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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돌을 굴러 주리요 / 막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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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누가 돌을 굴러 주리요
본 문 : 막 16:1-6
설교자 : 변한규목사


오늘은 전국 교회가 지키는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모두의 기쁨이요, 소
망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맨 처음에 목도한 여인들
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곱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등입니다. 주
일 새벽에 여인들이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해서 무덤을 찾아가고 있었습
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걱정거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무덤 돌을 굴려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3)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누가 돌을 굴려주리요',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더더구나 "그 돌이 심히 크
더라"(4) 했습니다. 여기 심히 큰 돌이 무엇입니까? 철학자 사르트르에 의하면 '벽'이요,
문학자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에 해당합니다. 하이데거는 '절망'이라고 했고, 키에르케고
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습니다. '누가 돌을 굴려주리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인생들의 고민입니다. 저마다 인생들이 어쩔 수 없어 하는 무덤 돌입니다.


첫째 고난의 돌

왜 저마다 고난을 만납니까? 왜 낭패를 당하고 실망을 당합니까? 왜 하나님의 백성들도
환난을 당하고 고통과 번민을 해야 합니까? 물론 죄의 값으로 만들어진 고난이 태반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만나는 고난도 많습니다. 기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주신 고난도 있습니
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약 5:13). 또 친히 고난 당
하신 예수님이 누구를 도우신다 했습니까?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
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생각하면 인생은 날 때부터 고난이요, 또 죽을 때
까지 고난이기도 합니다. 인생 즉 고난이랄까요? 그러나 고난은 고난만은 아닙니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만 않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
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누구나 고난을 당하기 일수입니다. 때문에 '누가 고난
의 돌을 굴러주리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아우성이요, 절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
라" 고난 당한 성도가 있습니까? 실패를 만난 성도가 있습니까? 질병으로 고생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말했습니다. "풍랑을 타고 오시는 여
호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우리 곁에 오실 때에 경우에 따라서는 고난을 가지고 오신다
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영혼이 영글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이 무엇입
니까? 아스팔트 걷는 것 같은 생활만은 아닙니다. 겟세마네가 있고,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
도 있습니다. 그러나 '폭풍우 지나간 뒤 맑은 날씨'란 말이 있습니다. 새벽녘이 될 무렵이
면 더 깜깜한 법입니다. 불은 불붙기 전에 더 연기를 많이 냅니다. 환자의 생명을 위해서는
메스로 살을 도려내야 합니다. 엄마가 옥동자를 위해서는 피를 쏟지 않습니까? 밀알은 선반
위에 둘 수만 없습니다. 냉장고에 보관할 수만 없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그래
야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습니다. 가시 없는 장미를 본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 없는
부활도 없습니다. '내 가정은 너무 불운해' 이렇게 마음 가운데 고심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
다. 셰익스피어는 무식한 여인의 몸에 태어났습니다. 베토벤도 그의 어머니는 폐병환자, 그
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습니다. 슈베르트는 어떠했습니까? 그의 아버지는 품팔이꾼이요,
그의 어머니는 어떤 집 하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노래는 인류의 가슴에 감동의 꽃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의 욥은 너무도 고난의 사람입니다.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
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난의 돌을 누가 굴려주셨다는 말입니까?


둘째 죄악의 돌

인생은 어차피 죄입니다. 불의요, 악입니다. 성경이 선언합니다. '인간, 너는 죄인이로
다.' 본래 선하게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보기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악하여졌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죄의 목록이 기록되
어 있는데 얼마나 추한 것들인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고, '의
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옛날 사람들은 죄를 범할 때에 야만인들처럼
죄를 범하였고, 현대인들은 죄를 범할 때, 신사처럼 숙녀처럼 죄를 범합니다. 그러고 네온
속에서, 미래를 사용하면서 죄를 범한다는 말입니다. "그 돌이 심히 크더라"(4). 죄악의 돌
은 모든 사람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돌입니다. 물론 죄는 내가 범합니다.
네가 범합니다. 죄는 사람이 범하지만, 그러나 그 죄를 사람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
빛깔은 주홍같이 붉고, 먹장같이 검습니다. 이 죄악의 돌은 율법으로 어쩔 수 없고, 입산
수도하여 닦은 수양으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다.'
이 범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가
슴을 쥐어뜯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이 죄악의 돌을 굴러주리요' 할 수밖
에 없습니다. 그런데 웬 말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
니"(4). 여인들이 염려하고 걱정했던 무덤 돌이 굴려졌습니다. 돌이 굴려지는 이적이 일어
났습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돌을 굴려놓으신 것입니다. 죽은 시체가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죄악 돌을 누
가 굴려주리요?" 절규하면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모든 죄에서 씻김을 받았습니까?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죄악이 씻기어졌습니까? '내 죄를 어찌할고' 하면서 울고 싶지는 않습니까?
'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인데, 이 죄를 어찌할꼬' 가슴 아파하며 통곡하는 성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우리 모두를 불러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
아 다 내게로 오라" 그래서 지금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부활주일을 지키고 있
습니다. 우리 행실이 깨끗하고 거룩해서입니까? 마음 속에 더러운 죄가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날 인생 없고, 저마다 회칠한 무덤들이고, 두 마음 품은 자들이
아닙니까? 괴테가 "종교인 가운데에 위선자가 많다." 했습니다. 모두 모두에게 오만이 있
고, 외식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것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내가 양심적
이고 신앙적이라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주님,
부끄럽습니다. 괴롭습니다. 냄새도 납니다. 내 죄악의 돌을 굴려주옵소서. 아멘"


셋째 사망의 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
의 절규입니다. 인생은 사망의 몸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그래서 영웅이 죽었고, 호걸이 죽었
습니다. 가인도 죽었고, 제사도 죽었습니다. 우리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얼마 후엔
가 저도 죽을 것이고, 사랑하는 장로님들도 죽을 것이고, 그토록 교회 위해서 봉사 열심히
했던 권사님들도 죽을 것이고, 안수집사님들도 죽을 것입니다. 여기 젊은 청춘, 찬양대원들
도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누가 인생의 죽음 돌을 막을 수 있습니까? 그 돌을 굴릴 수 있습
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모든 사람에게 사망의 돌은 가장 큰 돌입니다. 그래
서 이 돌을 굴려보려고 비타민을 복용합니다. 많은 스포츠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현대를
ABC시대라고 말합니다. atom, bacteria, chemistry를 뜻합니다. 그러나 어떤 화학무기라도
사망의 돌을 굴릴 수는 없습니다. 이라크를 박살낸 미국의 어떤 무력으로도 사망의 무덤 돌
을 굴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2). 예수님께서 무덤 돌을 활짝 열으셨습니다. 예
수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니, 너희도 살리
라".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6). 여기 그가
살아나셨고, 얼마나 엄청난 기쁨의 소식이며 얼마나 감격스러운 복음입니까? '살아나셨고'
란 말을 문법적으로 읽으면 그 동사가 수동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나심을 입었다는 뜻
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무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무덤이
비었다는 말입니다. 무덤 속에는 시체 대신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있었습니다. 무덤
속에는 장송곡 대신에 할렐루야 코러스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돌을 굴려주리요" 그러
나 우리 모두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의 예
언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지셨기 때문이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모든 죄가 멀리 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
려니 너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것을 변개시킬 인생이 없습니다. 이 말씀과 같
이 우리 누군가가 오늘밤에 죽을런지도 모릅니다. 또 죽으면은 그 가진 모든 것 헛될 수밖
에 없습니다. 그리할지라도 부활의 주님 때문에 그는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 우리의 찬송이 아닙니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 나의 기쁨, 예수님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첫번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둘째 셋째 부활은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닙니까? 때문에 바울처럼 '사망
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는 날, 그 때에 천국
천사가 마중 나올 것이고, 악마는 우리를 손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 정거장까
지 마중 나오실 것이고, 반기면서 '사랑하는 형제여, 이제 오는가'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네가 살 집이니라' 천국을 안겨다 주실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먼저 간 성도들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 예수
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의 죽은 믿음이 어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
에 베드로의 죽은 사랑이 어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의 열심이
어찌 되었습니까? 부활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루에도 삼천명, 죽은 영혼들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게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나의 믿음이 죽어 있지는 아니합니까? 나
의 사랑이 죽어 있지는 아니합니까? 꽹과리처럼 울리고는 있지만, 생명을 빠트리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오늘 부활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모두 시들은 믿음이, 사랑이, 열심이 예수 그
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 생명 얻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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