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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진정한 갈증은 무엇인가? / 출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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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정한 갈증은 무엇인가?
출17장1~6
 
 
감옥과 수도원의 공통점과 차이점

죄수들을 가둔 감옥과 수도사들이 수련하는 수도원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데, 공통점은 아마도 두 장소 모두 어둡고 침침하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감옥은 불평과 불만으로 하루가 시작되어 한숨과 지루함으로 해가 저무는 반면 수도원은 감사와 기도로 매일의 일과를 시작하고 또 그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느닷없이 닥치는 어려움도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앞을 가로막을 때에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며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까요? 우리는 본문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천신만고로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로 신 광야를 지나 르비빔에 여정을 풀고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즉 광야와 사막에서 생명과 비견하는 중요한 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식수가  없으므로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물 없는 사막의 인생이란 인생의 고통과 죽음을 의미한다

물은 생명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에 천국에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어린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르비딤"에 이른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생명의 활기가 없고 죽음과 고통만이 있었습니다. 왜 그들에게 물이 없었습니까?

첫째로 르비딤에 장막을 쳤기 때문입니다. 르비딤이란 지명은 "쉬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는 세상의 삶에 젖어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진 없는 안락을 의미합니다. 땅만 쳐다보고 세상에서 안일하게 쉬고 있는 그리스도에게는 물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세상에 장막을 친 채 쉬고 있는 성도에게는 물이 없습니다. 생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목마르고 갈증이 나고 만족이 없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왜 르비딤에 머물렀습니까요?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피곤한 인생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위대한 은혜를 체험했고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마라의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것을 보고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와 같은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잊고 있습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원망했습니다. 책임질 줄 모르고 불평과 원망만 가득했습니다. 가정에서도 원망과 불평만 있는 가정에는 평안이 없는 법입니다. 모두가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기쁨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각자 맡은 일에 충성하면서 원망과 불평이 없어야 합니다. 잘못은 자기 자신이 하고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자체가 잘못입니다. 우리의 사회 또한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의 잘못은 총체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에게 책임이 있고 잘못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반석에서 솟아나는 생명수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마실 물이 없어 원망할 때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바위를 쳤더니 바위에서 생수가 솟아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생수를 마시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세상의 사막 길에서 목말라하는 이가 너무 많습니다. 사랑에 목마르고, 정의에 목마르고, 평화에 목마른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반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반석이신 예수님을 쳤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뜻합니다. 십자가는 생수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광야를 순례하는 인생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평화와 정의, 치료의 은혜를 얻습니다.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까?

첫째는 4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불트만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를 비워야 한다. 자기의 모든 가능성을 무(無)로 돌려야 한다.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모세는 지팡이를 들어 바위를 쳤습니다. 지팡이는 홍해를 치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지난날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팡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팡이를 볼 때 홍해 바다를 치던 감격이 되살아납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모세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능력이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이 울고 있는 것을 그의 아내가 발견하고는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은 "오늘은 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내 심령에 아무런 감동이 없으니 그것이 너무나 슬프오..." 하고 대답했답니다. 신앙 생활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핍박이나 시련보다는 마음속에 구원의 감격이 없고 신앙의 권태를 느낄 때입니다.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권태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한 것은 지난 날 하나님께서 역사하던 지팡이를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지시하심과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생명수를 받게되는 길입니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물을 얻으려면 땅을 파는 등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강구해야지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때로 우리의 이성이나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순종할 때 그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순종할 때 생수가 나옵니다. 믿고, 의지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믿음은 기쁨의 믿음이요, 능력을 힘입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는 믿음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반석의 생수는 인생 승리의 능력이 된다

물이 없어 원망하고 불평하던 그들이 기적의 물을 마시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 아말렉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르비딤에서 전쟁을 수행합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의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할 때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모세가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합니다. 하는 수 없이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좌우에서 붙들고 섰습니다. 모세가 앉고 양편에서 손을 붙들고 있을 때 이스라엘이 크게 승리합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의 승리를 표시하는 "여호와 닛시"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이 그렇게 시시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우리의 삶은 진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생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인류의 생수입니다. 영원히 마시고 목마름이 없는 생수입니다. 값없이 와서 마실 수 있는, 죄인도 마실 수 있는, 절망과 질병 속에서 허덕이는 자도 마시고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생수입니다. 오늘도 이 생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의 기갈은 물이 없음이 아니라 영혼의 생수이신 예수가 없어서 쓰러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백만 이스라엘 중에 있지만 고독한 주의 종을 보십시오. 백성의 길을 가면 하나님을 잃게 되고 하나님의 편에 서려니 백성의 원망은 극에 달합니다. 백성이 버려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십시오. 그의 종을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 불평의 와중에서도 모세에게 힘주시는 하나님, 반석에서 물을 솟게 하여 기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론 조사하는 회사에서 "당신은 어떠한 때에 만족감을 갖습니까?" 라는 조사가 실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첫 번째 많은 대답이 "갖고 싶은 물건을 갖게 되었을 때 마음에 만족감을 갖게 된다고 했고 두 번째 대답은 "지갑에 돈이 많이 들었을 때" 였고 세 번째 대답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마음에 만족감을 갖게 된다는 순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무엇이 내게 있느냐?" 에 따라 행복의 지수를 매기고 불안한 마음을 달랩니다.

그런데, 돈이나 물건이나 음식이 주는 만족감은 금방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절망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찾아 나섭니다. 어디에 영원한 만족감이 있을까, 찾아 나섭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없어지지 않는 삶의 만족감, 그리고 무한한 삶의 에너지를 찾습니다.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샘물과 같은 힘을 찾습니다.

여러분,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샘물과 같은 삶의 생명의 에너지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찾느냐에 따라서 나의 행복과 축복이 결정됩니다.

성경에 보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은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무엇이 내게 있느냐?" 에 따라서 행복의 지수를 매기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내게 누가 있느냐?" 에 따라서 행복의 지수를 매기고 항상 마음에 기쁨과 감사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의 일생을 통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우리를 불안으로부터 건져 주는 것은 "내게 무엇이 있느냐?" 가 아니라 "내게 누가 있느냐?" 에 따라서 행복과 축복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시편 4편 7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 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없어지지 않는 사람의 무한한 에너지,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물과 같은 생명의 에너지는 "내게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게 누가 있느냐"에 있음을 밝히면서,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 옆에 계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다윗은 시편 5편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원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영혼 깊숙이 채워주시는 기쁨은 하나님께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성공하고 있는 사람도, 실패해서 좌절하고 있는 사람, 지식이나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도, 미숙한 사람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환경에 처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슬픈 때나 괴로울 때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면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면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는 것을 보면서 받는 기쁨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때는 노래하고 춤추는 기쁨으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가슴속 깊이 맛보는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 기쁨에는 분명한 진리와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하여 주시는 불변, 부동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길 때 주시는 기쁨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마음이 기쁨을 갖게 합니다. 넷째로, 나를 자녀로 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믿고 의지할 때 더욱더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찬송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옆에 계셔서 마음에 삶에 에너지를 한없이 부어주시는 마음 든든한 생명의 에너지로써의 기쁨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과 찬송과 감사가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믿음으로 살 때에도 불행은 그림자처럼 따라 오지만 그때 하나님은 구경만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행을 막아 주시기도 하지만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준비했다가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혀 주십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셔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전반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또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고 또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셨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 편의 역동적인 드라마입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백성을 찾아오신 하나님,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은 자를 불러서 선민을 삼고 복을 주신 하나님,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 그리고 불신앙으로 점철된 택함 받은 백성의 삶, 그 속에서 우리는 구원의 감격과 불신앙이 빚어낸 분노를 동시에 느끼면서, 아울러 변함없이 택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대면하게 됩니다.

출애굽기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신실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고도 험한 광야 학교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현재 경험하고 있는 진정한 갈증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나 시련과 역경이 있습니다. 이 시련과 역경은 신앙의 깊이를 측량하는 좋은 잣대가 됩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시련과 역경을 만났을 때, 어떤 태도, 어떤 자세로 그 위기와 시련과 역경을 대면하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수준입니다. 원래 신앙은, 평소에는 그 진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학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신앙 수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 있는 사람들처럼 "지금 무엇이 내게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의 지수를 매기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내게 누가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의 지수를 매기고 불안한 마음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인생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애굽의 삶은 "무엇이 지금 내게 있느냐"가 행복의 지수이고 축복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죽음의 바다인 홍해를 건너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늘의 양식을 먹는 은총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상만 바라고 쉽게 울며 탄식하며 좌절해 버리는 천박한 신앙이었습니다.

현실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믿지를 못했습니다. 지금 누가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지를 아직도 깨닫거나 믿지를 못했습니다. 오직 모세만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모세로 하여금 호렙산 반석 위에 서서 반석을 쳐서 물이 솟아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광야라고 하는 학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의 반석이 깨어지기를 계획하십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의 삶은 "지금 내게 누가 있느냐"가 행복의 지수이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라는 학교에서 육체의 반석, 우상의 반석, 물질의 반석, 교만한 심령의 반석이 깨어지는데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쳤지만, 오늘 우리는 십자가로 우리의 반석을 쳐야 합니다. 육체의 반석, 우상의 반석, 물질의 반석, 교만한 심령의 반석을 쳐야 합니다. 자신의 혈기와 정욕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체험이 일어나야 합니다. 반석이 깨어지고 생수가 솟아나야 합니다. 어떤 생수가 솟아나야 합니까?  "무엇이 내게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의 지수를 매기고 불안한 마음을 달랬던 반석을 쳐서 이제는 "내게 누가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의 지수를 매기고 불안한 마음을 이기는 믿음의 생수가 솟아나야 합니다. 기쁨의 생수, 감사의 생수, 사랑의 생수, 찬양의 생수가 솟아나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생수가 솟아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바쁘게 사는 것이 하루살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루살이는 내일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제일 바쁘게 하루를 산다고 합니다. 마치 하루살이처럼 무엇에 바빠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루살이처럼 오늘 하루만 있는 것으로 알고 무의미하게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루살이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호렙산 반석이 깨어짐으로 생수가 솟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시고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교만한 심령의 반석을 깨뜨려 생수가 솟아나야 새 힘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내게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고 있음을 체험하면서 힘있게 기뻐하며 찬송하면서 천성을 향해서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교만한 심령의 반석을 쳐서 생수가 나오게 합시다. 기쁨의 생수, 감사의 생수, 사랑의 생수, 찬양의 생수가 나오게 합시다. 그래서 날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찬송하며 기뻐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진정한 갈증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자신의 갈증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습니까?  좀더 갖고 싶고, 누리고 싶고, 편하고 싶어하는 세상적인 갈증을 채우고자 하는 헛된 노력을 포기하고 여러분의 가슴에 주님으로 인한 샘물이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이제 영혼과 삶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목마름의 근원이 채워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오늘 우리는 거룩한 주님의 만찬에 초대받아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뜨거운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속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하신 구속의 사랑을 뜨거운 감격과 감사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가 바로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은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소망하도록 해주며, 또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심을 축하하고 확신하는 축제입니다(고전11:26,마26:29) 그러므로 성만찬은 이미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나라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열어주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의 잔치를 미리 경험케 하는 식사인 것입니다.

한스큉(Hans Kung)이란 신학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점에서 성만찬을 잘 설명해 줍니다. "과거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회상과 감사의 식사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교제의 식사요 언약의 식사요, 미래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메시야의 종말적 식사에 대한 예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현해 주는 귀한 예전임을 말한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따라서 성만찬은 이 땅의 마지막 날에 기쁨과 영광 중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나눌 하나님나라의 식사의 표징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례전에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기로 새롭게 다짐을 하게 되며, 감사와 감격의 삶 속에서 우리의 잠자는 신앙이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다시 깨어나게 됩니다. 이 성례전에 믿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입게되고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식에 참여하는 여러분은 확신 있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심과 같이 우리는 우리 이웃과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기꺼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받은 말씀대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오늘 나에게 다시 살아 역사하시며 나를 변화시키는 성만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내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쳐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으며, 주님의 인격이 있으며 주님의 사랑이 거하심을 믿습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주님의 분신으로 항상 승리하는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변 화 

주님 만난 후

그분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다만 주님을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성서를

읽거나 듣거나 실천한 후

당신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당신은 아직 성서를

읽는 것도 듣는 것도 실천한 것도 아니고

다만 정보를 갖고 있는 것뿐입니다



성찬을 받은 후

당신 안에 그분의 심장이 뛰고

그분의 눈빛이 빛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성찬을 받은 것이 아니고

다만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셨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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