런데 악어 밥이 된 놈은 어떻겠습니까? 사람과 다른 가축을 살리기 위해 대신 희생이 된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고난이 그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한 수도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제까지 그 어떤 설교보다 훌륭한 설교를 하겠다고 광고를 해서 모두가 도대체 어떤 설교를 하려는가 기대하면서 모였답니다. 시간이 지났는 대도 수도사는 설교를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단 위에 놓여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조각된 상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촛불을 들어 머리의 가시관을 비추고, 못 박히신 손을 오른 쪽 왼쪽을 비추고, 그리고 못 박히신 발을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전체를 한 동안 비추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선 그의 두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눈물을 머금고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설교입니다” 그리고 축도하고는 마쳤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은 눈물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 때문에 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깨닫고 흘리는 감사의 눈물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의 찬양이어야 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고난은 다른 그 어떤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스스로 자초하신 고난입니다. 하나님께 까지 버림받는 그런 고난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대신 받으신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 특별히 이번 주간에 여러분의 삶을 통해 깊이 체험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눈물로 찬양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도/

주님의 고난의 그 깊이를 깨닫게 하옵소서.

나를 위한 고난임을 깊이 느끼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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