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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강력한 무기 / 골 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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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태 목사
가장 강력한 무기  (골 2:13-14)


(골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여러분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이번 이라크전쟁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현대전은 무기의 대결입니다.  숫자가 많아도 강력한 무기앞에서는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패배하지 않습니까?  정신적으로 무장을 하고 자살특공대를 조직해도 소용없습니다. 지하동굴을 깊이 파고 인간방패를 앞세워도 안됩니다.  강력한 파괴력을 갖춘 무기를 최신 전자장비를 통해 정밀하게 목표지점을 조종하여 공격하니 후세인도 당해내기가 어렵습니다.  김정일도 간담이 서늘할 것입니다. 

'가장 강한 것은?'하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 돌이다.  그러나 돌을 깨뜨리는 것은 쇠다.  쇠를 녹이는 것은 불이다.  불을 끄는 것은 물이다.  물은 구름에 흡수되어 버린다.  구름은 바람에 날려간다.  바람은 사람을 어찌하지 못한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서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런고로 죽음이 가장 강하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십자가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아십니까?  십자가는 제아무리 강한 대적으로부터도 승리를 가져오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원수 마귀, 사단과 싸우시는 무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싸워 마귀 사단으로부터 승리하셨습니다.  15절 말슴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표준 새번역 성경은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골 2:15)'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 것은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아주 처참한 죄인에 대한 처형법입니다.  아주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인류역사상의 가장 비참한, 가장 부끄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가 승리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십자가일 수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생명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도 승리하려면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안됩니다.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바로 몇 시간 후에 십자가를 지실 것인데 제자들 앞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하시고 십자가를 집니다.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신 게 아니라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승리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나타난 신비입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는 시간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선언이요 여유요 엄청난 위세입니다.    비록 죽으면서도 그렇게 죽이는 자들을 여유 있게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절대로 어쩔 수 없어서 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억지로 도망가다가 능력도 없고 지혜도 없고 일이 꼬여들어서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성경이, 계속 증거하는 그 주제의 초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십자가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정된 것이요 십자가는 계획된 것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미리 약속된 것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거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와라"고 말씀하시자  죽은 사람이 걸어 나옵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 죽었다 이 말이에요.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없이 십자가를 집니다.  그렇게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말없이 죽어갔는지 여러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진정한 승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완성이요 이것은 예언의 성취요 이것은 본래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요 그것이 때가 되자 결정적인 시간에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어떤 비밀이 숨겨있기에 강력한 무기입니까?


1. 희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희생하고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를 거부하고 무죄를 주장하고 천사들을 동원하여 싸워서 군인들을 물리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여전히 율법아래 놓여 있고 여전히 죄에 눌려 살다가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기꺼이 감수하시고 고통중에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의 죄가 다 옮겨졌고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살리셨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희생이 담긴 예수님의 사랑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2차대전 때 일본군은 태국 콰이강에 다리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이는 동남아를 모두 점령하려는 전략 가운데 가장 큰 계획으로 군사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일본군은 영국군 포로를 이용,콰이강의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은 중요한 장비를 잃어버렸습니다.  일본군은 영국 포로들이 조직적으로 작업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총부리를 들이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장비를 숨긴 자는 자수하라.만일 셋을 셀 때까지 자수하지 않으면 모두가 총살이다.  하나,둘… 셋을 외치려는 순간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내가 숨겼습니다.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즉석에서 총성이 울리고 그 포로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일본군 창고에서 그 장비가 발견되었습니다.  일본군이 그곳에 잘 간수해놓고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군인은 다른 이들을 살리려고 스스로 자원해서 희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생명을 얻은 이치가 이와 비슷합니다. 그 영국 군인은 자기도 죽을 운명에서 값있게 죽으려고 용기를 나타냈지만 예수님은 죽음과 상관없는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십자가를 자원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희생하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 믿는 사람은 많은데 점차 사랑과 희생이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교회안에서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희생적인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적인 사랑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뭐니뭐니 해도 사랑의 계시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뜨거운 마음을 전달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의 진실한 언어는 희생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요즘 부모들이 아들 딸들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다 해주는 것이 문제라고요.  부모님이 아무리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도 그리고 뭐, 이거 해주고 저거 해주고.  자녀들 장가가고 시집가는 데다가 뭐 큰집을 사주고……차사주고 모든 것 다 해주지 않습니까?  저들도 저들대로 고생을 하며 살아가면서 사는 맛이 있어야지.  모든 것을 원하는대로 다 해주니까 쉽게 살아갑니다. 다 좋을 것 같지요?  부모가 옛날에 고생했다고 해서 "너는 고생하지 마라"해서 집 사주고 차 사주고 다 사주는데, 좋을 것 같지만 틀림없는 것은 이렇게 사랑 받은 자녀는 행복지수가 낮습니다. 그리고 불효자가 됩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어려워서 밥 한끼를 제대로 못 주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면서 키운 그 자녀는 커서 철저하게 효자가 됩니다.  그리고 행복지수가 더 높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희생하며 사랑하는 것을 보고 배울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희생만이 사랑의 효과적 언어입니다. 

  많은 고난 속에 희생하는 사랑은 진실합니다.  저 분이 얼마나 희생하나?  나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나?  그걸 보고야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수용합니다.  사랑을 믿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살리기 위하여 그는 죽으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안에 엄청난 사랑이 계시되어있고 그 사랑 안에 나의 삶의 의미가 계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깨닫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공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 이것은 의의 표식입니다.  불의에 대한 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죄란 그저 흐지부지 용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죄 값은 사망입니다.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 되는 것이에요.  우리나라 정치처럼 흐지부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분명하게 밝혀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으로 벌을 받아야지요.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지요.  그냥 슬쩍슬쩍 넘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심판은 엄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했던 것이에요.  죽지 않고는 절대로 살리지 못하니까요.  그걸 아셔야 됩니다.

  어느 마을이 아주 청교도적인 정신을 지켜 온 마을인데, 깨끗하게 정결하게 술집도 창녀도 없는 것을 자랑삼고 사는 좀 엄격한 마을이 있는데, 어느 처녀가 어쩌자고 결혼하기 전에 임신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요 또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들의 궂은 일은 온 마을의 궂은 일은 그 수도사가 하는 거예요.  이런 수도사 한사람이 그 마을에 있었는데 이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못하면 이것은 간음죄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잘못하면 맞아죽게 됩니다.  그런데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말을 안해요.  그래서 지금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직전에 하는 말이 "저 수도사"라고 했어요.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고역을 당하고 감옥에 처넣어졌어요.  시름시름 앓다가 감옥에서 죽었어요.  죽은 다음에 시신을 염하면서 보니까 이게 남자가 아니고 여자예요.  남장 여인이었다고요.  모든 사람은 숙연해졌습니다.  이 여자는, 이 수도사는 왜 '그것이 내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왜 안했을까?  저 처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했어요.  내가 죽어야만 그 누군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십자가는 의의 승리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거기서 완전히 충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족원리라고 합니다.  충족돼요.  그리고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고 희생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죄를 담당하시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죄인들이 모른다면 너무 쉽게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결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어도 또 다시 자신을 죄로 더럽히고 부끄러운 삶으로 돌아갈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사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책임을 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를 위해 희생하신 의로우신 예수님을 닮아가며 거룩한 삶을 살며 의롭게 변화되도록 의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의의 승리가 십자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며 무엇을 보십니까?  희생적인 사랑과 더불어 의를 실천하신 예수님의 승리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 은혜의 승리가 담겨 있습니다.(14)

  또한 이것은 긍휼의 승리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율법과 은혜?  은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율법에 대한 은혜의 승리가 십자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만이 이 십자가만이 이 긍휼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음을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집요하게 우리의 죄를 추적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샅샅이 조사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뿐 아니라 생각까지 따집니다.  우리가 범한 단 하나의 실수까지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철저하게 파멸로 몰고갑니다.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쫓아다니며 추궁합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이야긴즉슨 어떤 여자를 만나 결혼할 욕심으로 따라다녔는데 여자가 결혼을 조건으로 처리할 일이 있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하여 가진 것이 부족해서 부득이하여 사채를 조금 빌려 주었답니다.  그런데 아주 악랄한 조폭한테 걸린것입니다.  비싼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눈덩이처럼 원금이 불어나고 월급이 송두리채 차압당하고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집안의 돈을 끌어 갚으라고 협박을 당해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그와 비슷합니다.  잠간의 실수도 눈감아주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추궁하며 죄책감과 죄의 댓가를 요구합니다.  너는 이제 소망이 없다고 하며 죄의 권세아래 팔아버립니다. 절망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지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율법에 대한 승리입니다. 14절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죽음의 승리입니다.  죽음을 넘어섭니다.  죽음을 초월합니다.  십자가는 생의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믿고 죽음의 세계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 십자가의 말씀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의 길입니다.    사람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한 기회는 딱 하나 있어요.  단 한번의 기회.  그것은 바로 곧, 죽음이다.  그 기회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향하는 길로 맞이하느냐?  아니면 영원한 저주로 끝내는 시간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삽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그 한순간을 작품처럼, 클라이막스로 그렇게 맞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당신은 곧 죽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두 번째는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라.  바로 이것이 나의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기회를 가장 귀한 기회로 의미를 바꾸어 놓을 수 있고 방향을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 북한에 초청을 받아 가서 큰 행사를 치루고 저녁에 파티를 하는데, "목사님, 목사님은 왜 우리를 돕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목사님의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원에 의해 총살당한 것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북한을 10여년 동안 돕는데, 그 돕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는 겁니까?"  "대가 없습니다.  내가 평양시내에다가 굉장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런 얘기는 안하겠습니다.  내가 목사니까, 뭘 요구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보느냐?" 그러니까 "그래도 한 말씀 해주세요."  "딱 한마디만 할께요.  예수믿는 사람들 죽이지 마세요.  이것만 약속해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작년에도 400명 죽였다며.  인정을 하더라고요.  그런고로 기독교인들 죽이지 말아달라고.  그는 말합니다.  "안 죽일 수가 없어요."  "왜요?"  "반동이거든요."  "어째서?"  "공산당보다 기독교인은 훨씬 셉니다."  왜 세냐고 물었더니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죽기를 기독교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지상의 영광입니다.  단 한번밖에 없는 기회입니다.  그러니 사양할 리가 없죠.  두려워할 리도 없죠.  승리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승리를 위하여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것입니다.  승리를 믿고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승리의 계시가 바로 십자가에 확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이 길을 통하여 승리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호산나를 먼저 부르고 당당하게 갈보리 언덕으로 가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십자가를 사랑하며 살면서 날마다 승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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