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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고전 15: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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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28절

기독교는 예수님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그 날을 축하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날을 기억하는 것이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지내셨다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날을 축하하는 것이 부활절입니다.  오늘입니다.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불길한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죽음은 연기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는 항거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입니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난 의사라도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대영제국의 의술이 총동원되어도 자신의 죽음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내 생명을 촌각만이라도 더 연장해준다면 100만 파운드를 주겠다”며 안타까워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70년 동안이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부와 명성을 누려왔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었지만 그도 죽음 앞에는 손을 들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부했던지, 명성과 인기가 있었던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죽음의 날에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맡길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죽음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의 장’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고 자세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하여 부활의 의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의 특성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같이 죽었다가 살아난 여러 사람의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방금 죽은 회당장의 12살 먹은 딸을 살린 기록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죽어서 상여가 나가는 것을 멈추시고 청년을 일으키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어서 무덤에 장사 지낸 나사로를 무덤까지 가셔서 살리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사도는 구제에 힘쓰던 다비다(행 9:40)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졸면서 자신의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행 20:9-12)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는 다릅니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뿐입니다.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6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들이 살아난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뚜렷하게 다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영체가 되셨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갈보리 산상에는 십자가가 세 개 세워졌습니다.  가운데 십가가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양 옆에는 살인 강도짓 하다가 잡힌 자들이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같이 사형집행 당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전에 없었던 사건입니다.  인류 최초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주인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최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간계를 물리친 승리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흉계를 꾸며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정권의 압박을 이긴 표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 무덤에 장사지내면 끝날 줄로 알았으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사 로마정권의 압박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의 세력은 예수님을 죽게 하고 무덤에 장사지낸 것을 보고 축배를 들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부활로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의 깊은 욕구에 대한 해답입니다.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상대성 원리’에 의해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에게 눈이 있는 것은 보아야 할 물체가 있기 때문이고 귀가 있는 것은 들어야 할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고 목이 마른 것은 먹을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 원치 않는 죽음이 온다는 것은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저주받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장사지냈습니다.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유교를 만든 공자도 죽어서 중국 창평향에 무덤을 남겼습니다.  불교를 만든 석가모니는 인도 살수산하에 무덤을 남기고 있습니다.

  중동의 건설현장에 우리나라의 독실한 기독교인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이슬람교도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 모슬렘은 자기가 믿는 이슬람교에 대해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고 메카를 순례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이슬람교의 큰 자랑은 메카에 있는 모하멭의 무덤입니다.  너희 교주 예수의 무덤은 비어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굉장히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모하멭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 말을 들은 크리스챤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입니다.  모하멭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들은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빈 무덤입니다.”

  제가 성지순례차 예루살렘에 갔을 때도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를 믿는 사람의 죄는 모두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믿는 자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복입니다.  죄에서 죽고 의로서 살으신 것입니다.

  찬송가 156장을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1절 싸움은 모두 끝나고 생명의 승리 얻었네
  개선가를 높이 부르세 할렐루야
2절 사망의 나라 권세를 주께서 깨드리셨네
  승전가 높이 외치세 할렐루야
3절 슬프던 사흘 지나고 주께서 살아나셨네
  영광을 주께 돌리세 할렐루야
4절 사망의 문을 잠그고 생명의 문을 여셨네
  부활의 찬송 부르세 할렐루야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본문 22절과 23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문제는 그리스도가 아무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더라도 나와 관계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어야 하고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죄 씻음이 있고 천국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그가 쓴 편지에 164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먼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체험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말합니다.  율법에 충성을 다했던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3일 동안 소경이 되었고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이 뜨여졌습니다.  육체의 눈과 함께 영의 눈도 뜨여졌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결합된 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했다는 말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호흡하며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아침에는 예수로 잠을 깨게 하시고
  저녁에는 예수로 잠을 자게 하소서
  예수여 내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예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된 자의 삶의 고백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와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아담이 가진 요소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는 우리들 개인, 개인의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 체험이 우리들 구원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민족적인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피부색깔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직업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귀한 직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의 신성을 이해하고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주님은 복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죄인이던 죄인이 아니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도 예수님은 용서했습니다.  탐관오리로 세상을 살던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도 그의 회개를 보시고 주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평생을 살인 강도짓을 한 죄수가 마지막 죽는 순간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천국을 약속하시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 자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뉘우치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죄는 아담 안에 있을 때 지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그 죄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구속의 주가 되셨습니다.  대속의 주가 되셨습니다.  인간이 고민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 말은 우리들도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삶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리스도께 붙었다’는 말은 그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기쁨의 소식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눈물을 거두게 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승리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 값으로 모든 인간이 당하는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날입니다.  누구에게 이 복이 주어집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됩니다.  주 예수님 부활을 축하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이 놀라운 복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독교는 예수님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그 날을 축하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날을 기억하는 것이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지내셨다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날을 축하하는 것이 부활절입니다.  오늘입니다.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불길한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죽음은 연기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는 항거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입니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난 의사라도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대영제국의 의술이 총동원되어도 자신의 죽음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내 생명을 촌각만이라도 더 연장해준다면 100만 파운드를 주겠다”며 안타까워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70년 동안이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부와 명성을 누려왔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었지만 그도 죽음 앞에는 손을 들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부했던지, 명성과 인기가 있었던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죽음의 날에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맡길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죽음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의 장’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고 자세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하여 부활의 의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의 특성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같이 죽었다가 살아난 여러 사람의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방금 죽은 회당장의 12살 먹은 딸을 살린 기록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죽어서 상여가 나가는 것을 멈추시고 청년을 일으키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어서 무덤에 장사 지낸 나사로를 무덤까지 가셔서 살리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사도는 구제에 힘쓰던 다비다(행 9:40)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졸면서 자신의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행 20:9-12)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는 다릅니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뿐입니다.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6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들이 살아난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뚜렷하게 다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영체가 되셨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갈보리 산상에는 십자가가 세 개 세워졌습니다.  가운데 십가가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양 옆에는 살인 강도짓 하다가 잡힌 자들이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같이 사형집행 당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전에 없었던 사건입니다.  인류 최초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주인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최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간계를 물리친 승리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흉계를 꾸며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정권의 압박을 이긴 표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 무덤에 장사지내면 끝날 줄로 알았으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사 로마정권의 압박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의 세력은 예수님을 죽게 하고 무덤에 장사지낸 것을 보고 축배를 들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부활로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의 깊은 욕구에 대한 해답입니다.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상대성 원리’에 의해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에게 눈이 있는 것은 보아야 할 물체가 있기 때문이고 귀가 있는 것은 들어야 할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고 목이 마른 것은 먹을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 원치 않는 죽음이 온다는 것은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저주받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장사지냈습니다.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유교를 만든 공자도 죽어서 중국 창평향에 무덤을 남겼습니다.  불교를 만든 석가모니는 인도 살수산하에 무덤을 남기고 있습니다.

  중동의 건설현장에 우리나라의 독실한 기독교인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이슬람교도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 모슬렘은 자기가 믿는 이슬람교에 대해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고 메카를 순례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이슬람교의 큰 자랑은 메카에 있는 모하멭의 무덤입니다.  너희 교주 예수의 무덤은 비어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굉장히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모하멭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 말을 들은 크리스챤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입니다.  모하멭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들은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빈 무덤입니다.”

  제가 성지순례차 예루살렘에 갔을 때도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를 믿는 사람의 죄는 모두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믿는 자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복입니다.  죄에서 죽고 의로서 살으신 것입니다.

  찬송가 156장을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1절 싸움은 모두 끝나고 생명의 승리 얻었네
  개선가를 높이 부르세 할렐루야
2절 사망의 나라 권세를 주께서 깨드리셨네
  승전가 높이 외치세 할렐루야
3절 슬프던 사흘 지나고 주께서 살아나셨네
  영광을 주께 돌리세 할렐루야
4절 사망의 문을 잠그고 생명의 문을 여셨네
  부활의 찬송 부르세 할렐루야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본문 22절과 23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문제는 그리스도가 아무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더라도 나와 관계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어야 하고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죄 씻음이 있고 천국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그가 쓴 편지에 164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먼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체험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말합니다.  율법에 충성을 다했던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3일 동안 소경이 되었고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이 뜨여졌습니다.  육체의 눈과 함께 영의 눈도 뜨여졌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결합된 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했다는 말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호흡하며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아침에는 예수로 잠을 깨게 하시고
  저녁에는 예수로 잠을 자게 하소서
  예수여 내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예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된 자의 삶의 고백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와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아담이 가진 요소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는 우리들 개인, 개인의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 체험이 우리들 구원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민족적인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피부색깔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직업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귀한 직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의 신성을 이해하고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주님은 복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죄인이던 죄인이 아니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도 예수님은 용서했습니다.  탐관오리로 세상을 살던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도 그의 회개를 보시고 주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평생을 살인 강도짓을 한 죄수가 마지막 죽는 순간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천국을 약속하시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 자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뉘우치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죄는 아담 안에 있을 때 지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그 죄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구속의 주가 되셨습니다.  대속의 주가 되셨습니다.  인간이 고민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 말은 우리들도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삶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리스도께 붙었다’는 말은 그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기쁨의 소식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눈물을 거두게 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승리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 값으로 모든 인간이 당하는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날입니다.  누구에게 이 복이 주어집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됩니다.  주 예수님 부활을 축하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이 놀라운 복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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