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돌을 굴리는 노래 / 막 16:1-8

  • 잡초 잡초
  • 387
  • 0

첨부 1


돌을 굴리는 노래
마가16:1-8


사람이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죽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원이나 호텔 같은데 가보면 4층이 아예 없습니다. 어떤 아파트는 4동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3층에서 5층으로 바로 가기도 하고 정히 4층을 표시해야 될 때는 F층 이라 말할 때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라비아 숫자의 4자가 죽을 사(死) 자와 같은 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죽음은 무서운 존재입니다. 죽음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직장을 빼앗아 갑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면 오늘 출근할 수 없습니다. 가족을 떠나게 합니다. 내가 대신 죽어줄 수만 있으면 하고 두 팔을 허우적거려 보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 남겨두고 오라 합니다. 지식도 재산도 다 버리게 합니다. 권력도 명예도 죽으면 당신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만난 음식, 아름다운 옷들, 다 두고 오라고 합니다. 이 보다 더 큰 절망이 있습니다.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도 의학의 발달도 죽음만큼은 정복할 수가 없다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니 영원히 인간의 힘으로는 죽음을 정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전 민요 가운데 상여를 매고 갈 때에 혹은 매장 한뒤에 흙을 다지며 부르는  ‘만가’라고 하는게 있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영영 다시 못 오리라
솥안에 익은 팥이 싹이 틀 때 다시 오랴
소반위에 삶은 닭이 나래칠 때 다시 오랴
한번 가고 못 오는 길 어이 섭지 아니하랴
북망산 마지막 길 내가 서러워 하노라

  얼마나 허무합니까? 얼마나 공허합니까? 형장에서 읖은 시가 있습니다.

  북은 울려 이 내 목숨 재촉인데 돌아다보니 해는 서산에 비꼈구나. 아 황천길엔 주마가 나왔다거늘 오늘밤 이 나그네 뉘 집에 쉬어 갈꼬.

  주님 앞에서 그토록 담대했던 성산문이지만 죽은 이후에 길을 그가 알지 못해서 허망하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얼마나 허무한 노래들 뿐입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허망한 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사망을 이기는 노래를 부릅니다.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죽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멸시하는 노래, 죽음을 비웃는 노래,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를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신문에서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거들랑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로 옮겨 간 것 뿐입니다.”

  제가 한번 집사님이 하는 가계 앞을 지나가는데 문이 닫혀 있어요. 뭘 하나 봤더니 “수리중”에 있습니다. 한참이나 죽은 다음에 그 가계 앞을 다시 지나게 되었습니다. 들어가 보았더니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리모델링 되어서 아름답게 수리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 살아가다 보면 우리 육신이 낡고 병들게 되지요. 어느날 문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 낙원에서 눈을 뜨고 보면 영광스럽게 수리되어 있는 내 집이 나를 부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수리한 새로운 세계로 가는 것 뿐입니다.

  김활란 여사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슬픈 장송곡을 부르지 말라. 천국문에 들어가는 환희의 노래,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 달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의 노래를 부르는 날입니다. 이른 아침 우리가 부활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루종일 우리는 부활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고, 오늘밤은 주님의 피와 주님의 몸에 참여하며 우리가 흘리신 보혈의 피와 그 분의 살아나심 그것이 바로 나의 부활이 됨을 소망가운데 확신하며 노래하는 부활절입니다. 목이 터져라 실컷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의 짐을 짊어지시고 ‘내가 목 마르다 다 이루었다’ 지난 주일 메시지였지요. 그리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운명하시고 사흘째 되던 새벽이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며 따르던 여인들이 주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바르고 싶은 간절한 심정으로 새벽 미명 무덤을 찾아갑니다. 저들은 무덤을 찾아가며 걱정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무덤을 단단하게 인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덤 문을 막았던 돌은 여인들로서는 움직일 수 없는 너무나 엄청난 돌임을 그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무덤 문을 로마 군인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이 돌문을 굴려 줄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이천년전 나약한 이 여인들이 물었던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류들은 어려운 환경에 부딪힐 때 마다 이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 돌을 굴려 주리요” 인생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쩔쩔매고 있을 때에, 이 짐에 돌문을 누가 굴려 주리요.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상처가 나서 아무도 나를 어루만져 주지 못할 때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 것처럼 홀로 고독에 젖어 울 때에 누가 이 상처의 돌문을 굴려 주리요. 인생 살아가다가 얽히고 설힌 문제, 내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막다른 인생의 골목에 서 있을 때마다 누가 이 무덤의 문을 굴려 주리요. 죄를 짓고 쩔쩔 매고 있을 때에 아무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이 죄 짐을 벗겨 주리요.

  죽음 앞에 섰을 때에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도 사랑하는 자식도, 그렇게 소중했던 내 자식의 짐도, 내가 죽음의 짐을 벗겨 줄 수 없을 때에 “누가 이 돌문을 굴려 주리요?” 묻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무덤 앞에서 인간의 생명을 죽음으로 삼켜버린 허무와 절망에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돌을 굴려 줄까?

  묻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여기에 통쾌한 대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허무만을 탄식해 왔습니다. 그렇게 발달한 지식도 과학도 이 돌문을 굴려 줄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땅의 어떤 권세도 부귀영화도 내가 걸머지고 있는 인생의 돌문을 굴려 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이 거대한 죽음의 돌문을 누가 옮길 수 있습니까?

  인생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이 돌이 무엇입니까?

  4절에 보면 “심히 크다”고 말했습니다. 우선 이 돌은 “절망의 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제자들의 소망도 기대도 꿈도 신앙도 다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찍이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말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한 가지 있는데 그 것은 곧 절망이라구요.” 인류역사속에 그들이 다 저마다 끌어 안고 있었던 이 절망의 돌을 누가 굴려 주리요.

  두 번째, 심히 큰 돌은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 도무지 굴릴 수 없는 “죽음의 돌”입니다. 죽음의 돌을 굴린 사람이 있습니까? 이 땅의 제왕들이 죽음의 돌을 굴릴 수 있었습니까? 진시왕의 불로초 불사약이 인생의 죽음의 돌을 굴렸습니까? 여러분 4대 성인들 예수 외에 그 누가? 석가가 공자가 마호멧이 이 땅에 왔던 그 어떤 위인들이 죽음의 돌을 굴려 주었습니까?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무덤을 자랑하고 땅속에 묻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위하여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과 불신으로 붙어다니는 “죄 짐의 돌”이 바로 이 무거운 돌입니다. 인생의 돌이 많고 많지만 모아보면 한 가지 짐 밖에 없습니다. 바로 죄의 짐입니다. 해결점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해결점도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예수 밖에 없습니다.

  네 번째, 예수님의 죽으심과 동시에 허탈감에 빠진 제자들은 제 각기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돌은 제자 공동체를 파괴하는 “실망감과 허탈감의 돌”입니다.

  이 크고 무거운 돌에 도전장을 낸 사람은 건강한 남정네들이 아니라 연약한 세 명의 여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몸이 장사되고 무덤 입구에 커다란 돌을 굴려 막는 것을 보자 수 많은 제자들, 심지어 가장 사랑 받던 베드로와 야고보 마저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무수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과 사랑, 마지막 헌신이라도 베풀어야 되겠다 나선 여인들, 장사된 예수님의 무덤가에 흐느껴 울던 이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대우, 향품을 몸에 바르고 장사되는 이 대접 마저 받지 못하고 묻혀진 사실을 못내 아쉬워 하다가 급히 돌아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여 제 사흘째 되던 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여인들이 무덤가에 다다랐을 때 이미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근심으로 이 시간 오늘 아침 여기에 찾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이 굴릴 수 없어 쩔쩔매고 있는 그 돌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안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오늘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 아침,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위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무덤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돌문은 이미 굴러 갔느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죄악의 짐이 이미 굴러갔습니다. 과거 여러분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예수 안에 돌아오기만 하면 이미 굴러갔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해결할 수 없어 쩔쩔매고 있는 죄악의 짐, 아니 미래에 지을 모든 죄악의 짐까지 이미 굴러갔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권세도 여러분을 정죄치 못할 것입니다. 어떤 마귀의 세력도 여러분을 정죄치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다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죽음 앞에 서서 쩔쩔매지 마십시오. 이 죽음의 문제를 우리 예수님 해결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미 부셔뜨리셨습니다. 지옥의 권세를 이미 멸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모든 짐이 해결되어졌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이미 돌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돌은 이미 굴려져 갔습니다. 죽음의 돌이 벌써 굴려졌습니다. 절망의 돌은 이미 벌써 굴려졌습니다. 죄 짐의 돌은 이미 벌써 굴려졌습니다. 한숨과 염려와 걱정과 근심과 슬픔을 거두십시오. 오늘은 찡그렸던 얼굴을 빛나게 하는 날입니다. 여러분 땅을 보던 눈을 열어서 하늘을 바라보는 날입니다.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는 날입니다. 죽음의 돌문이 굴려져 갔습니다.

  한신대 학장으로 계셨던 김정준 목사님은 그의 젊은날 마산 폐결핵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다르게 하루가 다르게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 나갑니다. 저마다의 얼굴에는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절망과 낙심과 한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준 목사님의 얼굴에는 평화가 넘쳐나고 있었지요. 곁에 있던 누군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선생은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하여 피를 들고 써 내려간 시가 「내가 죽는 날」입니다.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찬송을 불러주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 21장 22장을 끝까지 읽어주오.
또한 나의 묘패에는 이렇게 새겨주오. 단 한마디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구.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소.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 받은 감격의 눈물이리라.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소.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 나라 올라가는 내 걸음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추어도 좋소.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내 얼굴에 광채 보여 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소.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거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리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오히려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 뜻이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 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거기서만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그렇습니다. 이 노래는 죽음의 돌문이 굴려져간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환희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때로는 환경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남들이 당하는 모든 질병과 고통을 함께 겪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하고 하나도 다른 것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오늘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부활의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부활의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은, 영원한 나라의 소망과 부활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이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릅니다. 아침에 태양이 떠서 태양이 지겠지요. 똑같이 밥을 먹어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봄이 되면 싹이 트는 것을 똑같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똑같은 환경, 똑같은 문제에 갇혀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태양이 다릅니다. 돋아는 움이 다릅니다. 하나의 계란을 보면서 다를 것입니다. 똑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우리는 성령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하늘의 존재들입니다.

  제 친구 목사의 아들은 어릴때부터 유난히 질문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시골길 밭뚝길 논뚝길을 걸어가는데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저건 뭐야?” “콩 심는 거야.” “저건 뭐야?” “고추지.” “어 고추 심었구나. 거건 뭐야?” “벼 심는 거지.” 공동 묘지를 보더니 “저건 뭐야?” “저긴 죽은 사람을 묻었어.” “어 저건 사람을 심은 거구나.” 이 철없는 아이의 말 한 마디에 섬광처럼 계시의 메시지가 지나갔습니다. ‘아 그렇구나. 죽은 사람은 땅에 묻지만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 예수의 사람들은 묻는 것이 아니고 심는 것이구나.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부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번 땅에 묻히면 영원히 음부의 권세에 갇히는 것이지만, 우리는 땅에 심는 것이구나. 그렇구나 우리는 부활하는 것이구나. 살아나는 것이구나. 새롭게 영원한 세계에 심겨지는 것이구나.’

  오늘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5장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느니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묻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심기우는 사람입니까? 절망과 낙망과 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절망과 사망을 짓밟는 노래를 하는 사람들입니까? 돌문에 갇혀서 신음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돌문을 굴리며 노래하는 사람들입니까?

  지미라는 한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에 온 몸이 꼬인채로 태어났고, 자기 목을 10살이 되도록 가눌 수 없는 정박아로 태어났습니다. 나이는 12살 13살이 되었지만 이제 초등학교 1학년에 겨우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안에 방해꾼이 되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몸을 움직이다가 책상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꽥꽥 소리 지르기도 하고, 그래서 스미스 선생님은 지미의 엄마 아빠를 학교로 불렀습니다. “왜 이 아이를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습니까? 친구들에게 여간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엄마는 흐느껴 울면서 말합니다. “선생님,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부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을 잊지 못하고 엄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지미의 아빠가 눈이 충혈된채 입을 열었습니다. “지미는 친구들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지미를 저 멀리 다른 동리에 있는 특수학교에 보내게 되면 지미는 몹시도 슬퍼할 거예요. 압니다.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 없겠습니까? 선생님, 조금만 더 참을 수 없겠습니까?” 선생님과 헤어져 돌아가는 지미의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고 있는 스미스 선생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 드렸습니다. ‘생명이 이 땅에 얼마 없는 지미를 인내하며 바라보지 못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의 친구 모든 친구들은 모두 지미를 사랑하는데 선생인 내가 지미를 아껴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지미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외아들 지미를 사랑하는 엄마 아빠에게 하나님 사랑을 덧입혀 주십시오.’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플라스틱 계란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빈 플라스틱 계란이었습니다. “얘들아,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단다. 이 속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생명의 무엇을 하나씩 담아오면 좋겠다. 그리고 부활절 전날 꼭 가져와야 된다.” 아이들은 저마다 부활절을 기다리며 뭘 할까? 생각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씨앗을 심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씨를 심고 물을 주어서 싹을 틔어서 왔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예쁜 꽃을 거기에 담아 왔습니다. 그런데 계란 하나는 텅 비어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것 누가 가져왔니?” 고개를 휘휘 저으며 어색한 입술로 “선생님 그거 제가 가져왔어요.” 지미였습니다. “지미는 왜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니?” “우리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대요.” “왜 비어있데” “나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나 때문에 돌아가셨데요. 예수님은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부활하셔서 예수님 무덤은 비어있데요.” “그렇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구나.” 그리고 한달 두달 몇 달 후 지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구들이 빈 플라스틱 29개를 지미의 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거기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지미네 반 친구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듯이 이 땅에 짊어지고 있던 지미의 모든 고통이 벗겨지고 똑바로 세울 수 없었던 고개를 똑바로 들고 이 땅에서 그의 부모도 그의 친구도 선생님도 해결해 줄 수 없었던 지미의 모든 짐이 다 해결된채 영광스런 노래, 빛나는 모습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미의 빈 무덤, 부활의 그날을 모든 사람들이 소망하며 지미의 가는 길을 밝혀 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부활절 아침, 절망의 돌문을 굴리는 노래를 부르는 날입니다. 죄 짐의 모든 돌 문이 굴러간 것을 노래하는 날입니다. 사망의 음부의 무덤의 모든 돌문을 굴리며 노래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돌문을 굴리며 큰 돌을 굴리며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 가슴속에 이 벅찬 감격의 노래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