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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로 가는 길 / 막 14: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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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가는 길
마가복음 14:32-42


    영국 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웨일즈 영적 대각성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유명한 케직 사경회를 이끌었던 제시펜 루이스가 말하기를 십자가는 세상 역사의 중심축이라고 했습니다. 앞선 모든 역사가 십자가를 향하고 있고, 십자가  후의 모든 역사도 십자가를 통해 풀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하나하나의 사건마다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모습 속에 사실 십자가의 더 많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자 하셨을까요? 그것을 묵상하면서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십자가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 시간을 갖는 장면이 나옵니다. 단순한 교제가 아닙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표현에는 평소 아버지와 교제해왔고 소원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친밀감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 이번 일은 정말 어려운데 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너무 괴로워요. 아버지…….’ 그 괴로움이 얼마나 간절하고 안타까웠는지 흘리는 눈물에 피가 섞여 있습니다. 흘리는 땀이 피가 되어 땅바닥에 쏟아질 정도로 애절하고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간구를 외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종종 멀리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이렇게 상상해봅시다.

저는 생각보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딸이 여섯 살이라 한참 아빠가 필요할 나이지만, 교회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시기에 있기에 딸과의 시간은 잠깐뿐입니다. “아빠! 어디가?” “아빠, 교회 가야 돼.” “아빠, 안가면 안돼? 안가면 안돼…….” 딸아이의 눈빛을 보면 도무지 뿌리칠 수 없습니다. “아빠! 가지 말고 나랑 놀아! 아빠는 맨날 나가잖아. 나하고 놀아.” 그런데도 그 딸을 뿌리치고 교회 나오는 제 마음은 내내 무겁습니다. 그 눈동자와 표정, 음성이 계속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아빠! 나하고 좀 놀아줘.’ 하며 간청하는 딸을 뿌리치고 나오는 제 마음을 여러분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간절하고 애절한 상황입니다. 간청하는 아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혈관이 터져 피눈물이 되어 나옵니다. ‘아빠, 피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아들이 당할 고통과 죽음을 감내하고서라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요한은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도다” 증거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는 것은 울부짖는 아들의 간구를 외면하시기까지,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을 바울은 로마서 5장 6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는 구원받을 만한 가치와 이유가 전혀 없는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확증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사랑하는 아들의 소리를 외면하며 구원하시기까지 하신 사랑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의 멸망과 죽음, 눈물을 주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퍼레이드라는 잡지에서 라메사 교도소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멕시코의 라메사 교도소는 흉악한 범죄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곳에는 ‘그리토’라는 의식이 있는데 이 의식과 함께 한분의 수녀님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죄수들이 오면 오십 명의 교도관들이 총을 장전하고 양쪽으로 섭니다. 줄지어 선 복판을 차례로 지나면서 교도관에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이름, 나이, 죄목, 형기를 무려 오십 번을 반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십 번을 반복하고 나면 내가 누구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져 낙담과 절망, 괴로움을 느끼고 마지막 오십 번째 가서는 괴성을 지르고 땅바닥에 쓰러져 버릴 정도로 완전히 지쳐버린다고 합니다. 그 때에 한 수녀가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흉악한 죄수의 머리와 이마를 만지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여보세요. 실망하지 마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당신처럼 죄수였습니다. 자, 이 빵과 포도주를 받으십시오. 당신의 허물과 당신의 눈물과 당신의 아픔과 당신의 후회를 잘 아는 분의 살과 피입니다.” 수녀님의 말씀과 함께 빵과 포도주가 죄수들에게 전해질 때 죄수들은 한없이 흐느낀다고 합니다. 스스로 포기했던 인생, 그러나 이 한마디에 어릴 때 만났던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새롭게 자신의 삶을 다진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아는 사랑이었습니다. 눈물을 아시고 탄식도 아십니다. 우리의 후회도 아시고 허물도 아십니다. 아들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면서 죄인 된 자로 가치 없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받아주십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고 계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죄인 된 우리가 치렀어야 할 모습과 우리가 받았어야 할 저주를 보여줍니다. 41절과 42절 말씀을 보면 ‘세 번째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부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종말은 같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자의 종말을 십자가는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습니다. 움직이지 못합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눌러 씌웁니다. 옆구리는 창으로 찌릅립니다. 채찍 끝에는 납이 달려 있어서 채찍이 내려칠 때면 살점이 찢겨나갑니다. 또 채찍 중간 중간에는 동물의 뼈를 달아두었기에 동물의 뼈에 의해 살점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 있습니다. 단번에 죽지 않고 육체적으로 겪는 모든 고통을 다 겪어야만 하는 십자가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암 때문에 고통당하며 세상을 떠나는 사람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정신은 말짱한데 죽는 순간까지 여러 개의 호스를 꽂고 울부짖는 환자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인생의 종말이 그렇게 비참하다면 오늘 내는 우리의 열심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인생 중에 육체적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다 고통스럽게 가는 우리의 종말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단순히 인간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고, 심적인 고통도 포함합니다. 대부분의 십자가상을 그리고 있는 그림은 약간의 천으로 예수님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옷을 다 벗겼다고 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있어서 그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외면합니다. 아버지로부터 공급받지도 못합니다. 외롭게 혼자 서야 합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심한 모멸감과 단절의 아픔을 겪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떨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고독이 아닐까요? 때로는 순간순간 찾아오는 견디기 어려운 모멸감이 아니겠습니까? 잊혀져서 그렇지 견딜 수 없던 절망과 좌절이 우리 가슴 속을 가득 채울 때가 아니던가요? 이것이 인생입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는 우리가 종국에 가서 받을 영적 저주를 보여줍니다. 죄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요한계시록 21장 8절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육체적인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 심판 후에는 영원한 형벌과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원한 형벌과 지옥은 죄인이었던 저와 여러분의 본래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볼 때 우리의 종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종말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것인지 알고 감사드립니다. 바울은 선포합니다. “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멸망을 십자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구속의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만약에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을 묻는다면 각각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경험을 통틀어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예수님 십자가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지기 어려웠습니다. 견디기 힘들고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셋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처음으로 마음의 생각을 이야기 하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앞에 있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 마음이 너무 고민스러워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짊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런 무거운 짐을 질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때, 지치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하나님으로부터 이길 힘을 공급받기로 선택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교제 시간을 갖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힘 주시길 원합니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뜻은 죽고 하나님 뜻이 살아나게 하시고 내가 죽어서라도 하나님 뜻이 살아난다면 피하고 싶은 이 마음을 이기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능히 감당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위로부터 오는 응답을 받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자신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피하고 싶었던 십자가, 감당할 수 없겠다고 포기했던 십자가였으나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고 주님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 뜻에 순종한 예수님의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인해 고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가운데서 어떻게 이겨내기 원하십니까?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원하십니다. 인생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기 원하십니다. 지치고 감당할 수 없는 일 앞에 낙심하여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도움 받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저와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겟세마네동산의 기간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지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삶이 당할 시험, 이 민족 앞에 놓인 시험을 두고 해야 할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도우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 때에야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일도 능히 이기며 나아갈 수 있음을 십자가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어느 유명한 선생님 밑에 여러 명의 제자가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정말 형편없는 제자가 한명 있었는데, 학문을 위해서라기보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불쌍해서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 제자는 분위기를 자주 깨뜨리곤 했습니다. 말썽을 일으키고 공공연하게 선생님을 욕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결정적으로 떠나야 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보다 오히려 다른 제자들이 그 제자를 좇아내지 않으면 자신들이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 때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밑이 깨어진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으라고 했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자기 배 위에 항아리를 놓고 물을 담아보기도 했지만 무게에 눌려 채울수 없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밑이 깨진 항아리를 물로 가득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포기할 때 선생님은 마침내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연못에 던지자마자 깨어진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가 항아리는 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선생님의 뜻을 알고 자신들의 생각을 돌이켰습니다. 그 날 밤 말썽 많던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왜 저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거예요?” 선생님이 되묻습니다. “낮에 깨어진 항아리가 어떻게 물이 채워졌느냐?” “예, 연못에 던질 때 깨어진 항아리가 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나는 깨어진 항아리 같은 너를 내 마음에 던졌단다.”

여러분! 이 이야기 속에서 깨어진 항아리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자신은 아닙니까?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잔입니까? 그러나 다시 한번 잘 들여다보십시오. 깨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최선을 다해 달려왔지만, 그동안 거두고 남긴 것은 무엇입니까? 내 가정은 온전합니까? 내 꿈과 계획은 어떻습니까? 소망이 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담겨있지 못합니까? 지금 여러분이 당하는 어려움 앞에 어려움을 이길 소망이 공급되고 있습니까? 사랑하며 살기로 했지만 맡겨진 자녀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깨어진 항아리이기에, 채워도 채워도 이 세상 어떤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있기에 주님은 십자가 보혈의 연못에 우리를 던졌습니다. 나도 포기한 나를 주님은 포기치 않고 주님의 사랑과 보혈의 연못에 던져 다시 품으셨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았다면 나의 운명이 될 뻔한 비참함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어려운 일 만날 때 인생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길 힘 얻기를 간구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십자가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오늘 보혈의 십자가 연못으로 우리를 던지십니다. 내 인생을 만족케 하시고 채워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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