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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 / 마 21:1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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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목 :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
  * 본 문 : 마태복음 21 : 1 ∼ 11
 

  *  크리스천 센츄리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기독교 잡지가 있습니다. 이 잡지에 로날드 고에츠 박사님께서 중요한 논문을 실린 바 있습니다. 그 제목은 ‘A period of anti-modesty’라고 하는 제목입니다.

반 겸손의 시대하고 하는 것입니다. 반 겸손의 시대……. 아마 여러분 여러모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 우리 다같이 피부로 느끼고 있을 줄 압니다. 반 겸손의 시대 이분은 이 논문에서 그 뿌리를 어디다 두었는가 하면 칼 막스와 프로이드와 철학자 니체에다 두었습니다. 아주 높이 올라가서 이런 사람들의 그릇된 사상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반 겸손의 성향이 자리 잡게 됐다 하는 것입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겸손은 미덕이 아니요. 하나의 억압의 수단이라는 거죠. 피해자의 피해 계급을 통제 수단으로 겸손과 온유를 강요해왔다 이렇게 니체는 말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그들의 나름대로의 종합된 논리가 힘의 철학입니다. 힘만이 종이다 그리고 초인간성을 말합니다. 초인간성, 하나님 앞에 겸손 하라 하면서 결국은 피지배 계급을 다스려왔다. 그런 거로 초인적 인간만이 자유 할 수 있다 라고 선동을 해서 여러분 아시는 대로 혁명이 나오고 공산당이 나오고 온 세계가 이렇게 소란해 졌고 지금도 그 영향이 확산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이것을 느낍니다. 보세요, 종이라는 이름으로 반항을 합니다. 종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은 그 주관적인 겁니다. 객관적이라고 하는 말까지도 주관적입니다. 자기 나름의 정의를 주장하며 반항을 하고 결국은 전체를 다 무너뜨리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PR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랑을 앞세웁니다. 옛날엔 그 자기 자랑 같은 건 참 죄송스럽고 부끄러워서도 말하지 못하던 거를 지금은 그저 자기자랑, 자기 아들자랑, 마누라 자랑, 주책없는 자랑 막합니다. 그런데 난 그 좀 사회생활에서 이런 게 참 마음에 안 들어요. 가끔 명함을 받을 때가 있는데 명함에 자기 얼굴 딱 넣어서 사진을 넣어 가지고 주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뭐 거기까진 나도 좀 봐주겠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족사진까지 넣어가지고 그렇게……. 내가 왜 자기 가족 얼굴까지 알아야 됩니까?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이럽니다. 자기 자랑을 합니다. 내가 명함 받은 거중에 제일 기가 막힌 명함 받은 일이 한번 있습니다. 명함을 딱 받으니깐 거기에 ‘40일 금식기도 두 번’ 이렇게 썼더라고요. 이 명함을 내 놓고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거 참 세상이 이상한 세상이 됐어요. 이게 다 자기 PR이거든요. 우리 내 물건 팔기 위해서 상품 가치를 높이던 그런 솜씨로 자기얼굴을 자기 명예, 자기지식, 자기능력을 크게 자랑하고 어느 사이에 거의 다 병들었어요. 그만……. 이걸 알아야 되고요.

또 하나는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순종을 거부합니다. 무슨 말을 하면은 그건 당신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다르다 이거야……. 남편과 아내도 그건 다르다 개성이다 이런 얘기……, 자식과 부모 간에도 세대차이니 뭐니 하지만 개성이다 개성, 개성을 내 세우면서 영 순종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런 동안에 모든 인간성이 파괴되고, 질서가 파괴되고 세상이 이렇게 힘들어지지 않습니까? 정말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말았어요. 겸손이 없어요. 겸비의 덕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은근한 그 겸비의 덕이 사라져가는 그런 슬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십시오. 여기에는 엄청난 진리가 있습니다. 이거는 놀라움입니다. 두고두고 생각해야 될 깊은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동의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는데 유월절에 올라가서 모름지기 두 가지 행사만 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고 또 얼마동안 몇 년 더 계시면서 구원사역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상황 해석을 합니다. 그게 뭐냐……. 나귀타고 입성한 겁니다. 이건 정치적인 오해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가 통제하는 사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절대로 어떤 행사나 집회나 운동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왕의 대관식을 하겠다니 이게 됩니까? 이 이벤트, 이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이스라엘사람들의 풍속에 따라서 왕의 대관식 행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나귀를 타고 올라갔으니 이 무사하겠어요? 여기에 문제가 있고요.

또 하나는 예수살렘 성전을 깨끗이 한 겁니다. 이건 정면충돌 한 것이에요. 이 두 사건을 들어서 젊은 신학자들 말하기 좋아하는 젊은 신학자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 죽여라……. 나 죽여라 한거나 마찬가지다 이거에요. 나 죽여라 한거와 다른 게 뭔가요. 지금 죽이기로 결정하고 가야바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그 소굴을 찾아들어가서 성전을 깨끗이 하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어찌하여 광동의 굴을 만들었느냐 채찍으로 내 몰았어요. 이건 무슨 일 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했다고 해서 성전이 깨끗해 졌습니까? 모르는 게 낮지만 다음날 장사 또 했을 거요. 안 그렇습니까?……. 이 행사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나귀를 타고 올라간다고 왕이 될 것도 아니요. 성전을 깨끗이 했다고 성전이 영영 깨끗해 지는 것도 아니요. 왜 이런 행사를 한 것 입니까? 이 이벤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 이 위험한 일 오해가 많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했습니다. 왜요? 그는 왕이시기 때문에……. 왕 되심, 주 되심 로드쉽을 여기서 계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정정당당하게 나귀를 타고 호산나 만세 소리를 들어가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려주일의 의미올시다. 그런데 나귀를 탔습니다. 나귀 새끼를 탔다……. 성경은 구약신약을 비롯해서 증거 합니다. 이건 겸손의 증거라고요.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탔어요. 왜? 말을 타지 않고 왜? 백마를 타지 않고 ? 마차를 타지 않고 나귀 새끼를 탔느냐……. 그것은 바로 겸손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겸손과 왕권에 아주 오묘한 조화와 긴장관계를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건 상징적이며 그 속에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권세, 참 권세는 바로 겸손에서부터 오는 것이에요. 심리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특별히 신앙적으로는 모든 권세는 겸손한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교만한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권능을 주신다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겸손이 권세에 뿌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혹 어떤 시험에 빠진 일이 있습니까? 그 자체를 놓고 생각하지 말고 깊이 자기 자신을 자성해 보세요. 그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라고 벌써 1장 14절에서 말합니다. 사람들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가 가진 욕심 때문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욕심 때문에 질투가 나오고 번민이 나오고 사건이 생기고 시험에 빠졌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하고, 또 한 가지 우리가 부끄러울 일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비겁해 질 때도 있습니다. 왜 비겁해 졌냐고요? 그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뿌리가 없는 나무입니다. 그건 허세올시다. 그런 거로 시험에 빠지게……. 부끄러워집니다. 겸손한자는 부끄러울 일이 없어요. 교만한거 만큼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고 나약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문제는 나도 스스로 내가 교만하다는 걸 모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그리고 잘 참을 수 있습니까? 그 참는 인내의 힘은 겸손에서 오는 거예요. 겸손한자만이 참을 수 있어요. 참지 못했다면 누구든지 교만한 사람이에요. 결국은 겸손하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또 겸손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소망이 있어요. 소망이 있으면 겸손할 수 있어요. 소망 없는 겸손이라면 그건 비굴함 이에요. 그건 비참한 것이에요. 절망이에요. 그러나 소망이 든든합니다. 앞이 보입니다. 미래가 보입니다. 영원한 세계가 보입니다. 그러면 넉넉하게 참을 수 있습니다. 겸손 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겸손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지 않으니깐요.

자 이제 오늘 이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겸손하셨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체를 맡기고 저 앞에 있는 구속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오늘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올라갑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말던 예수님을 왕권을 이렇게 쉬이 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은 사울 왕이 스스로 낮출 때에 높이어 왕이 되게 했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교만하고 기념비를 세울 때 그를 내려쳤습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다윗을 세워 왕을 세웁니다. 우리는 다윗의 일생을 통해서 겸손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무척이나 기뻐 하셨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은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탔다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길에 복종하는 바로 그 길에 겸손이 있는 겁니다. 겸손은 죄와 타협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불의 앞에 비굴해 지는 게 아니에요. 당당함을 말해요. 주님만 생각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그리고 여유를 가집니다. 그게 바로 겸손이올시다. 보세요. 빌립보서는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스스로 비웠다. 에케로센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empty라고 합니다. 비었다……. 보세요, 아나 모르는 것처럼 할 수 있으나 할 수 없는 것처럼, 할말이 많아요. 그러나 할 말 없는 것처럼 또 있어요. 얼마든지 의인이에요. 의로 주장할 수 있어요. 그러나 죄인인 것처럼 마치 저주받은 자인 것처럼 말없이 십자가를 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죽습니다. 이것이 겸손이에요.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는 말합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여러분 얼마나 겸손해 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깊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섭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을 바라봅니다. 그 겸손과 온유 속에 엄청난 용기가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는 용기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나귀를 타고 올라가신 거예요. 보세요, 십자가를 넘어서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용기가 있었던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고요. 또 한 가지는 많은 비난과 오해를 극복하고 있었어요. 참 오해가 많죠. 나귀를 타고 입성하면 로마 사람들은 정치 운동으로 몰아서 유태인의 왕이라고 죽일 거 아닙니까? 이런 위험함이 있지만도 계이치 않았어요. 특별히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오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에 모름지기 예수님이 꼭 왕이 될 줄로 믿고, 왕이 되면 한자리 하겠다고 떠났거든요. 우편 좌편을 가리면서 까지 그러던 통에 나귀를 딱 타고 올라가니까 ‘아이쿠 됐다. 이제는 때가 됐구나.’ 그리고 만세를 부릅니다. 이제 왕이 되는 줄 알고 만세를 부릅니다. 세속적인 왕이 되는 줄 알고 만세를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의 오해 예수님 계이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혹 여러 가지 비난을 듣습니까? 그거 다 면하려고 안 들으려고 한다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제가 제 어른이 제게 늘 가르쳐 준 말씀이 있어요. ‘소가 없으면 외양간이 깨끗하단다.’ 그렇죠. 소가 없으면 깨끗하지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죠.

  * 이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불가에서 하는 말입니다마는 어떤 사람이 아침에 세수를 했어요. 이 사람은 물이 아까워서 그걸로 발도 씻었어요. 그리고 이물을 버리려고 가지고 나와서 화단에다 버리려고 하니깐 그게 푸릇푸릇하게 풀이 꽃이 올라오는데 아이고 거기다 부으면 안 되겠어요. 그래서 여기다 부으려고 하니깐 또 지렁이가 지나가요. 아이고, 안되겠구나. 이러고 보니깐 또 개미가 있어요. 개미한테 부으면 홍수 났다고 하겠구나. 안되겠구나. 이거 들고 다니다가 마셔버렸구나. 여러분 이리 비키고 저리 신경 쓰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여러분 오해 받지 않고 되는 일 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정정당당하게 이것이 주의 길이라면 그것이 겸손이요. 그리고 겸손에서 오는 용기 오해가 있던 없던 누가 뭐라고 하던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올라가십니다. 그 심정은 예수님만 압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왜 이러해야 하는지를……. 그러한 고독함을 극복하고 나귀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릅니다. 제자들의 찬송 어린이의 찬송 다 불안전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래도 그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정신 차리고 불러라~! 뜻이나 알고 소리지르냐~!”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어요. 이게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받고 그걸 방해하는 사람에게 돌이라도 노랠 할 것이다. 어린이의 찬송을 온전케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찬송을 기쁘게 수용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참 유감스러운 것은 이렇게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 무서운 사람들이 고관들이 나와 가지고 “YOU~! 누구요~! 누구들이 이 짓을 하노?” 하고 물을 때 거기서 당당하게 베드로가 나서서 “메시야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이거 누군가 말했는가 보니깐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들입니다.” 해석을 좀 붙이면 ‘촌사람들 여기 와서 퍼레이드를 하는데 좀 봐주구려.’ 그런 얘기입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요.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가 무슨 소리에요 이게?!! 만왕의 왕이 지금 대관식을 하는 순간인데요. 자 우리의 부족한 찬송을 거룩히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게 뭡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종교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자를 말합니다.

As the Lord as my lord 내 주로 고백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주께 충성을 다해야 겠죠?

옛날에 로마에서 기독교가 핍박을 받을 때에 로마 정부는 이런 인사법을 유행 시켰다고 합니다. 누구나 만나게 되면 “가이사는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게 인사하라고 그랬어요. 굿모닝이 아니고 ‘가이사는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할 때 대답하는 사람이 “그렇죠. 가이사가 우리의 주인이시죠.” 대답하게 했어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거기서 색출 됩니다. 가이사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럴 때, “아니오. 예수님이 우리 주인이십니다.” 그러면 바로 끌려서 원형극장으로 가서 순교 당했습니다. 그 한 마디에 예수가 나의 주인이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기다 우리 생명을 거는 거요. 목숨을 거는 겁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폴투니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The Secret‘ 이라 하는 책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삼단계로 말하고 있어요. 첫째는 물러서는 단계, 자기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고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만 깨닫고 하나님의 진리만 배우겠다는 거요. 객관적으로 이해하겠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는 게 없어요. 또 하나는 상호 관계적 단계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내 의로 하나님께 나가겠다. 그래서는 어떤 건 이해하면 좋고 이해 안 되면 반대하고 이해되는 건 순종하고 이해 안 되는 건 거역하고 실리를 계산해가면서 사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어요. 또 하나는 소통의 단계요. 무조건 들어요. 그리고 믿어요. 이해 되는 것도 믿고 이해 안 되는 것도 믿어요. 왜? 주는 나를 사랑하시니까. 그가 나를 사랑함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내가 믿기 때문에 범사에 주의 하시는 일을 다 그대로 수용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자기 생명을 위탁한거예요.

여러분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올라가신 일은 상징적이고 계시적이고 해학적이고 어찌 생각하면 아주 유머러스하기도 합니다. 내게 이 같은 겸손이 있는가!……. 내게 이 같은 용기가 있는가. 내게 이 같은 충성이 있는가. 다시 한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고 그 겸손 그 용기로 행하면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를 섬긴다하나 주의 뜻을 받기를 거부하고 주님을 믿는다 하나 부분적으로 믿고 내 뜻에 반대되는데 대해서는 불평이 많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께서 나귀를 타고 올라가시는 그 깊은 심정을 우리가 헤아리고 우리 또한 충성을 다하는 중에 주님을 영화롭게 할뿐더러 주의 고난에 동참하고 동시에 그의 영광에 함께 할 수 있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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