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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이루었도다" / 요 1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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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다 이루었도다"
본문 : 요 19:23-30


I. 인생은 미완성 교향곡

  31살 젊은 나이에 죽어간 비운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를 아십니까? 그가 죽은 후 37년이나 지난 어느날 그의 친구는 슈베르트가 마지막으로 쓰다만 곡을 손질하여 세간에 발표합니다. 이 곡이 그 유명한 「미완성 교향곡」입니다.

  구태여 슈베르트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네 인생은 미완성 교향곡입니다. 이 땅에 살던 어느날 날 보내신 분이 오라 하시면 모든 일 중단하고 그 분앞에 설 수밖에 없는게 나요 너요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지막 죽을 때 남긴 말들을 보면 미완성 인생에 대한 아쉬움이 베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좋았을텐데, 조금 더 베풀고 헌신할 수 있었는데, 조금 더 의미있고 재미있게 살 수 있었는데..." 아쉬워합니다.

심지어 그렇게도 죽음을 초월하고 싶었던 석가모니마져 죽음의 순간 "생자필멸을 명심하라" 산자는 반드시 죽게끔 되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보십시오.

「테텔레스타이」 - 다 이루었다! 이 얼마나 장쾌한 말씀입니까?

  다 이루었다 - 여기에 무슨 아쉬움과 미련이 있습니까?
  다 이루었다 - 이는 성공에 대한 환호요 승리에 대한 만족과 예찬이 아니겠습니까?


  33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며 도대체 무엇을 남겼길래 이토록 담대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팔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소위 하나님의 사람들 대제사장에게 모함을 받아 죽습니다. 억울한 재판석에서 변호인도 갖지 못했고 한 마디 시원한 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불법재판을 받고 죄수아닌 죄수가 되어 죽어가면서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3년동안 애써 양육했건만 제대로 된 제자 한명 없어 보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배고픈자 먹였건만 아픈 사람, 배고픈 사람은 더 많아 보입니다. 부지런히 복음을 전했건만 복음은 조그만 땅 팔레스타인도 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모아놓은 재산도 없습니다. 베스트셀러 한권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결혼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총명한 자식 하나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다 이루었다」 분명 이 한마디 말씀속엔 의미심장함이 숨어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한마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II. 가까이 가야 들을 수 있는 말씀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가까이 나아갔던 제자만이 들을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현장에서 바로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리아란 이름을 가진 세 여인 - 예수의 어머니, 글로바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이모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던 이 요한이 바로 오늘 본문의 저자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십자가가 무서워 도망을 갔던 제자들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호기심 때문에 몰려왔던 군중들이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왔던 민초들이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옷가지나 챙기기위해 제비를 뽑던 로마 군인들이 들을 수 있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엔 이 현장을 장면을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라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 못박혀 신음하시며 서서히 죽어 가시는 예수님 바로 곁에서 귀를 기울이던 사랑하는 제자만이 들을 수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말씀은 일곱마디 말씀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들을 가상칠언이라합니다.

  예수님 가까이 나아갔던 제자 요한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빠진 두 가지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가 목 마르다」는 말씀과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고난 주일 이 아침 이 신비한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예수님 십자가 가까이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를 듣기 위해 가녀린 목소리로 신음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십자가 가까이 가 보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III. 고통을 피하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의 그 처절한 고통을 지켜보고 예수님의 절규를 생생히 들었던 요한에겐 커다란 과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내 주님, 선생님은 저렇게 커다란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데 나는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물 한 사발 대접할 수 없었고, 시원한 변명 한 마디 할 수 없었고, 함께 목 녹아 울어줄 수도 없다니, 내가 과연 저분의 제자란 말인가? 나란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몹시도 고민하던 끝에, 오늘 본문을 통하여 크고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24절, 28절, 36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구약의 성취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리 계획된 하나님의 계획서에 의하여 지금 이 엄청난 수난의 현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멋 모르고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겨 제비를 뽑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똑똑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가 이 땅에 오셔서 죽어갈 때에 철없는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제비를 뽑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물 한사발 대접할 수 없는 이 못난 제자를 성경은 나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장엄한 이 장면을 바라보라 구약성경에 똑똑히 그분은 마지막 순간에 내가 목마르다 하리라고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뼈가 꺾여지지 않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지난 수천년동안 우리의 선진들이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낼 때에 뼈를 꺾지 않았던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했다는 것인가? 아~ 우리가 양을 잡을 때마다, 피 뿌릴 때마다 보았던 다리를 꺾지 않은 이 모습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뼈가 꺾이지 않은 모습을 예견하고 있었구나. 의미도 알지 못한체 우리는 양을 잡을 때마다 단순히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바로 그 양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그림자였구나. 두려움에 떨며 요한은 이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과연 나는 예수님의 제자인가? 예수님을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다니 자신의 가슴을 치던 요한, 가슴 아파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만 이 현장을 목격해야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감정적인 고통으로만 이해하고 거기서 안위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성취된 하나님의 사건 앞에서 우리는 경외감을 가지고 영적으로 감사할 일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목놓아 우는 일이기보다는 믿음으로 담대히 받아 드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요한이 깨달아 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니까 누군가 안타까웠던지 쓸개탄 포도주를 갖다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취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몽롱한 상태에서 마취되어 고통을 잊어버린체 십자가에서 달리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은 식초를 요구하시고 식초를 입에 담으셨습니다. 정신이 몽롱해져 갈 때에 입에 머금고 정신이 번쩍 들어 고통이 감해지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이 가중되기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갈증을 해소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갈증을 느끼기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왜요? 주님의 고난은 내가 당해야 될 고난을 대신 당하는 그 현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속의 고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값으로 내가 당해야 될 온갖 고난을 주님은 친히 체험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IV. 자원하여 포기하셨다

  여기 신앙인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신앙의 자세가 있습니다. 우리 또한 구원받았다고 하나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의 모퉁이 모퉁이에서 고난과 고통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요. 그때마다 피하려고만 하는 것이 좋은게 아닙니다. 그 고통 가운데 있는 진지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통이 있을 때에 술 한잔 마셔보고 잊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하소연하면서 그 고통을 덜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수다를 떨면서 고통을 잊어보려고 하는 것 신앙의 진지한 자세가 못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디오나 빌려다가 보면서 고통을 잊으려고 하는 것, 오락이나 하려고 하는 것 무책임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마다 정말 식초라도 한 방울 마시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고 이 고통 가운데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가? 경건하고 진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30절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 이 표현도 대단히 독특한 표현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도 돌아갔다고 하지요. 그러나 사람이 돌아갈 때는 이것은 수동적인 죽음입니다. 좀더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하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내 생명을 내가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것이 돌아갔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파라디도미" 이 말은 능동적인 죽음을 얘기합니다. 자발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기꺼이 자기 생명을 포기했다. give up 했다는 뜻입니다. 왜요? 나를 위해서 나의 생명을 위해서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포기했다. 이런 뜻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될 때에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짤라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가운데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당장 십이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게 할 수 없는 줄로 알았더냐" 얼마든지 나는 내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발적인 포기가 없었더라고 하면 어떻게 예수님을 체포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심판할 수가 있으며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인간이 십자가에 매달을 수 있으며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더란 말입니까? 이것은 자발적인 포기였다. 기꺼이 생명을 우리한테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는 예수님의 순종이었습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신앙생활하는 자세와 원리가 있습니다. 끌려가듯 빼앗기듯 살지 말고 자원하여 자기를 포기하고 드리는 give up - 포기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시시 때때로 주님 앞에 찾아 나와 시간을 드립니다. 율법에 매여서 시간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과 감사의 감격의 마음이 없이 시간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쓸모없는 내 시간이 주님을 위하여 쓰임받다니, 내 생명이 주님을 위하여 드려질 수 있다니, 주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와 아름다운 관계가 너무 좋아서 감사하고 감격하며 시간을 드리는 give up 포기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찾아 올 때마다 예물을 드립니다. 아무런 느낌도 감격도 없이 재물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재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도 쌓이지 않는 재물입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되신 그분 앞에 온 물질과 우주의 주인이신 그분 앞에 내 물질이 쓰임을 받다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을 수 있다니, 주님을 위하여 뭔가 드릴 수 있다니, 감사하며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하나님 나라 위해 온전히 쓰임 받는 복된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권리는 빼앗기는 것입니까? 기꺼이 포기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재능은 포기되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빼앗기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은 빼앗기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드려지고 있습니까? 「다 이루었다」 - 나는 온전히 순종했다. 자원하여 너희를 위하여 내어놓을 수 있었다. 기쁨으로 포기할 수 있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V.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에 어마어마한 말씀으로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3번쯤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천지 우주 만물을 완성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기뻐서 탄성을 토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힘없는 종이가 둘둘말려서 아궁이에 집어던져 재가 되듯이 살고 있는 우주가 끝장나고 새하늘과 새땅이 펼쳐지는 영광스런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요한계시록 21장 마지막절에 다 이루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영광스런 사역을 마치시고 그 생명을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리며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고개를 떨구시며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말씀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테텔레스타이 -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네 가지 정도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1. 법정에서 쓰여질 때 이 말씀은 무죄선언. 너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테텔레스타이 -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이 씌여지고 있습니다.

  어느날 늦은 밤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스 1세는 병사의 복장을 하고 진중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한 장교의 숙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장교는 황제가 총애하는 신하의 아들로서 평소에 아끼는 젊은이였습니다. 이 장교는 군대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사 문을 들쳐보니 그는 책상에 엎드려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오른손에는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쓰던 글이 남아 있었습니다. 글을 읽어보니 이 젊은 장교는 도박에 손을 대어 마지막에는 군대 자금까지 동원했고, 이제는 갚을 길이 막막하여 자살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는 유서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글의 맨 마지막 줄은 <이 많은 빚을 누가 갚을 것인가?>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황제는 모든 사정을 짐작했습니다. 황제는 펜을 들어 종이 여백에 크게 적었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다 갚겠노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 그리고 황제는 조용히 막사를 나왔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나! 도무지 갚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끔찍한 죄악들 테텔레스타이 - 다 이루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의 모든 허물과 죄를 다 갚았노라.


2. 다 갚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노예시장에서 흔히 쓰여지는 단어였습니다. 테텔레스타이 - 다 갚았다.

  돈 많은 갑부가 노예를 사서 그에게 자유를 선포할 때에 이제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모든 노예 값을 내가 다 갚았습니다.

'테텔레스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뭘 갚았다는 것입니까?

  예수가 당하신 이 고통은 지옥에서 내가 당해야 될 고통이었습니다. 이것을 진작 깨달았던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14절)

  온갖 수치를 다 갚았다는 얘기입니다. 죄는 수치를 동반합니다. 부끄러움을 동반합니다. 예수님께서 발가벗기움을 당하시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인간들의 조롱을 받고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당해야 될 부끄러움이요 수치였습니다.

  얘들아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 내가 죽노라. 너를 벗길 수 없어 내가 발가벗노라. 너를 부끄럽게 만들 수 없어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노라. 너의 수치를 참아 볼 수 없어 내가 수치를 감당하노라. 이 현장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다윗은 말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6절) 다 갚았다.


3. 성전에서 가끔 테텔레스타이란 말이 쓰여지곤 했습니다. 구약에서 테텔레스타이 - 완전히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제사장들이 제물을 검사하고 「완전하다」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완전하고 깨끗한 제물로서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이였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 총독은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23:4) 말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롯유다 마저도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라고 말했습니다.


4. 마지막으로 테텔레스타이 - 다 이루었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온 목적을 다 이루었다는 얘기이지요. 누가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목표가 있는 사람만이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그 목적,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바로 그 목적,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사명, 생의 의미 테텔레스타이 - 다 이루었다.

  오늘 이 순간이 주님 앞에 서는 순간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다 이루었다 말씀하실 수 있을는지요. 여러분 이 땅에 온 구원받은 지상 과제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내가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받았다. "너희는 땅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해라. 복음을 전하는 자리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한 가지가 있다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땅에서 했던 양식으로 평생 먹고 살아야 될 일이 있다면 내가 이 땅에 했던 업적으로 평생 쓰고 살아야 될 면류관이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VI. 아버지의 고통

  「다 이루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통과 함께 아버지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마음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를 지켜보아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다 이루었다」 이 한마디 말 속에 가득히 담겨져 있습니다.

  미국을 가면 100년 이상 된 다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 철골로 만들었기 때문에 배가 지나면 다리를 올리곤 했습니다. 당시에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교대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근무지에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13살 이하의 아이를 집에 나두면 문제가 됩니다. 법원에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기차가 오기 때문에 다리를 내리려고 하였습니다. 기차는 다가오고 있는데 아이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가 심심해서 가만히 보니까 밑에 무슨 큰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이 보인 것이지요. 아빠가 뛰어내리라 소리쳐 보지만 아이는 아빠만 부르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1,200명의 승객들을 수장시키고 말 것인가? 아니면 내 아들을 죽여야 하는 것인가? 아버지는 결단합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스위치를 돌립니다. 기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지나갔습니다. 다리를 들고 아버지는 급히 내려 가봅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톱니에 시뻘건 피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실화입니다. 미국 신문들은 대서 특필하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다.!

  아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의 사명을 다 감당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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