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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주를 만난 여인 /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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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를 만난 여인
(요한복음 20:11-18)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장사지내지고, 맨 처음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장면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마리아는 사흘째 되던 날, 동트기 전에 주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지만 예님의 시체가 없었습니다.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본 그녀는 슬피 웁니다.

예수님께서 곁에 서셨는데도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을 때, 그 때서야 그녀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목맨 음성으로 “선생님이여!” 하며 예수님의 부름에 대답합니다. 참으로 감격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녀는 그 기쁨을 제자들에게 달려가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 여인의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통하여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들으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는 여인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으로 달려간 사람입니다. 그녀가 무덤으로 간 이유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열심이 탁월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향유를 준비하였었습니다. [눅23:55-26]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였던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덤에 와보니 주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성통곡하고 맙니다. 그녀는 누가 무덤의 돌을 옮기고 시신을 어떻게 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13절]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시체를 보러 왔다가 시체가 없자 울었습니다. 시체를 찾다가 못 찾자 울어버린 사람, 그가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여기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울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고난과 힘겨운 삶으로 인하여 슬퍼합니다. 그런데 그 슬픔의 이유가 한갓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한 것이란 걸 아십니까?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예수님의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면 이 여인은 결코 울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지고 간 향유를 정성스럽게 발랐겠지요.

여러분, 왜 힘들어하십니까. 왜 슬픕니까. 왜 웁니까.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한 게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히 결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그때 이 여인이나 지금 여러분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실은 시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울게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체 때문에 울게 아니라 자신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눅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미 생전에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막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이 말씀에 대하여 바리새인이나 빌라도의 군인들은 염려하여 무덤을 굳게 지켰습니다.[마27:62-66] 그런데 제자들도 이 여인도 이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요20:9] 반대자들은 그 예언을 믿었는데 제자들은 안 믿었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은 시체를 찾아 울게 아니라 사신 주님을 찾도록 힘써야 합니다.

몰라보는 여인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에만 온 신경을 쓰던 여인은 예수님이 정작 나타났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14절]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였더라”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찾았던 예수님이 곁에 서 계시건만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가 찾은 것은 예수님의 시체였지 살아계신 예수님이 아니었기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메시아를 갈망하던 유대인들 앞에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왜냐하면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했으나 예수님이 그런 분이 아니니까 그랬습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체를 찾았기에 살아계신 주님은 몰라보게 됩니다. 천사는 여기에 대하여 핀잔을 합니다. [눅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그 모습대로 주님을 만나길 원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찾아야 할 때 죽은 예수님을 찾는 데 그 불행이 있습니다. 주관적 사고가 주님을 만나는데 얼마나 장애가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는데도 못 알아봤습니다.(요21: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동행하는 이가 예수인 줄 몰랐습니다.(눅24:16)

아집과 감정에 쌓이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정욕과 슬픔의 함정에 빠지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열심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방식으로 주님을 찾기에 곁에 계신 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실은 우리가 주님을 찾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방식대로 찾기에 문제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주님을 찾는 자는 성인(成人) 중 한 분인 예수를 찾을지는 모르지만 부활하신 주님, 구원의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는 한 그의 슬픔은 계속 될 것입니다. 여전히 근심에 쌓인 채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이 신약에 13회나 쓰이는데 바로 제대로 찾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방식대로 찾음으로 살아계신 주님과 늘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여인

주님은 그녀를 울면서 찾고 있는 채로, 눈물을 흘리는 채로 놔두진 않습니다. 사람 스스로 자신을 알아보기까지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주님의 일이 너무 중요합니다. 너무 급합니다. 너무 많습니다. 기어이 주님은 먼저 그녀를 부릅니다. [15절]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주님은 인자하게 다가가지만 그때도 마리아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의 시체를 내놓으라고 합니다. 다시 주님은 “마리아야!”하고 부르십니다. 그때에야 주님인 줄 알아보고 “선생님이여!”라며 대답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를 인자한 음성으로 부르시듯 말입니다. 바울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의 핍박자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시체가 없어졌다고 실망만 하고 있는 마리아가 주님 음성을 듣는 순간 그의 시름은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주님은 마리아를 불러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마리아를 부르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17절]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승천을 알리라는 말씀인데 승천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활을 전해야 가능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전합니다. [18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빈 무덤을 들여다보며 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찾을 것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이미 주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합리적 사고 속에 갇힌 예수님이 아니라 주님의 방식대로 구원의 주님을 찾으십시오. 시체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을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마리아를 시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그리고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부활의 주님을 기다린 자는 만납니다.

만난 자는 또한 전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만난 자는 전합니다. 이 아침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이젠 나가서 부활을 알리는 일에 전심전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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