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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부활, 생명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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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막5:35-43 예수 부활, 생명 회복
                                     
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오늘은 가장 기쁜 소식인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꺾고 사단에게 항복을 받으시고 부활하심은 죄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이 축제를 벌이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4월 20일 오늘은 부활주일인 동시에 세계인이 정한 장애인의 날이기도 합니다. 장애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장애에서 회복되기를 기도하는 장애인의 날이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장애는 타고난 질병도 혹 있지만 많은 경우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선천적 장애인은 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90%이상이 후천적 장애인입니다. 국민의 10% 이상이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많은 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이 소망이 있다면 회복입니다. 완벽하게 회복되기를 위해 치료를 받으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마음의 장애로 인해 인생을 원망하며 사회와 이웃을 불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많이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영적 장애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도, 십자가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않아 영생도 생명도 모르고 꺼지지 않는 영원한 지옥 불로 향하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도 심판도 영생도 내세도 모르는 영적 장애인들을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육신의 장애에 관계없이 영적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들은 마음이 밝아져 육신의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티없이 살아가곤 합니다.

육신의 장애인들 중 육신의 장애는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 마음의 장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각 장애를 가진 강영우 박사는 중학교 때 운동을 하다 공에 맞아 망막이 망가져 실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기에 자기 생애를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한국 최초로 장애인 유학생이 되었고, 유학하여 시각장애인으로 박사가 되어 지금은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의 저명 인사가 되어 지금 부시 정부에서 차관급으로 봉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짧은 레마 마리아는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밝은 마음으로 기도하여 열심을 내어 수영, 십자수, 요리, 피아노, 운전, 찬양대 지휘를 발로하는 팔망미인이 되어 지금 그를 사랑하는 남편과 세계에 돌아다니며 노래 부르고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장애인이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뿐이다'이라고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에서 고백합니다.
두 팔이 없지만 이렇게 긍정적으로 희망차게 자기 생애를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면서 지금도 부활의 예수님을 의지하며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산다고 말합니다.

산부인과 의사의 실수로 뇌성마비가 된  송명희 시인은 주옥같은 시로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수많은 전도집회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KBS 2TV 인간승리 편에서 5부작으로 소개된 이지선은 5도 화상으로 모든 살이 다 탔고 그렇게 예쁜 얼굴이 완전히 흉찍하게 변했지만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기도하며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장애를 가진 신앙인들 중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영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후 마음의 장애, 영의 장애를 가지고 원망하며 생명에 대한 소망 없이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며 도전을 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우리 영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복을 받아야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청산하시고 부활하신 것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생명의 말씀을 통해 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생명과 사랑과 의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꺾고 부활하셨는데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많이 죽은자 가운데서 3일만에 살아나신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죽은자 가운데서 3일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마가요한의 다락에 숨어 있었습니다.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도 예수 부활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겨우 향품을 사서 시신에 바르기 위해 갔을 것 뿐입니다.

여인들이 예수께서 묻힌 무덤에 갔을 때 무덤 문이 열렸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이미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보리라' 합니다.

예수 부활에 관해 천사들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제자들도 믿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달려가 확인하고요 믿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말해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가운에 나타났습니다. 그제야 믿습니다. 그 때 마치 도마는 없었는데 10명의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을 목격했다고 해도 도마는 끝까지 믿지 않습니다. '손의 못자국을 확인하고 옆구리 창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8일 후 도마가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십니다.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 창자국을 보이시니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고 그때서야 믿음의 반열에 들어섭니다.

주님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하시면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다. 모래한줌 같은 지식을 가진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후불면 날아가는 재산을 좀 가졌다고 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건강함을 가진 것이 복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복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복이요 신령한 복이요 하늘의 복이요, 생명에 이르는 복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복을 받는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복을 받습니다. 마치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오랜 물리치료를 통해 조금씩 회복되는 것처러무 부활의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생명에 이르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를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시켜 영생을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사역은 회복의 사역입니다.
군대 귀신들려 인생을 허비하는 한 사람을 만나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 형상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12년동안 혈류병으로 많은 의원에게 괴로움을 받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한 여인을 만나 그를 고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12살 먹은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다시 살려 주심으로 부활의 예수 믿는 사람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야이로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처럼 야이로는 믿는 자가 되었기에 죽은 딸이 살아나는 복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1. 회당장 야이로는 기도하는 믿음을 가졌다.
22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야이로는 회당장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당처럼 교육도 주관하고 모여 직업도 소개하는 유대인 사회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는 회당장이 2-3명 정도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다.  마을의 유지라 할 수 있다.

마을의 유지인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많이 간구한다. 한두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간구한다. '내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안수하여 살게 해 주세요. 주님 한 번 기도하면 나을 것을 믿습니다. 꼭 오셔서 기도해 주세요.'

많이 간구하는 야이로는 믿음이 있었다. 믿음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이 보는데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간청하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표현이다. 주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기도하는 것이다. 그냥 해 주면 좋겠다 막연히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간청할 때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역사한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기도한 사람들이다. 우연히 운좋게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없다.

믿음을 가지고 간청하는 댓가를 지불한 사람들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기적을 맛보는 감격을 가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믿는가? 나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을 믿는가? 야이로처럼 믿음으로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간구하는 소리를 듣고 주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2. 회당장 야이로는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졌다.
믿음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시련을 통해 자라납니다. 기도하는 믿음은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자라나가 위해 시련을 당합니다.

야이로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24절 주님은 응답하여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한다. 그때 문제가 생겼다.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돌발적 사건이 발생하여 예수님의 발길이 지체되었다.

그때 사람들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비보를 가지고 왔다.
35절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선생을 괴롭게 마옵소서.

기도한 야이로는 시련을 맞이했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여 주님이 병든 딸에게 안수하기 위해 오시는 중에 딸이 죽은 것이다. 지체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집에 와서 안수만 했다면 분명히 살아났을 것인데 중간이 돌발적 사건으로 지체하여 그 사이 안수 기도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딸이 죽은 것이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딸이 죽었다. 이것이 믿음의 시련이다. 믿음으로 기도했는데 더 이상 회복되지 않을 상황이 온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이렇게 믿음의 시련을 당하는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4마디의 말씀을 하셨다.

첫째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36절에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셨다. 이 말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고 그 말을 배격한다는 것이다. 죽었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고 계속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현실에서 딸은 죽었다. 의학적 판단에 의해 죽었다.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고 맥박이 뛰지 않는다. 그러면 죽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한다.

여기서 믿음의 진가가 나타난다. 믿음이라 현실과 하나님 말씀 사이에 충돌이 생길 때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예)아브라함 99세가 되고 그의 아내가 생리가 끊어지고 태의 문이 닫혔는데 아기가 생긴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하나님의 말씀은 아기가 생기는데 이삭이라고 하라고 이름까지 지어준다. 그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믿었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자라난다 살후1:3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다라고....
믿음은 자란다. 1학년 믿음이 있고 6학년 믿음이 있다. 유치원 믿음과 고등학생의 믿음이 다르다. 역사와 능력이 다르다.

믿음의 자라면 자랄수록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 신뢰한다. 마귀의 말보다 주 예수님 말씀을 더 신뢰한다. 돌이 떡이 되어 허기진 배를 채우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간다.
사람의 합리적 생각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사단에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합리적 생각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십자가가 고통이나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연히 걸어가야 한다.

마귀의 달콤한 말을 수용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마귀의 꿀바른 말을 듣고 먹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버릴 때 죄가 들어와 결국 죽음과 고통으로 다스리는 마귀는 종이 된 것이다. 달콤한 마귀의 말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믿음이다.

인간의 합리적 생각으로 가능한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없는데 혼자 확신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다.

믿음이라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실적 환경에 상관없이 말씀이 주어지면 말씀대로 될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첫 번째 주신 말씀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처럼 우리 환경이 절망이 되었을 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솟아날 구멍이 없어 낙망하고 있을 때 주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여 어디를 보아도 가능성이 없으 때 부활이 주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다. 주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믿음의 싸움에서 한발짝 전진하는 것이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되리고 가신다(37절). 왜냐하면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면 오히려 김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야이로에게 죽었서, 예수님 돌아가시게 해. 장례 준비나 잘해 한다면 야이로의 믿음이 흔들릴 것이다.

마치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해, 애굽으로 돌아가자 세상으로 돌아가자. 희망이 날아갔다고 할 때 모든 백성들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려 원망하며 통곡한 것처럼 현실만 보고 믿음을 잡아 삼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는 현장에서는 오히려 반대가 되기에 그들이 따라옴을 허락지 아니했다.

회당장 야이로는 믿음을 가지고 집으로 갔다. 두 번째 믿음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38절 사람들이 훤화하며 울며 심히 통곡한다. 장례식을 이미 치루고 있는 것이다. 피리를 불며 곡을 하며 심히 통곡한다. 다시 믿음이 흔들린다. 진짜 죽었구나? 그렇게 기도한 내 딸이 죽었구나? 할 수밖에 없다. 포기하려고 하는데 주님이 두 번재 말씀을 주신다.

39절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생리적으로 숨을 쉬지 않는데 주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휴식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 한번의 믿음의 충돌이 생긴다.
숨을 쉬지 않는데 잔다고 한다. 휴식이락 한다.

사람들은 비웃는다(40절) 그래서 주님은 비웃는 사람들을 다 내어보낸다. 아이의 부모와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기고 가신다.

사람들이 비웃을 때 믿음이 흔들린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라고 정신차리라. 지금 죽은 것을 확인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 하면 정말일까 의심이 생긴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의 말에 아량곳 하지 않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자는 아이를 앞에 두고 울고불고 무엇하는 짓이냐? 죽은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주님의 두 번째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일어나려고 하지 않는 자들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말씀하심이다.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 끝이 아니라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제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살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아직도 할 일이 있다는 소망의 말씀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끝이다. 이제는 희망이 없다. 망했다고 할 때 주님의 말씀은 아니다. 끝이 아니고 과정이고,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고 새 희망이 있다고 하는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믿음은 현실과 말씀의 충돌이 항상 일어난다. 큰 기적을 맛보는 사람들은 더 큰 충돌 가운데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3번째 말씀이 41절이다.
달리다굼 아이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달리다굼이란 아침에 부모들이 아이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학교갈 시간이다. 일어나라 하는 어서 일어나라는 아람어이다.

죽은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한다. 숨을 쉬지 않는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한다. 예수님이 권위가 있다. 바람에게 잠잠하라고 하니 바람이 잠잠하과, 군대 귀신들에게 나가라고 하니 즉시 나가고, 12년간 병에 사라잡힌 여인에게 병에서 놓임을 받으라 하니 병이 놓고 도망간다. 이제는 죽은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하니 죽은 아이가 일어난다.

이 말은 주님의 말씀은 영이 듣는다. 자연도 듣고 귀신도 듣고 질병도 듣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이 듣는다. 죽은 아이는 영은 이미 떠났다. 그 아이에게서 떠났다. 떠났지만 주님이 일어나라고 외치는 순간 영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다시 돌아오니 살아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3번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는 것이다.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이제는 일어나라. 일어나 일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맥이 빠져 손발이 다 풀린 자들에게 주님은 일어나라고 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죽은 아이와 같이 무능함에 빠진 자들에게 주님은 일어나라고 한다.
일어나라는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순간 다시 회복의 은혜를 받는다.

주님은 달리다굼하신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하다가 낙심하여 무너질 때에 달리다굼 힘이 난다. 몸이 피곤하여 누웠을 때 이 말씀은 용기이다. 전능자의 명령이다. 생명의 주가 말씀하심이다. 수7:10일어나라 어찌하여 엎드렸느냐
인생의 문제에 주저않은자여 일어나라
영적 기력이 다 사라져 가물가물하고 신앙 생활이 힘들어 탈진한 자여 일어나라 많은 문제에 지쳐 있는 자야 일어날.

소녀가 일어날 때 비웃던 사람들,. 조롱하던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란다.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사람들이 놀란 것처럼 죽은 아이가 예수님 말씀을 통해 살아날 때 놀란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43절이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지 못하게 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신다.

왜 이런 기적을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 사람들을 죽은 자를 다 시체를 데리고 올 것이다.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복음은 전하여야 하지만 사람이 살아난 것은 안전해도 된다. 그 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믿지 않는다. 기적 신앙은 얕은 수순의 신앙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예)막 3장에 사라들이 열심히 예수님을 찾는다. 이유는 예수님을 만지고 고침 받기 위함이다. 유치원 수준의 신앙이다. 기적의 신앙은 기적이 맛보고 예수님을 떠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영생의 복을 받으라고 하면 도망간다.
혹시 기도 응답이 지체되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도망가고, 혹시 시련이 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고 하면 도망간다.

주님은 기적의 신앙을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알리지 말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곧 원기를 회복하여 정상이 되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침대에 누워 있기 원치 않으신다. 음식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고 열심히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정상인처럼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밝은 마음으로 할수 있는 것을 하기를 원하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

부활의 예수님은 4가지 말씀을 하셨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제는 일어나라
먹을 것을 주어 힘을 얻어 일하게 하라.

믿음은 말씀을 먹고 자란다.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자란다. 마귀의 말 합리적인 말을 배척하라. 세상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은 평행선이다. 합의점이 없다. 믿음을 살찌우는 양식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아무리 가혹하고 현실이 죽음의 그림자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라. 말씀을 믿으라. 말씀을 믿는 믿음은 환경을 이긴다. 초대교회에 박해가 심해져 교회가 죽은 아이와 같은 환경에서 믿음을 격려하는 것이다. 베드로 바울이 선교하여 거의 회생불가능한 교회 환경이지만 다시 교회는 살아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교회는 다시 살아나 로마를 복음화 시켰다.

아무리 어려워도 죽은 자를 살리신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으라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오늘은 부활의 아침이다.
부활의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믿음의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믿음은 기도로 표현된다. 믿음은 낙망되는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람이 되어 부활의 능력을 맛보는 종들이 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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