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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부활해야 할 4가지 / 눅 24: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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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부활해야 할 4가지
(눅 24:36-43)

<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삽니다. 어떤 사람은 강하게 보이고 대단하게 보이지만 그분들도 다 연약한 인간입니다. 어떤 분은 이상하게 생긴 것은 다 신령한 줄 압니다. 나무가 조금 이상하게 생기면 절을 하고, 돌이 조금 이상하게 생기면 절을 합니다. 사람도 이상한 말을 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 더 신령한 줄 압니다. 어떤 분은 죽은 조상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런 모습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믿지 않으면 한시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잘 나타내줍니다.

어떤 흉악한 사형수는 사형을 받으러 가다가 발을 헛디뎌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놀랬네! 죽는 줄 알았네!" 강한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강하다!"고 믿으면 진리는 결코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약하다!"고 믿으면 진리는 조금 더 가까이 옵니다. 더 나아가 "내가 죽는다!"고 믿으면 진리는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철학 교수님 앞에서는 죄송한 말이지만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정말 믿으면 우리는 반쯤은 철학자가 됩니다.

<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

우리는 스스로 연약한 존재인 줄 알아야 합니다. 연약한 인간에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1) 첫째, 믿음이 없으면 마음의 평화가 없어집니다.

본문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이 말씀을 보면 그때 제자들은 극도로 불안감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있던 예루살렘에 마가 다락방 문을 꼭 잠그고 숨어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활만 바라보지만 부활이 있기 전에 꼭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진짜 부활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가치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영혼을 죽이는 유혹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헌신과 섬김이 없이 높은 신앙을 가지고, 영성이 깊어지고, 능력이 생기고, 영안이 열리고, 말씀을 보는 눈이 열린다고 하는 것은 다 이단들이 그 영혼을 유혹하기 위해서 내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 교회는 놔두고 월요일에 큐티 집회를 가고, 화요일에 영성 집회를 가고, 수요일에 간증 집회를 가고, 목요일에 찬양 집회를 가고, 금요일에 평신도 성경대학에 가고, 토요일에 기도 세미나에 갑니다. 그렇게 해서 과연 영안이 열리고, 영성이 깊어질까요? 그렇게 집회에 많이 참석해도 내 교회에 벽돌 한 장 쌓지 않고, 걸레질 한번 안하고, 설거지 한번 안한다면 그것은 깊은 영성이 아니라 천박한 모습일 뿐입니다.

왜 사람들이 영성이 없습니까? 왜 사람들이 능력이 없습니까? 왜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까?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으니까 욕심만 부리고, 질투만 하고, 짜증만 내는 것입니다. 진정 마음에 평화를 원한다면 이제는 수고의 짐을 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만 확고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부활의 믿음을 주실 것이고,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의 평안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2) 둘째, 믿음이 없으면 놀람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위로를 하시는데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할렐루야! 주님 부활하셨군요!"라고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무서워합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까?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이런! 믿음도 없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진들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두려워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다윗도 두려워서 미친 척 하는 쇼를 벌인 적도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일본 고등계 형사가 닥쳤을 때 처음에는 도망가려고 몸을 숨기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고 합니다. 만약 그들이 항상 완벽하게 살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해 더욱 절망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약합니다. 누가 누구를 감히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믿음을 주신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3) 셋째, 믿음이 없으면 판단력이 흐려지게 됩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사람이 믿음을 잃고 낙심에 빠지면 이렇게 판단력을 잃어버립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그런데 조금 어려움에 빠지면 말씀을 죽은 문자로 생각하고 믿음을 다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낙심에 빠집니다. "나는 아닌가 봐!" 왜 아닙니까? 나의 부족함과 나의 연약함과 나의 실패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사랑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 있고, 계획이 있고, 비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희망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심함,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불신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이제 더욱 담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나를 보고, 주님 안에서 나의 앞날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요새 믿음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요새 믿음의 반대말은 돈입니다. 살기가 어려우면 사람들이 돈을 믿으려고 합니다. 돈이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살기 어려워도 정신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

그처럼 불안해하고, 떨고 두려워하고, 판단력이 흐려진 제자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보시고 주님께서 부활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38-3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그러면서 주님은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너무 상심해서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 기뻐도 문제입니다. 본문 41절 말씀은 제자들이 너무 기뻐서 오히려 믿지 못하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믿지 못합니까? 그래서 주님은 먹을 것을 찾으시고,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까 그들 앞에서 그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2천년 전에 주님은 확실히 부활하셨습니다.

거짓은 아무리 사소한 거짓말도 대개 드러납니다. 오늘날 국내 정치를 보십시오. 그 머리 좋은 보좌관들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은밀하게 주고받은 돈 가방까지도 몇 년 후에 드러납니다. 완전범죄를 꾸몄던 IQ 150이상의 머리 좋은 닉슨의 보좌관도 워터게이트 사건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대 사건을 IQ 100도 안될 것 같은 주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거짓으로 꾸며대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주님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2천년 전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죽으면 언젠가 그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병원에 가서 '수면 내시경'을 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정말 잠이 들까? 이대로 완전히 잠이 드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하지! 가족은 어떻게 하지!" 잠깐 생각하다가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2시간 후에 정확히 수면에서 깨어났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수면 내시경을 끝낸 후에 다시 깨어나는 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일 것입니다.

< 우리의 삶에서 부활시켜야 할 것 >

2천년 전에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으면 우리도 분명히 부활할 것입니다. 과거의 부활도 있고, 미래의 부활도 있지만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에서 부활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부활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4가지의 부활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1. 첫째,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점점 신앙이 죽어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분들이 아니십니까? 지금 돈을 벌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습니까? 그러나 신앙의 부활을 위해서 더욱 애써야 합니다. 성공을 위해서도 얼마나 애쓰십니까? 역시 신앙의 부활을 위해서 더욱 애써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얼마나 애쓰십니까? 그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부활을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아무리 화려한 성공을 해도 불쌍한 인생일 뿐입니다.

요새 강남 재건축 분양권 따려고 몇십 대 일의 경쟁을 벌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소중한 천국의 집에 관심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때로 어려운 일이 있어도 신앙이 있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뒤집기의 명수가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으면 우리는 실패를 성공으로 뒤집을 수 있고, 불행을 행복으로 뒤집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마음 문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마음 문을 열지 않으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와도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없습니다. 마음 문을 닫고 "어디 한번 나에게 은혜를 끼쳐 보라!"고 하면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을 전해도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만나주십니다.

2. 둘째, 우리는 우리의 첫 사랑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마가복음 16장 7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다 도망간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사람이냐! 어려울 때 다 도망가냐? 왜 이렇게 성숙하지 못했느냐?" 하지 않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변함이 없고, 절대적인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갈릴리는 주님이 제자들과 첫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비전을 받았던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사랑을 부활시키고 나가자는 주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이 부활절에 우리의 첫 사랑을 부활시키고, 우리의 비전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고, 다시 한번 공동체 정신을 가다듬고 새롭게 출발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갈릴리가 있었습니다. 4년여 전에 처음 몇 사람이 비전을 가지고 모였던 제가 살던 분당구 정자동 139-7번지의 조그만 집입니다. 그때 우리는 돈이 십 원도 없었습니다. 저의 통장은 바닥이 났고, 제가 살던 집은 얼마 후에 비워주었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꿈을 키웠습니다. 그 당시는 든든한 인적, 물적 배경이 없이 교회를 개척해서 그런 배경이 있는 교회를 부러워한 적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배경이 없었기에 첫 사랑은 더욱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품었던 첫 사랑을 부활시키고, 그때 품었던 소중한 비전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추억을 만들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회가 있으면 잘 포착해야 합니다. 주님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마리아는 결혼비용으로 쓰려고 푼푼이 저축한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려 주님에게 부어드렸습니다. 그냥 향유만 부어드리면 되지 굳이 옥합까지 깨뜨립니까? 이제는 계산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 헌신의 기회를 잘 포착했기에 지금까지 그녀의 아름다운 얘기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전파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 돌아가신 뒤에 향품과 향유를 드려 장사지냈습니다. 비슷한 것을 드렸지만 마리아처럼 주님 돌아가시기 전에 드렸으면 얼마나 그 '드림'이 가치 있었겠습니까?

같은 물질을 드려도 교회 이전을 위해 다급하게 필요할 때 드리는 것은 교회 이전이 끝나고 안정된 후에 드리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같은 헌신이지만 교회가 꼭 필요로 할 때 드리는 헌신이 훨씬 주님 나라에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기회를 잘 잡으십시오. 헌신의 기회를 잘 잡으십시오. 필요할 때 헌신하면 '사랑의 추억'이 생깁니다. 그 사랑의 추억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소중한 기초석이 될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이 침체하고 소망이 칙칙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첫 사랑의 기억이 믿음과 소망을 회복시키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언제나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 사랑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지금 사랑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고, 최고의 사랑의 헌신을 해보십시오. 그 사랑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오래도록 지켜줄 것입니다.

3. 셋째,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러시아 지방법원의 네플류도프 백작은 어느 날 피고인석에 앉은 한 윤락녀를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녀는 그가 7년 전 그가 임신시키고 내버렸던 어린 하녀 카츄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여관집 주인이 저지른 살인죄 누명으로 쓰고 재판석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애처롭게 호소했지만 결국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네플류도프의 인간성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시베리아로 찾아갑니다. 카츄사를 헌신적으로 돌보며 그녀를 빼내기 위해서 가산을 탕진하고 온갖 오해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연민과 가책으로 시작된 감정은 사랑으로 바뀌고 결국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합니다. 형무소에서 나오던 날, 그녀는 그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고 감옥에서 만난 청년 시몬슨의 손을 잡고 먼 곳으로 떠납니다. 비록 네플류도프는 사랑을 얻지 못했지만 그의 인간성은 부활했습니다.

때로 사람이 실수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모습을 노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양심의 가책이 있다면 주님 앞에 그 인간성을 내어놓고 돌아서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그것을 못했습니다. 그에게도 양심의 가책은 있었지만 그의 인간성은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을 통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의 인간성을 부활시켰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에도 이런 부활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왜 인간성이 침몰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받으려고만 하고 주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는 지지 않고 남에게 십자가만 지우려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상처가 있고 섭섭함이 있고, 불행이 찾아오고, 삶의 의미는 사라지고, 인간성은 점차 침몰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공짜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공짜로 받았다고 공짜 인생을 살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라는 말을 "공짜로!"라는 말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땀은 흘리지 않고, 힘든 일은 하지 않고, 열심히 살지 않고 "믿음으로!" 하면서 살아가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가슴을 치고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어떤 젊은 형제가 어느 날 어떤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는 선교를 나가리라!"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표 하나 달랑 들고 필리핀에 가서 그 선교사님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님은 이 믿음 있는(?) 형제 돌보느라고 상당히 마음이 상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하면 훈련받고, 여러 과정을 거쳐서 철저히 준비하고 나가야지 그런 식으로 나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믿음입니까?

믿는 사람은 남의 짐을 져 주려고 해야 하지 남에게 짐을 지우고 폐를 끼치면서 자기 혼자 믿음이 있다고 도취에 빠지는 무책임한 모습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공짜로 구원받았다고 인생 전체로 공짜로 살아가려는 심보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공짜 인생을 살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 때문에 더 땀을 흘리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부흥은 바라면서, 원하면서, 심지어는 요구하면서 자신은 참여도 하지 않고, 헌신도 하지 않고,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면 어떻게 교회가 부흥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기도문 할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이 땅에서 땀을 흘리고, 이 땅을 변화시키려고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공짜를 너무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공짜 인생은 값싼 인생입니다. 우리는 공짜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짜 인생은 값싼 인생이고 항상 섭섭한 마음이 많이 드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거저 받을 수 있어도 대가를 치르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마음껏 할 줄 아는 삶이 품위 있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그의 믿음은 품위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헷 지역에서 죽었습니다(창 23장). 매장지가 필요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존경했던 헷 족속이 가장 좋은 묘실을 맘대로 쓰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정말 고맙소!" 하고 성큼 받지 않습니다. 그 마음과 은혜가 감사하지만 "내가 대가를 치르겠소!" 하면서 대가를 치르려고 합니다. 그 땅 주인인 에브론은 거듭 안 받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듭 받으라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품위가 있습니까? 믿지 않는 헷 족속이 정말 존경할 만하지 않습니까?

거저 받을 수 있다고 계속 거저 받으려고만 하면 품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거저 받을 수 있어도 대가를 치르면서 받으면 품위가 생기고 품격이 높아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최소한 하나님이 명하신 것만 드리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작 그것뿐이겠습니까? 구원의 은혜가 정작 그것뿐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적선하십니까?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 전체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일부'만 드릴지라도 '전체'를 드린다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대가를 치를 줄 아는 품격 높은 삶이 부활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넷째, 우리는 증인의 삶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잘 사는 비결이 잇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잘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지 못하면 못 사는 것이고, 죽음을 잘 준비하면 잘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묘지를 잘 준비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한 사람 평균 거주면적이 9평인데, 묘지의 평수는 20평이라고 합니다. 무덤이 커질수록 그 사회는 절망이 많다는 말입니다. 죽으면 끝인 줄 아니까 그렇게 무덤을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의가 얼마나 비쌉니까? 비싼 수의는 밍크 코트 하나 값만큼 나갑니다. 그렇게 준비해도 소용없습니다.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은 주님 뜻대로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주님 뜻대로 살다가 죽어 영원히 주님 품에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성공했느냐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내일의 주인공이 되고, 천국의 주인공이 되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똑똑했습니다. 신약성경 3분의 1을 쓸 만큼 똑똑했습니다. 그는 가문도 좋았고, 학력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생 힘들게 살았고, 감옥도 수시로 들락날락 했고, 김 전도사님이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그 좋은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성공했습니다. 불행한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한 목적을 위해서 멋있게 헌신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 되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지만 우리가 이 땅에 남아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자에게 먼저 보이셨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최근에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이 빨라서!"라고 말입니다. 남자들은 아무리 신기한 일을 목격해도 "그래!" 하고 그 다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들 입을 통하면 그런 소식들이 훨씬 빨리 전달되지 않습니까?

오해하지 말고 선하게 해석하십시오. 우리는 부활의 소식을 누구보다도 빨리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는 길이 있고, 치유의 길이 있고, 회복의 길이 있고,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삶과 환경에 대해 입에서 불평만 나오게 하지 말고,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는 평생 기뻐하며 살아야 할 충분한 조건을 다 가진 줄 알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 힘차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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