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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이것을 믿느냐 /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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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 11:17-2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
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
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
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
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
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
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
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
나이다) <요한복음 11:17-27>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사느냐?'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없는 말이 있다면 바로 이 말일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다'고 하는 말은 희망사항 일 뿐, 오늘까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도 부활을 부정하는 가사설(假死說)이 등장했
습니다. 즉 죽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몰래 시체를 옮겨놓고는 다시 살아났다고 퍼뜨렸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설이 있습니다. 이것이 설(說)이 아니라 마태복음 28:12-15절에 그렇
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
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점을 상기시키면서 박해를 앞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롱하
는 자들이 와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일이 어찌 있으리요 하늘이 생긴 이후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기롱하면서 부활신앙을 믿는 우리들을 검거하고 투옥
할 경우가 생길터인즉 끝까지 인내로서 담대하라'(벧후3:1-6)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해(Understanding)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Believing)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것은 바로 이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
냐?에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부활신앙}으로 온갖 박해를 극복했으
며, 이 부활신앙이 있었기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를 와
해시키려 했던 적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이 부활 사건에 관하여 왜곡시키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동안 교회는 이 부활 신앙 위에 튼
튼히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문제입니다.
선진 유럽사회에서 보면 오늘의 부활신앙이 점점 퇴색 되어감을 보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활을 이념적(理念的), 사상적(思想的) 부활(復活)로 믿고 있습니다.
부활을 기독교 교리(敎理)로만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믿느냐? 안 믿느냐?가 아니라 '그저그렇다고 하더라'는 식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확신이 없습니다.
확신 없는 신앙이기에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지 못하고, 부패해지는 사회 속에
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퍽 의미심장한 물음이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던 가정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
었습니다.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좀 빨리 와주기를 바랬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3,4일 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
오심을 내심으로는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온다는 말을 듣고도 마리
아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마르다가 나와 맞으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라고 한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
다.

이때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마르다가 하는 말이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하
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님께서 오늘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
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1. '네가 이것을 믿느냐'는 것은 '부활'을 믿느냐라는 물음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즉 죽음 앞에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죽음은 현실입니다.
죽음이란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좌절합니다. 슬퍼하고, 낙심하고, 비관하
고, 절망합니다.
어느 젊은 여인의 남편 무덤에 새겨진 비문에서 애틋한 글을 보았습니다.

"봄이 온들 무엇하랴, 꽃이 핀들 무엇하랴.
한번 간 님은 말이 없는데...
민들레도 봄이면 다시 살아나고,
개나리도 봄이면 다시 피는데
여보!... 난 어쩌라구 당신만 가버렸소.
한 많은 세월 눈물이 강 되어 구비 구비 흘러도 님 향한  마음 변치 않으
리..."
봄이 오는 계절에.....당신의 사랑하는 아내

이렇게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도 눈물로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
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오늘 '네가 그것을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부활신앙을 믿느냐?' 라는 데 있습니
다. 만일 이 질문에 분명치 않다면 예수님의 바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신앙입니
다. 오늘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실한 부활 신앙고백이 없는 것은 그만
큼 초대교회의 신자들의 신앙과는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네가 이것을 믿느냐'는 것은 '몸의 부활'을 믿느냐라는 물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나도 그대로 믿는다고 늘 예배 때 마다 암송
하고 있습니다. 문자적인 신앙고백의 부활은 다 믿는다고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이 <몸>(Physical Body)의 부활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입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는 살아날 줄 아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알고 있는 것>과 그렇게 <믿고 사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관하여 다 알고는 있습니다.
지식(Knowledge)으로서의 부활신앙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아닙니다. 그저 막연하게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아마 그럴지 모른다는 그런식의 부활 신앙입니
다.
그러기에 그런 신앙 생활에는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모두 벌벌 떨면서 절망합니다.
그래서 믿던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 주를 배신하고 떠나갑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왜 강했습니까?
세상권세 앞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몸이 다시 산다>는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떤 모습들입니까?
모두 현실과 타협된 신앙들입니다.
모두 물질과 세상영광에 영합된 신앙생활들입니다. 거기에는 몸이 다시 산다는
신앙은 희미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세상의 영광을 누리면서 살겠다는 그런 신앙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영광일세'
찬송은 다 부릅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 십자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모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맛 잃은 소금이 되었습니다.
부패한 사회를 막을 길이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문제들입니다.

3. '네가 이것을 믿느냐'는 것은 '영생의 부활'을 믿느냐라는 물음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 안에서의 윤리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다른 종교
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다 윤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영생>의 종교입니
다.
영생(Eternal Life)은 기독교인의 궁극적 신앙의 목표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한국교회의 순교자들의 신앙을 보면 두 가지가 확실했습
니다.
① 첫째는 부활 신앙이었고,
② 둘째는 하나님 나라이었습니다.
이 신앙으로 그 많은 수옥(囚獄)와 고통을 견디어 내었습니다.
죽으면 그만 이라는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죽으면, 더 좋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 나라가 없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몸의 부활 보다 이념(理念)적 부활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막연한 하나님의 주권
(主權)이 시행되는 곳이 곧 천국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
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면서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목적이라고 그
렇게만 주장합니다. 그래서 내세에 대한 신앙보다 현실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
해졌습니다. 그런 결과 모두 오늘의 신자들이 현실의 부귀영화 앞에 머리를 숙
이게 되고, 명예와 돈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처럼 그렇게 우둔하게 믿는 사람이 과거의 신자들이었다면,
현대 지성인들에게 그런 신앙은 통하지 않는다고 그렇게들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그렇게 믿으니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영향력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뭔가 세상 사람들, 즉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된 점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① 술 먹으면 같이 먹고,
② 춤 추자면 같이 추고,
③ 놀음하자면 같이 하고,
④ 뇌물 주면 같이 받아먹고,
⑤ 적당하게 타협하고, 이렇게 하다 보니 통 믿는 사람들에게서 믿는 냄새가 없
어졌다는 말입니다.
그 대신 지독한 역겨움의 냄새들만 피우고 있으니, 이것이 맛 잃은 소금이 아니
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부활절에 다시 한번 깊은 참회와 반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이런 나약해진 자리에서 다시 부활해야 하겠습니다.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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