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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진실 / 신 6:4 ~ 9, 요일 3:11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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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진실 

<구약의 말씀: 신명기 6:4 ~ 9 >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라. 또 너희는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여라."

<서신서의 말씀: 요한1서 3:11 ~ 17 >

  이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인데,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동생을 쳐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을 하는 사람입니다. 살인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겠습니까?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서 13:31 ~ 37>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아, 내가 아직 잠시 동안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는 일이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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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갖거나 현실을 다르게 보기도 합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인간의 삶이 어디로 가는지, 세계는 어떤 상황이고 앞으로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것은 세계라는 현실, 또는 인간이라는 현실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각기 다른 안경과 다른 눈으로, 다른 관점으로 인생과 세계를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인생관이라고 말합니다. 세계의 본질은 뭐고,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느냐 하는 것을 세계관,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관(觀)이 있습니다. 우리가 써야 할 안경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안경은 사람의 안경이 아니고 이 세계의 안경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안경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만드신 분, 세계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 안경, 신앙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세계를, 역사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분은 누굽니까?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무슨 일을 합니까? 사랑을 행합니다. 그분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분의 출발지는 어딥니까? 사랑의 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요한일서가 고백한 그 사랑의 안경을 쓰고 한번 파악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사랑의 작품입니다.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만들어 놓으시고, 마지막 인간까지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피조세계를 다 보면서 하시는 한마디 말씀, 그것은 “참 좋다”였습니다. 피조세계가 너무도 좋다. 인간도 좋고, 세계도 좋고, 동물이 뛰어노는 것도 좋고, 공기 좋고 물 좋고, 모든 게 좋다. 이 좋은 것을 가리켜서 “평화”(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좋은 것이 가진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 특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는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만든 인간은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그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는 우리가 오늘 성가대를 통해서 들은 것처럼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에덴동산은 아름다운 동산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름다운 인간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인간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나무와 공기와 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걸 창조하신 하나님도 역시 아름다운 사랑의 하나님 아닙니까?

밀턴이 [실낙원]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실낙원이 뭡니까?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입니다. 에덴동산 밖은 추하고 더럽습니다. 쫓겨난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란 뭡니까? 추악한 겁니다. 더러운 겁니다. 씻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죄를 지어서 더럽고 추한 인간, 이 인간을 우리가 깨끗한 물로 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 아주 중요한 과실 중의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생명나무의 과실입니다. 생명은 아름답습니다. 깨끗하고 진실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인간 역사의 시작이라고 하면 그 끝은 어디냐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이런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역사의 끝이 될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고, 정의와 평화와 기쁨, 그것도 성령 안에 있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여기에 유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는 기쁨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슬픔이 없습니다. 처음 인간이 태어난 곳이 에덴동산이라는 아름다움의 나라, 그리고 마지막 도착할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기쁨의 나라! 결국 인간의 역사는 아름다움과 기쁨 사이에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수난절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아름답게 만드신 에덴동산의 역사, 마지막에 있을 성령을 통한 기쁨의 역사, 이 둘 사이에 성자 예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움으로 창조한 인간이 더럽고 추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실낙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깨끗하게 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예수님 말씀도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계명입니다. 그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왜 사랑의 계명이 새롭다고 합니까?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구절 때문에 새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은 어떻게 사랑했기에? 지금은 수난의 절기, 사순절입니다. 실낙원의 역사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더러움 때문에, 추악함 때문에 인간은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하나님이 대신 씻어주셨습니다.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우리의 추악하고 더러운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그 죄를 씻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성부 하나님의 역사는 아름다움의 역사입니다. 마지막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부활 다음의 기쁨의 하늘나라 역사입니다. 그 사이에 추악한 죄악을 씻겨줄 성자의 십자가의 역사가 있습니다. 수난의 절기는 바로 가운데 토막에 속한 역사입니다. 아름다움과 기쁨을 연결시켜 주는 역사입니다.

고대 희랍에 아리스토파네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름다움을 찬양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사람의 부부의 사랑을 연령별로 구분하였습니다. 10대, 20대, 30대로 나눕니다. 30대 이후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10대의 사랑은 시큼한 오렌지 맛입니다. 설익은 사랑입니다. 20대의 사랑은 달콤한 무화과 같습니다. 30대는 이것저것 다 겪은 떨떠름한 올리브 맛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과일 맛에 따른 사랑의 비교입니다.

동양에 오면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우리가 아는 “부부요”라는 노래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20대는 멋모르고 서로 좋아서 사랑하고 삽니다. 30대는 눈코 뜰 새 없게 서로 바쁜 가운데 사랑하며 삽니다. 40대는 싫증이 났는데 서로 버리지 못해서 같이 삽니다. 50대는 가엾어서 같이 삽니다. 60대는 여태껏 살아준 게 고마워서 같이 삽니다. 70대가 되면 달리 등을 긁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냥 삽니다. 어떻게 살든지 간에 사랑이라 이름하는 것은 멋모르고 사는 것에서 등을 긁어주며 사는 데까지 연결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이 아름다움으로 연결되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마지막에 하늘나라가 임하면 하나님도 기쁘고 인간도 기쁜 그런 사랑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간에 있는 이 수난절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 사랑은 골고다 언덕에서 죽어가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실 다 죽음을 굉장히 두려워합니다만,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우리는 죽는다는 공포, 그게 두렵습니다. 아픈 것이 힘들다기보다는 아플 수 있다는 불안감, 죽는다는 공포, 이것이 우리를 못살게 굽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골고다의 역사가 왜 고통스럽고 힘든 것인가 하면, 아름다움이 없어진다는 불안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화장할 때, 먼저 때를 빼야 하지 않습니까? 땀을 씻어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화장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 인간이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러워진 때, 곧 실낙원의 역사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입어야 할 것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서, 찢기신 몸에서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이 회복됩니다.

아파서 고생하시는 분들,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아름다움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 질병 속에서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고민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셔서 함께 고뇌하겠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자기 어깨에 메겠다고 하십니다. 함께 죽겠답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왜 죽겠다고 하십니까? 장차 도래할, 성령의 능력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만드는 새로운 세계의 기쁨을 공유하기 위해서 함께 죽겠다는 것입니다. 쓰레기통과 같은 추하고 아프고 힘든 역사 속에 기쁨이라 이름하는 장미꽃을 자기 피와 살로 피워서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의 나라의 선물입니다.

사랑은 오늘 아픕니다. 죄를 걸머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늘은 힘듭니다. 그 속에서 수난을 통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아픈 사랑을 통하여 아름다움과 기쁨이 연결됩니다. 아름다움과 기쁨을 연결하는 아픔이라는 이 그릇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부의 아름다운 창조주 역사에서 출발하여, 성자의 고난 속에서 구원을 꽃피우는 십자가의 역사를 통하여, 성령이 만드신 기쁨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당신이 만드시는 사랑의 역사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 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하나님이 그 전쟁의 아픔 가운데 계십니다. 죄악의 더러움을 씻어 내려 직접 오십니다. 그리고 죄짓는 사람의 아픈 마음속에도 오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천지창조 때부터 종말의 순간까지 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 어디 있습니까? 사랑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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