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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 / 행 10: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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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 
본문 : 사도행전 10:39-43   


나는 관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관 뚜껑까지도 닫아 보았다. 나를 관에 넣어서 몇 사람이 그 관을 들고 무덤으로 나가는 경험도 해 봤다. 여러분은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다. 꾀 오래 전에 우리 교회에서 운동회를 했는데 운동회 중에 성경에 나타난 사건으로 가장행렬이 있었다. 그 때에 나인성으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실 때에 장례 행렬을 만난다. 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 장례를 치르러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행렬을 보시고 발 걸음을 멈추어 그 관에 손을 대시고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살아나는 사건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연출해 보았고, 내가 바로 죽은 아들이 되어서 관속에 들어간 것이다.

불과 몇 분 동안 관속에 있어봤지만 그 때의 경험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데로 끝이 났다면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 것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 된다면 힘있는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아서 더 많은 쾌락을 누리며 살 것이고, 살다가 힘들고 지치면 살기 싫은 마음 때문에 쉽게 자살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우리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기쁨도 없고, 보람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죽음이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예수 부활 나의 부활, 예수 생명 나의 생명임을 확신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사과나무에는 수 천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그 열매 그대로 열린다. 배나무도 마찬가지고, 감나무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게 되는 줄로 믿는다. 내가 분명히 예언하는 것은 사과나무에서 계속해서 사과가 열린다. 배나무에서는 계속해서 배가 열린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 연결될 때에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하는 내용이다. 설교의 내용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고, 우리를 택하사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누구든지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는 죄 용서함을 받는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복음의 핵심이다.

이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분명한 진리는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의 사건이다. 고난은 죄를 씻는다. 지우개는 연필을 지우지만 눈물은 마음을 씻는다. 예수님의 고난은 곧 우리의 죄를 위함이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믿는다. 부활은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의 사건이다.

율법을 통해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깊은 산골에서 사회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이 문명의 세계로 내려왔다고 가정해 보라. 이 사람은 신호등이 뭔지, 휴지를 어디에 버려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빨간 불에 건너가도 전혀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도 죄책감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운전하다가 실수로 신호 위반이라도 하면 혹시 경찰이 보지는 않았는가? 조급한 마음이 생긴다. 이같이 법은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한다.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 임을 깨닫게 한다.

그런데 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이다. 하나는 죄의 값을 치루는 것이다. 지은 죄만큼 벌을 받는 것이다. 벌금을 내든지, 옥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죄의 값은 사망이다. 죄 지은 결과는 죽음으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두 번째의 방법은 용서받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 썼는데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그러면 못 갚는 대신 죄의 값을 치루든지, 아니면 용서해 줘서 탕감 받는 길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외치신 말씀 중에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지불을 완료했다는 뜻이다. 내가 너희의 죄 값을 모두 지불했다는 예수님의 외침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의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내가 지은 모든 죄가 해결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죄지은 사람과 용서받은 사람에게 큰 차이가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유가 없다. 마음 데로 다닐 수도 없고 숨어다니고, 옥에 갇혀야 하는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용서받은 사람은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본문의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용서받는 다는 것은 속박에서부터 참된 자유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용서받아야 속박이 풀어진다.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 나사로가 죽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오는데 손과 발, 온 몸이 베로 꽁꽁 묶여 있었다. 마음 데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향하여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속박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의 사건이요,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수님께서 돌무덤에 묻히셨다. 돌로 문을 만들고, 인봉을 치고, 로마 병정이 지켰지만 이 모든 것이 헛수고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로마 정부가 막으려고 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인봉을 치고, 지켰지만 모두가 헛수고이었다. 로마 정부가 억눌러도 예수의 부활을 막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여러분을 억압하고 있는가? 무엇이 여러분을 억누르고 있는가? 예수 부활의 사건은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의 사건이요,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이다. 이 세상에 어떤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이다.

스펄전 목사가 어느 날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고 있는 불량소년을 보았다. “그 새를 어떻게 하려고 하니 새가 너무 불쌍하지 않니?” 그 소년은 괴롭히다가 죽일 거예오. 스펄전은 그 새를 2 파운드에 주고 사서 멀리 나려 보냈다. 마귀는 우리를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부활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게 되었다.

나폴레온 힐이라는 사람은 현대인에게 7가지 불안이나 공포가 있다고 말한다. 가난에 대한 공포, 실패에 대한 불안, 질병에 대한 공포, 사랑을 잃을 거에 대한 공포, 노후에 대한 불안, 자유 상실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셨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모든 사람을 위협하고 억누르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죽는다. 그렇지만 죽음이 우리를 억압하지 못한다.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 뿐 인줄로 믿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죽음의 공포와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다.

지난 주에 새신자 한 분이 돌아가셨다. 43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2월 중순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병색이 짙은 때이었다. 병상에서 세례도 받고, 하나님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죽는 날 까지 주일을 지키고 주님께 가리라. 마지막 순간까지 두 자녀 전도시켜 놓고, 지난 종려주일 지키고 월요일에 소천하였다. 그런데 이 분이 죽어갈 때에 어느 집사님이 십자가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굳게 붙잡았다. 죽은 후에 그의 손을 펴보니 십자가 자욱이 손 바닥에 남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는 힘이다.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하신다.
죽음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실패에 대한 불안을 갖고 살기도 한다. 이러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는가? 어떤 분은 실제로 실패하여 패배의식 속에 사로잡혀있는 자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실패한다. 나름 데로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실패로 인하여 아주 끝났다고 생각하여 패배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안되,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끝났어, 내가 이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어, 나는 실패했다. 나는 패배했다는 생각의 속박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의 부활은 그러한 패배의식의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

우리 주변을 보라. 잘못된 우상에 속박되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컴퓨터 세대라 해도 운세에 하루를 맡기며 사는 젊은이들도 많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용서받은 참된 자유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 예수부활을 통해서 내가 용서 받고, 나의 삶에 참된 자유가 있음을 전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의 사건은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의 사건이다. 온 인류를 향한 용서의 사건이다.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의 사건이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나에게 참된 자유를 주셨음을 확신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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