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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 그리고 그 이후 /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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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음, 그리고 그 이후 
성경: 눅16:19-31


사람이 사는 이세상을 소위 이승이라고 하고 죽은 이후에 가는 세상을 저승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승이 아무리 좋아도 이승만은 못하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신앙도 현세적인 기복신앙으로 떨어지게 했고 세상에서 출세하거나 형통하지 못하면 결국 신앙도 실패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형통과 과시를 위해서 전력투구를 합니다. 영적인 수양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신앙의 이유와 모토를 삼습니다.  

세상에 충실한 것은 좋으나 이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잊게 되고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아니한 채로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을 맞게 합니다. 결국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고통으로 떨어지는 불쌍한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리새인들을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평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돈, 즉 세상의 물질적 혹은 물리적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의 결국에 대해서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두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날마다 새옷을 갈아 입으며 아주 호화로이 연락하는 익명의 부자와 개밥조차도 얻어 먹을 수 없는 나사로라 이름한 아주 철저하게 가난한 거지입니다. 아주 재미있지 않습니까?  부자와 거지.  이제 이들의 비교할 수 없이 상이한 현재의 상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결과인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역시 꺼꾸로 비교할 수 없는 역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결과는 바꿀수 없는 불변의 것이고, 영원한 것이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론

현재의 상황: 19-21절  

(눅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눅16: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눅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제 두사람의 현재상황을 살펴보십시오.   

부자: 본문의 부자는 보통 부자가 아니요, 아주 부자였습니다.  그는 날마다 갈아입을 옷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일반서민이 옷 한벌밖에 없었음을 생각할 때 이 사람이 옷에 구애 받지 않고 입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특별히 자색 옷은 채색 옷으로서 아무나 입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옷은 관리들이거나 그들과 상응하는 지위에 있는 유지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수입한 것으로서 비단 옷을 가리킵니다.  고운 베옷 역시 아주 상류 사람들이 입는 고급 옷입니다.   

또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한다고 했으니 연락은 잔치를 말합니다. 사람들을 불러다가 날마다 잔치할만큼 그의 경제력은 상상을 초월하게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만큼 사회적인 지명도가 높은 상류층 인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마도 이 두가지 표현으로서 그 부자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는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그가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부자가 그러하듯이 상속을 받았거나 아니면 그가 나름대로 획득한 돈이겠지요. 그러나 그 부자체에 대한 주님의 평가라든지 어떤 비난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저 그가 부자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로: 그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거지’였습니다. 그는 집과 땅은 물론이요, 그 밖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고 그의 옷은 그저 거적대기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아주 심한 질병까지 앓았습니다.  개들이 가서 헌데를 핱았다는 것을 보아 문둥병이 아니면 비슷한 종양성 피부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로 처참할 만큼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집 대문곁에 누워서 그저 그 잔칫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불렸다고 하지 않고 “배불리려 했다”고 말씀한 것으로  보아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음식을 얻어 먹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부자에 입장에서는 중병을 앓는 거지가 지위가 높은 자신의 문곁에 누어 있는 것이 몹시 눈에 거슬렸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그에게 음식을 주는 것은 그를 오래도록 자기 집 문곁에 누어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도 주지 못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아뫃튼지 이러한 상황에서 두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만일에 이 두사람이 내 부모, 혹은 내 자식, 혹은 내 동기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 마음이 두 사람을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을 하고 비교를 하며 가치평가를 하겠습니까?  또한 우리 교회에 있는 두사람의 성도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 마음은 아주 냉정합니다.  부자는 아주 성공한 사람이고 아주 능력있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아주 큰 복을 받은 사람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그 반면 나사로는 온갖 모함과 오해와 평가절하를 당해도 아무런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무방비 상태로 온갖 비난과 정죄를 고스란히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입장은 어떠했을까요?   

한가지만 살펴 봅시다.  부자는 익명으로 말씀하셨으나 거지는 이름을 기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는 부자의 이름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으나 거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책에 부자의 이름은 누락되어 있었으나 거지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인생을 사시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언제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책에도 확실하게 기록되고 세상에서도 이 부자처럼 잘 사는 삶”이리고 대답합니다.  물론 그렇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을 연결지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언제나 본질을 잃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가지만 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끄시고 가장 적당하게 인도하셔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가장 좋은 환경과 길은 하나님께서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지요.

 
동일한 결과, 죽음: 22절  

이제 두사람의 이 세상에서의 결과를 보겠습니다.  

(눅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두 사람의 세상에서 삶은 비교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나 그 마지막은 동일한 결과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무도 피할 이가 없습니다.  지식인도 세력가도 도술가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이유는 죽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9:27a)“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 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정된 것이기에 사람의 임의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특별한 경우 말고는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원치 않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점점 노쇠해 가고 병들어 가기 때문에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만일 100년을 살아도 20대 같은 젊음과 힘이 있다면 아무도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부자도 역시 죽음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호화로운 옷을 입고 언제나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사람들에게 과시하면서 인정받고 살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죽음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력도 좋고, 살이 쪄서 눈이 튀어나오고, 병도 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세의 삶에 적어도 자신이 복을 받은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라는 어떤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은 사람의 연령과 지위와 처지와 때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그것도 일대 일로 찾아 옵니다.  누구나 반드시 그리고 혼자서 예기치 못한 시점에 죽음은 당신에게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은 내 손을 떠나갈 것입니다.  완전히 결별됩니다.  내가 사용하던 집도 사용할 수 없고 내가 타고 다니던 자가용도 탈 수 없습니다.  손 때묻은 일기장도 이제 더 이상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먼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다만 잊혀진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잘 해보아야 책에 이름 석자 기록될 뿐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부자의 최후와 거지 나사로의 최후는 죽음의 그 때에도 역시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부자의 장례는 부자의 장례답게 호화롭게 각계의 인사와 그 지방의 유지가 참여하여 애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장례는 장례라 할것도 없이 그저 거적대게 정도에 쌓여서 쓰레기장이나 힌놈의 골짜기 정도에 버려졌을 것입니다.  병을 앓다 죽은 거지의 죽음에 아무도 애도하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고 잠시 후에는 아예 잊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을 살았던지 어떤 장례식을 거행했던지 둘 다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사로도 죽었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죽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제 부터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마치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부자의 쾌락된 생활도 가난한 자의 곤핍과 핍절도 하나님과는 무관한 단지 엄연하고 냉정한 현실인것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였고 무심하신 것도 아니였습니다.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적 관심과 하나님의 현실적 관심이 달랐을 뿐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먹고 입고 마시는 물질적 현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실은 그러한 상황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설정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히9:27b)“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후의 심판은 과연 어떻게 행해지고 어떠한 현실이 주어지는가, 그리고 그 현실은 얼만큼 지속적인가, 그리고 그 심판의 이유는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죽음 이후의 상황: 23-24절  

(눅16: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16: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죽음 이후에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묘사된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이 곳은 하나님을 진실히 섬기고 그 아들 예수의 피로 그 모든 죄를 씻은 성도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전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격 처소입니다.  그는 모든 고통과 괴롬을 벗어 버렸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은 이제 아무런 궁핍함도 없는 100%의 위로와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것이요, 아무도 이 행복을 빼앗을 자는 없습니다.

얼마후 부자도 죽었고 그에게도 처소가 정해졌습니다. 그 곳은 ‘음부’라고 하는 곳으로서 이 곳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교회를 안나가는 사람이 아니요...)이 죽으면 마지막 영원한 지옥불심판 전까지 대기하는 상태적 장소를 가리킵니다.  부자의 처소는 마지막 심판을 고통스럽게 기다리고 있는 음부였습니다.  그는 고통가운데 있었고 특별히 불타는 목마름은 그로 하여금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 곳에서 부자의 상황은 더이상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을 축일 단 한방울의 물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무엇도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제야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하 내가 세상에서 먹고 입고 마시며 즐겼던 모든 것이 내것이 아니었구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부자에게 있어서 더욱 더 큰 불행은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영원히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리는 ‘두려움이 뼈속까지 파고드는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 부자가 이러한 환경에 처해져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죄가 그에게 있었던가요?
 

부자의 죄는 무엇인가요? : 25절  

(눅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본문에는 부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종류의 죄, 예를 들어 도둑질이라든지 사기라든지 살인이나 강도같은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부자에게 말했던 아브라함의 언급은 단지 “너는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렸다”는 것이고, “그 결과 이제 이 곳에서는 괴로움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린다면 모두가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까?  그러면 불교나 힌두교처럼 수행과 고행을 통해서 최대한 자신을 쾌락으로부터 멀리하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브라함도 다윗왕도 다 천국 문턱에도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소유권의 인정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리되 이 것이 누구로 부터 온 것이며 최종적인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누리는 것과 그것을 오직 내 것으로 알고 누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의 삶인 것입니다.   

부자의 삶이 바로 이런 삶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누림에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혹은 그 부자는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풍성한 것들을 주셔서 바로 나와 당신이 즐길 수있는 것이요.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노래합시다.” 그가 혹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하여도 이 부자는 실제로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사로의 사건에서 증명이 됩니다.   

진정 내게 있는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삶은 그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기에 진정 필요한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이 서게 됩니다. 그러나 부자는 날마다 문을 출입하면서 보았던 거지 나사로에게 하나님의 것들 중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죄악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었던 것입니다.  물 한방울 조차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물한방울도 역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드리는 헌물과 헌금은 바로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예외가 없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중에서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일부를 하나님께 소유권의 인정의 표로서 혹은 감사의 표로서 드리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가 바로 이러한 제사의 표본입니다. 결코 내가 땀흘려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가인의 제사이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치 못한 것이요, 죄악입니다.  

그는 아마도 나사로를 학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문 앞에 있는 것이 조금 보기 싫긴 하였어도 그를 때리거나 내어 쫒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어찌보면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는 큰 죄인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로를 위해서 마련하신 물질을 오직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진실만을 보시는 하나님의 목전에 그는 무정한 자며, 불법자이고 공금횡령자입니다.  악인입니다.  왜냐하면 그 목전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신명기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신15:7-11)  

(신15: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신15: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신15: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신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분명하게 말해서 부자의 삶은 믿음과 사랑의 법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자의 죄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약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하셨습니다.  선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선은 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자의 죄입니다.  그리고 바로 저와 여러분이 얼마든지 빠질 수 있는 죄이고 지금 현재 많은 사람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이 빠져 있는 죄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불타올라 갈라지는 목을 적실 한 방울의 물조차 구하지 못해 헐떡거리는 본문의 부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이 부자였던 사람에게 더욱 더 절망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는 나사로에게 물한방을만 찍어서 내 혀끝을 서늘케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 요청은 절망적인 사실의 인식과 더불어서 거절되고 맙니다.

 
상황의 불변성: 26절
 

그러면 그 절망적인 상황은 무엇일까요?  

(눅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은 아주 깊은 간격을 말하고 불변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음부에서 낙원으로 건너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고 낙원에서 음부로 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습니다.  불변의 상황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기간이 그저 아침 이슬처럼 금방 있다가 말라버리는 정도이고 그저 지난 밤의 꿈과 같은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상황은 금세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물리적인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같이 여겨선 않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시험이 바로 이러한 우리의 세속적인 가치 기준에서 파생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상황은 절대불변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위로와 완전한 행복을 찾은 나사로에게도 그러하고 완전한 절망과 고통가운데 있는 가난뱅이가 된 잠깐 부자에게도 그렇습니다.  이 상태 그대로 영원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는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저주가 있고 그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구렁을 인해서 주어진 상황이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구렁은 무엇인가요?  이 극단의 전환과 이 절대의 상황을 영원히 변치 않게 만드는 이 구렁의 비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큰 구렁은 무엇을 말할까요?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으나 큰 구렁이 의미하는 중요한 것중에 하나는 이 구렁은 바로 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부자의 멸망은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구렁으로 묘사된 죄를 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어떤 무엇도 그의 상황을 변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사로 역시 이미 죄를 벗어 버렸기에 그 밖에 어떤 무엇도 그를 음부의 구덩이로 던져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인해서 벗어지고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해서 달라붙는 것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골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요3:14-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세상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법: 27-31절  

이제 고통 가운데 있는 이 사람은 자신의 형제들을 이 곳으로 오지 않도록 준비시키려고 생각합니다.  

(눅16: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16: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16: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부자의 계속적인 태도는 나사로를 자신보다 못한 신분의 사람으로 그래서 자신의 마음대로 시켜도 되는 가치의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부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자신의 형제들이 이 곳에 오지 않도록 죽은 자 가운데서 나사로를 보내서 증거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제안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는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은 죽은 자 가운데 한 사람이 가서 전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종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길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한 전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들은 바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했습니다.  이는 성직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고, 모든 성도들은 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우리들이 이 죄사함과 구원의 비밀을 맡은 자인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의 신비한 이상경험이나 충격적인 사건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감동으로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어 믿음으로 인도하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성도들의 복음전도를 통해서만이 사람은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사건과 큰 구렁의 실체를 깨닫을 수 있게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전1: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또한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바로 구원이 여기에 달려있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저주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막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고 하셨고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면 말씀을 듣고 배우는 바로 이시간이... 고후6:2b의 말씀대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시간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내 남편과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 내 형제를 교회로 예배의 장소로 구원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십시요.  그것이 형제에게 영원한 행복을 선물하는 것이요, 바로 내가 준비하는 길인 것입니다. 
 

    결언
 

이제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신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삶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지는 거지로서 부자는 부자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을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구렁이 되어서 영원한 삶의 결정지워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모든 것을 사용하는 삶의 말합니다. 

 

죽음을 준비하십시요.  죽음은 때와 장소와 사람과 나이와 신분과 빈부를 가리지 않습니다.  준비하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큰 죄악의 구렁을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구체적인 방법은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의 사람들을 통해서 듣는 말씀만이 가능케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특별히 말씀을 위해서 세우신 주의 종을 존대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믿음과 겸손으로 받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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