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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기쁜소식 / 시 85:6-8, 고전 1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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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4. 20.
부활의 기쁜소식
(시 85:6-8, 고전 15:20-23 )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기쁨과 희망으로 충만한 가정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생애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과하시어 죽음을 극복하시고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당시의 역사적 기록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코 스트라우스라는 사람이 말한대로 제자들이 환상을 본 것이거나, 불트만이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의미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nova creatio)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키는 ‘아나스타시스’라는 명사는 다른 죽은 자들의 일어남에 대하여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는 영원한 부활을 의미합니다. 다른 일반인들의 부활에는 다시 ‘살아남’(rising)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15:4에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나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게르타이’입니다. 이 말은 현재완료형으로서 부활하여 현재도 살아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는 우리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욥기 14:14에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라는 부활에 대한 욥의 의문 이래 끊임없이 인간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부활이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사람은 그가 죽으려고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닌 줄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거부하고 다시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본성적 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죽지 않으려는 발더둥을 보세요.

옛날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昇露盤)에 찬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 5백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동방의 삼신산이란 우리 나라의 금강산입니다. 우리 나라의 금강산이 중국산보다 훨씬 영적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냈지만 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먹고 불로장수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사람은 어리석어 불로장수하려고는 하지만 영생불사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이것을 아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부활의 종교입니다. 생명이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죽음을 찬미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또한 헛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하는 여러 설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이 거짓으로 퍼트렸다고 하는 허위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거짓 위에 서 있는 종교입니다. 여인들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남의 무덤을 보고 비었다고 착각하였다는 무덤 오인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기절설도 있습니다. 제자들과 여인들이 너무 예수님을 그리워한 나머지 환상으로 보았다는 환상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500명에게 한꺼번에 보이셨다고 하였는데 500명이 한꺼번에 환상을 일으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바빌론의 신화에 적용하여 부활을 꾸몄다고 하는 신비설도 있습니다. 이밖에 이성적 판단으로 부활을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부활불신론은 몇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자료인 성경의 신빙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부인하고는 기독교를 논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상상력에 의존하여 근거 없는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제자들과 여인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뒤의 저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비판학자들이 이성을 부활사건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약점은 성경의 정경성과 표준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성이 가장 중요한 표준이라는 극단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 가장 중요한 표준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지 않았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17-18)라고 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보프의 시의 한 구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죽기 위하여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부활하기 위하여 죽는다”. 인간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참 기쁨과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근거이며 소망이며 첫 열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무한한 기쁨입니다. 제자들은 부활 소식에 기뻐하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 때문에 그들의 기쁨은 다시 살게 합니다. 두려워 숨어있던 그들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첫째, 부활은 사망 후에 다시 살아나셨기에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나심이 기쁜 소식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기쁜 소식이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기쁜 소식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가 기쁜 소식이며 즐거운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다시 사셨다니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부활은 그들이 미리 듣고 알고 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았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으니 기쁨입니다. 마태복음 16:21에는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 3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8:32-33에는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에 14번이나 부활에 대한 언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예언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야말로 기쁜 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런데 죽은 자가 살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놀랍고 기쁜 소식입니다. 제자들과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심으로 완전히 절망 속에 있었는데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니 정말 기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을 공유하게 하려고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도마가 있을 때에 다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열 한 제자에게 타나나셨습니다. 후에 500명에게 한꺼번에 나타나셨습니다.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 마지막에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한복음 20:20에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합니다. 부활은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잃었던 기쁨을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하였습니다. 두려워 숨어있던 그들이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기쁨을 회복하는 힘을 부활은 가져다주었습니다.


둘째, 부활은 잠자는 자들이 다시 사는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살았지만 부활은 아닙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입니다. 이들이 다시 살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실제로 따지고 보면 기쁠 일도 없지요. 전설에 의하면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오자마자 예수님께 “나 또 죽습니까?”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또 죽는다고 했을 때에 나사로는 실망했고 진짜 죽을 때까지 한번도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고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또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기뻤습니다. 기쁨의 소식입니다. 입을 통하여 얼마나 빨리 전달되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사셨고 다시 영원히 죽지 않으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부활에 참여할 때까지는 예수님만이 영원히 죽지 않으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은 그 때까지는 첫 열매이며 유일한 열매로 남아 계실 것입니다. 첫 열매란 ‘아파르케’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제일 먼저 맺힌 열매입니다. 구약에서는 첫 열매는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왜냐하면 첫 열매는 모든 수확물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신 것은 우리 모두가 부활의 열매가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활의 열매가 될 것인데 그 중에 첫 열매는 예수님이십니다. 첫 사람인 아담의 실패로 죽은 우리가 둘째 사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잘못된 열매인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심으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는 말은 우리가 부활의 열매들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뒤에 살아 남은 자들도 일어나 공중에서 주를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부활 후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요 20:25)고 증언하였습니다. 도마는 후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부활을 본 자들이 기쁨으로 증거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기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안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기쁨을 회복하시고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뼈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바람으로 다시 붙어 힘줄이 생기고, 가죽이 생기고, 근육이 생기고, 핏줄이 생겨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인 성령은 죽은 자를 일으키고 힘을 회복하고, 기쁨과 생기가 솟고 큰 군대와 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던 제자들이 다시 힘을 얻습니다. 기쁨을 회복합니다. 새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최초로 경축한 축제입니다. 원래 축제의 이름은 ‘파스카(Pascha)’였습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절기를 8일간으로 하여 경축하였습니다. 본래 부활절은 부활일로부터 성령강림절까지였습니다. 40일 동안을 기뻐하며 부활을 경축하였던 것입니다. 40일 동안의 사순절을 지나 40일 동안 경축하는 절기는 교회의 전통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새로 만나면 기쁨이 회복됩니다. 분명한 소망의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자로 살 수 있습니다. 로마서 8:37에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합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이므로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시체가 있는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시체로 이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갔을 때는 비어 있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20:6-7에는 “시몬 베드로가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고 합니다. “개켜 있다”는 말은 ‘둘둘 말려 있다’, ‘그대로 접혀 있다’는 뜻입니다. 세마포는 산 사람에게 필요 없는 것이기에 잘 개켜 있었습니다. 세마포는 시체를 위한 것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돌아가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확인하고 시체를 아리마대 요셉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살아나셨습니다.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또 다른 특징은 부활체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영은 나와 같은 살과 뼈가 없느니라”(눅 24:3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몸은 부활하시기 이전의 몸과는 달랐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시다가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제자들이 있는 문이 닫힌 방에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신비했는지 예수님을 보면서도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마 28:17). 이것이 부활의 몸입니다. 영체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변화될 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예표입니다. 우리도 장차 이렇게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괴테는 “세상에서 제 아무리 득의한다 해도 부활을 만나지 못하면 처량한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죽은 성도가 주님의 재림 때에 부활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성도들도 변화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영광스런 공동체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삶은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입니다. 이 삶이 우리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부활은 이제 예수님의 사건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부활이야말로 환희와 영광의 소식입니다.


결론

루프스 모셀리는 “그리스도는 단 한번도 장례식을 집례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만이 그의 소유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죽은지 나흘만에 살리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관에 손을 얹고 말씀 한 마디로 살리신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속삭이십니다. 우리에게도 부활만이 우리의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잠시 스쳐 지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초기 기독교의 순교사에도 진하게 나타납니다. 부활의 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거뜬히 죽음까지 내어놓게 하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원형 극장에 기독교인들을 잡아다놓고 굶주린 사자들을 풀어놓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달려오는 사자 떼들의 포효 앞에서 찬송 소리는 작아지고 무참히 사자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한 여인이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마구 입을 벌리고 달려오는 사자를 보자 어린아이는 무서워 웁니다. 어머니는 이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잠깐만 참아라. 곧 밝아질 것이다”. 죽음이 무서운 것 같지만 곧 밝아집니다. 고통이 긴 것 같지만 곧 끝납니다. 부활의 소망은 죽음도 이기고 고통도 견딥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보너스입니다. 주님이 사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이 부활이 우리 신앙의 뿌리입니다. 매일 새 힘을 얻는 삶을 삽시다. 다시 소생하는 용기의 뿌리를 가집시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망으로 절망을 이기는 우리의 밝은 세상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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