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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새로운 역사 / 눅 24:3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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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활의 새로운 역사
본문 : 누가복음 24:36~49

  한 역사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
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이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실 세계는 그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지금도 인정을 합니다. 우리 인간사의 날짜 계산
을 지금은 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이 2003년이라고
하는 날짜 계산을 온 세상이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
이 죽으셨다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도
세계가 인정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흉악하고 소름을 끼치는 사
형 집행 기구로 누구도 보지 아니하려고 하는 괴물 같은 것으로 취급을 받
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
한 표시가 되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거룩
하고 경건한 표시를 몸에 지니고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십자가
가 조금 화려해 졌습니다. 금으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다이아몬드 십자가
도 있을 만큼 아주 귀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
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변해진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입니다. 이것도 온 세상이 다 인정을 합니다. 오늘
온 세계 인류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로 지구를 진동시키고 있
는 날이 오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작은 나라에만도 50,000
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말하면 온 세계 지구 전체는 오
늘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인류의 대 축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
로 네 번째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일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
서 다시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여 오시는 사건이 됩니다. 결국 인류사는 예
수의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큰 사건이요 관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
게 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누가복음의 마지막 결론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
들 앞에서 출현의 장면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에서 부
활하신 예수님의 현실적 출현은 매우 뜻깊은 의미를 몇 가지 지니고 있습니
다. 오늘 부활주일 아침에 주님의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역사의 발견을 말
씀의 중심으로 한번 생각하고자 합니다.
  제일 먼저 이 사건은 인류 초유의 사건을 통한 예수의 영광이 조명되어
지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에 걸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
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그 영광의 때가 언제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한 복음 17장은 1절부터 마지막 26절까지 전 장이 예수님의
기도문으로 되어 있는데, 1절에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기도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하십니다. 이 부활의 사건은 영광된 예
수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창세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서 끝없는 노력을 나름대로 해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종교적
으로 해결하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철학으로 죽음을 초월하는 문제를 시도
해 보았으나 누구도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
을 의학으로 해결해 보려고 우리 가까운 나라의 역사의 진시황은 이 문제
를 의학으로 한번 해결해 보려고 불로초, 불사약 이런 것을 구해오라고 먹
고 불로장생하리라고 하는 그런 역사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인간에게 유익을 남겨
준 몇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그들을 성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서
존경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라든가 공자라든
가 석가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이 평생을 통해서 말한
진리성이 몇 가지 특징이 있는 것을 우리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
의 경우는 자신의 문제 "내가 누구인가?" 그래서 너 자신을 아는 것이 진리
라고 그렇게 인간의 혼을 깨우쳤는데, 그가 가르쳐 내면 철학의 시조요 형
이상학의 시조라고 철학에서는 그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이 내면 철학이란 곧 영혼의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만나는 모
든 인간들에게 역설관 진리는 혼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신 것
입니다. 공자의 경우는 인간 삶의 제일 중요한 것이 인간의 관계성이라 해
서 도덕률을 만들어서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정립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특
별히 우리 나라 같은 사람들은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석가는 인간 고
뇌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서 이 고뇌를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을 하나
의 구원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 삶의 부분적으로 도움
을 주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근대 사람으로는 칼 막스를 들 수가 있는데 그
는 인간의 해방이 무엇인가? 빈곤에서의 탈피와 계급 없는 평등 사회를 인
간구원의 문제로 취급을 한 적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무엇이냐? 지금 그분들이 말한 모든 진리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포함이 되어 있으며, 아울러 그분들이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 생명 불멸의 진리, 즉 영생의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
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사랑으로 맺으며 고통은 십자가로 해석
을 하고 영혼의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빈
곤과 평등의 문제는 하나님의 복 안에,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자
에게 이 모든 것이 더하여질 것이라는, 하나님 안에서의 모든 인간이 형제
요 자매라고 하는 평등법을 또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창조이후 지
금까지 또 앞으로도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사람이 인간 죽음
과 영생의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누구도 할 수 없는
이 일에 대한 초능력적 성취 부활은 곧 영광된 예수를 조명하여 주는 사건
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 안에는 이렇듯 예수 믿는 기독교 신자가 많습니다. 만약 예
수님의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것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 당
시를 생각해 본다면, 가장 가깝게 예수 곁에 존재했던 제자들마저도 예수
의 메시아성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지나간 일은 모두 허무
했고 꿈이라고 생각하고 누구도 이 예수님의 영생의 진리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죽은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고 수차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에게 설교해 주셨지만 그 예
언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믿지 아니하였는
가? 죽어서 무덤에 장사지낸 사람이 다시 소생하여 살아난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믿지 못한 것입니다. 누구도 하지 못
한 일이기 때문에 이 부활의 사건은 영광된 예수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죽
음 이후의 인간은 과연 어떻게 되는가 라고 하는 인간의 가장 궁금한 이 질
문에 대해서 예수는 현실적인 대답을 하고 계신 것이 바로 부활의 사건입니
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아마도 히브리 민족
사이에 이야깃거리로만 남는 전설의 고향 정도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
로 이 부활과 함께 복음이 살아나서 구원의 산 역사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난의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닌 영광된 예수
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 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초이성적, 초자연적 사건을 접하는 제자들의 갈등
이 생겨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와 몇 명의 여인들로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안한 사람입니다. 다만 유대 나라에서
흔히 하는 일인 죽은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 안식일
이 지난 후 새벽같이 향품을 준비하여 갔을 뿐입니다. 유대 나라 무덤의 문
화는 한 무덤 안에 수십 명이 함께 있고, 또 혼자 있다 하여도 우리 나라
와 같은 그런 무덤 문화가 아닌, 납골당 형식의 굴 안에 안치되어 무덤 문
만 열면 들어가서 시신을 볼 수 있는 그런 무덤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가 복음에는 살로메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향품
을 준비하여 가지고 가면서 걱정하는 말의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살아나신 예수를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런
데 이 소식을 듣는 제자들은 그때부터 심각한 갈등을 갖게 됩니다. 그 갈등
이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초이성적 사건이 현실적으
로 자기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건은 믿을 수도 없으며
안 믿을 수 없는 갈등의 부분으로 제자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오늘 말씀에
그러한 제자들의 갈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36절에 보면 "이 말을 할 때
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
시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들과 지난 3
년 동안 같이 사셨던 그 나사렛 예수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운명하시고 아
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낸 바로 그 예수가 자기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
에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 과학을 초월하는 이 사건 앞에서 최
대한 이 사건을 이성적 판단으로 해결해 보려고 말들을 합니다. 37절에 보
면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이렇
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으로서의 출현은 예수님 아니고라도 어느 사회나 많
이 있어온 이야기들입니다. 제자들의 이성적 판단은 영의 출현까지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일은 더러 있었다고 우리가 들어
온 이야기가 있으니까 제자들의 이성적 지식은 아마 지금 나타난 이 예수
도 영의 출현일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갈등을 자기
들이 가지는 평소 지식으로 잠재워 보려고 하는 이성적 노력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무엇인가? 3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있느냐?" 39절에 보면 "내 손
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
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은 "영은 물질이 아니라서 만
질 수 없으나 나는 인간됨의 육체적 물질인 육체를 만질 수 있는 물체로 너
희 앞에 섰으므로 만져서 물질인 나를 확인하라." 최대한의 자신들의 지식
을 살려 영의 출현까지 생각해본 제자들에게 육신이 살아있는 영과 육체의
구별을 예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확인시켜주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
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성과 초이성의 갈등이 오고가는 순간이 되었습니
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만져보고 믿겠노라!" 이런 말
을 합니다. 이성적으로 믿겠다는 말입니다. 만져서 확인된 물질은 이성적
판단 안에 들어오는 지식이기 때문에 나는 그 지식을 믿겠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은 이 사건을 믿어야 옳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이 도깨비
에게 홀린 것인가? 이런 갈등 속에 지금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건
은 초이성적, 초자연적 사건을 접하는 제자들의 갈등을 가져왔다는 사건입
니다. 물질적 육체의 예수를 확인한 제자들은 기뻐했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믿지 못하고 갈등함이 오늘 41절에 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은 한가지 증거를 더 확인시켜 주는 작업을 하십니다. "혹시 여기 먹을 것
이 있느냐?"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영은 먹는 일
을 하지 않습니다. "이에 구운 생선과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렇게 확인시켜주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이 일을 마친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부활에 대한 성서적 기초를 확인시켜 줌으로 부활
의 의미를 새롭게 역사화 하시는 것입니다. 44절에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
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
시고" 그러니까 구약 성경에 예언된 모든 나에 대한 예언의 초점이 여기
다! 영생의 길이요 인간 구원의 길이요 죽음 이후의 인간의 확실한 실체는
이것이다! 부활이다! 여기서 인간 구원이 완성된 것이다! 지금 제자들은 조
금 전까지 참으로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시
간은 한 나라 안에서 그들의 위치가 가장 비참한 자리에 떨어져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천지를 뒤집는 듯한 환호성의 승리
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최대의 희망의 얼굴들로 군중들 앞에 나
타났습니다. 갈보리 사건은 제자들에게 최대의 절망적 상실을 갖다 주었습
니다. 이제는 살아남을지도 확실하지 아니한 불안감이 가득한 때입니다. 이
제는 절망과 상실의 자리에서 인생의 최대의 수확과 희망이 예수의 부활 사
건을 다시 생겨지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이렇게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서 자기의 육체
를 Body touch를 시키면서 구운 생선을 잡수시는 이것이 정말 현실인가? 이
성적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초이성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접하면서 갖는 갈
등이 지금 제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3년 동
안 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모든 이야기는 확실한 현실로 우리 인생에
게 주어지는 초자연적, 초이성적 세계가 확실하지 아니한가?' 그 믿음이 이
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8절에 "그렇다. 너희
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우리는 지금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에서 구원받고 하
나님의 나라를 가고 영생을 얻으며 무덤에서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고 하는
이런 문제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는 초이성적, 초자연적 사
건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그것이 너무나 이성적 판단으로 믿기 어려운 초
능력의 세계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
교의 구원은 믿는 자만이 소유하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
로, 제자들의 앞으로의 사역에 대한 마지막 결단이 필요한 때를 만나고 있
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은 이제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제자들이 그
일을 맡아서 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이 열심히 해온 일을
분석하여 보면, 예수님의 목회는 축제적 성격의 목회였다는 것입니다. 거의
가 군중 집회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적어도 수천 명씩 모여드는 집회를 통
해서 부흥회 성격의 사역으로 지금까지 일관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나타나
는 기적의 사역도 군중 집회적 성격을 띄우고 있어서 예를 들면, 오병이어
의 기적으로 5,000명 이상이 먹었다! 하도 사람이 많이 몰려와서 군중 집회
적 성격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또, 집회 일정도 사
람들을 피해 다녀야할 만큼 분주했다고 그랬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든 군중들이 예루살렘을 가득하게 메워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가는 곳마다 인파가 몰려들고 가는 곳마다 존경을 받아야
되는 축제적 성격의 목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
은 정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는데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치 부
활하신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몰래 몰래 다니는 인상
을 깊이 심어주고 있습니다. 부활 후에 만나준 사람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
습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죽었던 예수가 살아났다면 한번 예루살렘 복판
에 나타나셔서 옛날같이 예루살렘 거민을 다 모아놓고 군중 집회를 열
고 "보아라! 너희들이 나를 죽였지만 내가 이렇게 살아나지 아니했느냐?"
빌라도 법정에 가서 한번 큰 소리를 치시고 "네가 사형 집행을 선언한 내
가 이렇게 살아났다!" 그러면 훨씬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우
리들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앞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
이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의 차이입니다. 한번 보기 좋게 복수도 좀 하
고 "이제부터 나는 가지만 내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도 다 멸망
받을 것이다!" 뭐, 이렇게 제자들도 좀 튼튼하게 해주시고 힘을 좀 주고 그
랬으면 훨씬 좋았을 것을... 이런 생각을 우리가 합니다. 로마 정부는 말
한마디로 다 쓰러뜨려 버리고 대제사장이라든가 서기관을 비롯한 예수를 죽
이라고 판결한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 예수를 죽이라
고 소리쳤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다 엎드려서 회개할 수 있도
록, 예수님의 제자들은 반대로 힘있는 실세가 되고 그러면 선교에 더욱 놀
라운 효과가 오지 않았을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반대로 행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
가? 이제 이 앞으로 내 제자들의 사역은 고난의 목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
에, 조용히 뒷골목을 다니며 낙심된 자를 찾아서 용기를 주고 축제적 분위
기의 기적적 사건을 연출하는 신나는 선교가 아닌 고난의 목회적 차원의 가
시밭길을 조용히 이루어 가는 사명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긴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신앙의 문제를 해결
해주지 않습니까? 심방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믿을 수 있도록 나타나
서 자세한 설명을 그에게 주십니다. 상담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 이야기
를 시편에서부터 풀고 계십니다. 설교입니다. 무슨 뜻이 있습니까? 이제 내
가 간 이후의 너희들의 사역은 이렇게 될 것이다! 너희가 그렇게 하라! 추
후라도 내가 있을 때 예루살렘 군중이 다 모이고 기적이 일어나는 영광된
것을 생각하면 목회에 실패할 것이다!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목
회 사역,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제자들의 사역은 별안간 죽은 사람이 기도해 주었
다고 살아난다든지, 무슨 불치의 환자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걸어간
다든지, 먹을 것이 없을 때 오병이어로 5,000명이 먹을 수 있다든지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부활은 제자들의 목회 사역을 새롭게 하는
새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
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완성되
었습니다. 이제는 한가지 길 밖에 인류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던가 말던가 … 믿는 자는 예수와 같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
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반대의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마지막 부분인 부활 이후의 이 사건이 오늘 부활
주일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혼의 선물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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