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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골고다 언덕 위 사건 / 요 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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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 10:11-15
제목 / 골고다 언덕 위 사건


오늘 저는 이름도 성도 모른 채 지난 17년의 세월을 살아온 어떤 소녀의 기가 막힌 인생여정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 아이가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여정은 이렇습니다.
  입양되기 전까지 바닷가에서 친부모님의 자녀로 생활 (분명하지 않음)
  대구 조금래씨 댁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조영주라는 이름으로 양녀로 생활
  주문진 고모님 댁에서 군식구로 잠깐 생활
  진양 큰아버지 식당에서 식당 일을 하며 생활 (여기에서 최초로 가출)
  개장수 집에서 아주 잠깐 집안 일을 도우며 생활
  마산 중국집에서 식당 일을 하며 생활
  마산 에덴원이라는 곳에서 원아로 생활
  돼지를 사육하는 집에서 2년 조금 넘게 김영주라는 이름으로 집안 일과 사육장 일을
  도우며 생활
  다시 마산 중국집에서 반년 정도 가정부 일을 하며 생활
  마산에서 면도사 일을 하는 분의 집에서 이성희라는 이름으로 가정부 일을 하며 생활
  서울에서 가구점을 경영하는 사람의 집에서 은진이라는 이름으로 가정부 일을 하며 생활
  서울역 근처에서 한복집을 경영하는 사람의 집에서 성희라는 이름으로 가정부 일을 하 
  며 생활
  서울역 근처 어떤 목사님 집에서 리브가라는 이름으로 가정부 일을 함
  중계동 현대회관에서 김지연이라는 이름으로 석 달쯤 식당일을 함
  중계동 가정집에서 두 달쯤 김지연이라는 이름으로 가정부 생활을 함
  중계동 유진침구에서 1년 정도 김지연이라는 이름으로 가게일을 함
  중화동 이서방치킨에서 두 달 정도 김지연이라는 이름으로 가게일을 함
  중화동 대동어패럴에서 김지연이라는 이름으로 1년 정도 미싱시다 생활을 함
  제기동 봉제공장에서 1년 정도 황지연이라는 이름으로 미싱시다 생활

성도 여러분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여기 이 아이의 인생여정을 말입니다.

이름도, 성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아이 !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온 이 아이 !
배움도 없고, 힘도 없는 여기 이 아이 !
이제까지 살아온 여정이 너무나도 복잡한 여기 이 아이 !
이 아이의 인생여정을 들으시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

인생여정이 이러하기에 이 아이는 이제껏 <호적>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런 자매가 지금은 <중랑구>에서 목회하시는 어떤 목사님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호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착실한 크리스챤이 되어서 예수 만난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어떻습니까 ?
우리네 인생은 이 아이와 전혀 다른 인생이라고 생각되십니까 ?

<저희 집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의 <증조 할아버지>는 <9대 독자>이셨다고 합니다.
그런 <증조 할아버지>께서 <아들 둘>과 <딸 하나> 낳으셨답니다.
그 아들들 중에 <큰아들>은 <아들 넷>과 <딸 셋>을 낳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 중 <큰아들>이 장가를 가서 <아들 넷>과 <딸 셋>을 낳으셨습니다.
바로 그 <큰아들>이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알고 있는 <저희 집 족보>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제가 알고 있는 <저희 집 혈통>의 기간은 불과 150년, 길어야 200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300년 전의 저의 조상은 어떤 분이신지 ?
500년 전의 저의 조상은 누구신지 ?
그것을 저는 전혀 모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의 나의 조상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
제가 서두에서 소개해 드린 그 아이 !
그 아이의 인생과 저의 인생을 두고,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참으로 가련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아이는 어느 날 사랑이 넘치는 어떤 목사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이제는 <호적>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제 당당하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의 뿌리>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자신의 뿌리>가 <원숭이>인줄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알았습니다.
<우리의 뿌리>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
이렇게 보았을 때, 앞서 말씀드린 그 아이와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아무런 차이도 !
정말 <티끌만큼의 차이>도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한 목사님을 만남으로 <호적>을 얻었고 이제는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천국 시민권>을 얻었고 이제는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자신이 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천국시민>으로 살아가게 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
지금도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불법체류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의 삶은 한 마디로 <비참>입니다.
그 나라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궂은 일>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3D 업종>이라고 하는 바로 그 일 말입니다.
그나마 저들이 지니고 있는 약점으로 인해서 정당한 대우도 받지 못합니다.
때로는 숨어서 일도 하지 못하고 며칠 동안이나 지내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들 중 상당수 젊은이들은 <미국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군대에 자원해서 입대합니다.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지난 주간에 <이라크 전쟁>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과테말라> 청년이었는데 그는 결국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미국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미국시민권> 하나를 얻는데 이렇게 대단한 값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었습니다.
<천국시민권>을 얻는데 있어서 우리가 한 일은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
<뿌리>가 누구인줄도 모르고 방황하던 우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오셔서 <천국시민>으로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 !
그 분은 이제 우리에게 <문>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 <문>을 들어가며 나오며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이 부분은 <지난 주일>에 드린 말씀입니다.

기억하십니까 ?  <시편 23편>의 말씀을 말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성도 여러분 !
바로 이것이 천국시민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가 한 일은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볼 때 앞서 말씀드린 그 아이가 만난 어느 목사님과 오늘 우리가 만난 예수님 사이에는 <적지 않은 유사점>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과 예수님 사이 !
거기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그 아이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 아이의 죄>를 씻어줄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그 아이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 아이를 위해서 대신 죽어줄 수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 목사님께서 그 아이를 위해서 죽어준다 하더라도 그 아이가 <영원히> 살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자>가 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
그 분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아닙니다.
그 분께서 우리에게 <구원자>가 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죽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
그 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고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이제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망> !
그것은 이제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이 채찍에 맞아 터져 버렸기에 !
<예수님의 이마>가 가시면류관으로 피범벅이 되었기에 !
<예수님의 손과 발>이 못에 박힘으로 인해서 찢어져 버렸기에 !
<창에 찔린 옆구리>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아 부으셨기에 !
<골고다 언덕 위의 바로 이 사건> !
이 사건이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제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골고다 언덕 위의 사건>이 이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건을 잊어버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
우리 안에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정말 그 사건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아무리 분주해도 그렇습니다.
내가 직면한 상황이 아무리 다급해도 그렇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의 사건 !
그 사건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 <양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 위 !
그곳은 결국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우리가 그것만은 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의 그 누가 우리를 위해서 죽어줄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의 창조원리>로 볼 때 <사람>은 사랑의 대상, <물질>은 이용의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떻게 하든지 <주변의 사람>을 이용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물질을 향한 <사랑의 감정>은 너무나도 뜨겁습니다.
그 뜨거운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깨어져버린 가정, 깨어져 버린 인간관계 !
그런 가정, 그런 인간관계는 이 땅에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 위에 <자신의 몸>을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주님은 <당신의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왜 ?
여러분과 제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은 그리 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
<사 53:4-7> 말씀을 ?
같이 보실까요 ?  구약성경 1032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 !
그 분께서 우리에게 <구원자>가 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 아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신 목사님은 참으로 귀하신 목사님이십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은 그 아이에게 <구원자>가 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목사님은 그 아이를 향해서 <내가 너의 구원자>라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그 아이에게 목사님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마치 <구원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예수님께서 앉으셔야 할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요 10:8>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예수님께서 앉으셔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
그들은 모두가 도둑이요 강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요 10:1> 말씀도 보십시오 !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 !
거기 그리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문>은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말하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 !
예수님의 자리를 밀어내고 자신이 앉아 있는 사람 !
그런 사람들은 모두가 <도둑>이요 <강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
우리는 여기 이 말씀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고전 6:19-20> 말씀을 같이 보시지요.  신약성경 269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성도 여러분 !
<우리 생명의 주인>이 누구시라는 말씀입니까 ?
여러분이나 제가 <우리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 역시 우리가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습니까 ?
<나의 생명>, <나의 인생>의 주인이 나 인줄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
<자기 생명의 뿌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의 뿌리>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잊으면 안 됩니다.
<골고다 언덕 위의 사건>을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고난주간>을 맞이했습니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우리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이려고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회복 !
그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우리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저런 이유로 핑계하지 마십시오 !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물질적인 축복> !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건강의 축복> !
그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오히려 <올무>가 되고 <덫>이 될 수 있다고 <시편 69편>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했습니다.

어떻습니까 ?
주님과의 관계회복 !
그것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우리 안에 <골고다 언덕 위의 사건>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감격>과 <기쁨>이 가득한지요 ?
우리는 요즘 너무나도 <분주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골고다 언덕 위의 사건>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서 우리 안에 <그 감격>, <그 기쁨>이 회복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회복되어진 <감격>과 <기쁨> !
그것으로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아무리 험하게 느껴져도 우리는 그것마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 <이김의 삶>이 우리 영암의 가족 모두의 것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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