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가 아는 예수 / 마 14:22-33

  • 잡초 잡초
  • 192
  • 0

첨부 1


내가 아는 예수(마태복음 14:22-33)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4:30-33>

I. 함께 하시는 예수(22-25절)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어떤 사람을 안하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의 설명을 듣고 배워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그런가하면 그 사람의 전기를 읽고 그 사람이 어디서 나고, 어떻게 자랐고, 무엇을 배웠고, 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등 책을 통해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나 혼자만 알고 있을 뿐이요 친분 관계는 조금도 없습니다. 안다고 하는 둘째의 뜻은 함께 만났고 함께 살아서 경험하고 체험해서 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직접 부딪쳐서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친히 알 수가 있을 뿐 아니라 이런 경우에는 깊은 친분 관계가 맺어집니다. 그래서 만나게 되면 안부도 전하게 되고 나의 일을 같이 의논도 하게 되고, 염려도 하게 되고 서로 돕게 됩니다. 그러나 배워서 아는 경우는 돕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예수"를 들어서 알고 배워서 아는 예수가 아닌, 삶 속에서 만나고 직접 체험해서 안다고 하는 뜻에서 정한 제목입니다. 그러므로 바꿔 말하면 "내가 만난 예수"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예수, 내가 체험한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22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1) 뒷일을 함께 하십니다(22절)

첫째로는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 즉 바꿔 말하면 뒷일을 함께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바로 그 앞에 보면 너무너무 은혜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큰 잔치를 열었는데, 그 잔치는 말씀의 잔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남자만 오천여 명이었으니까 여자와 아이를 합하면 적어도 만 명은 넘는 큰 무리가 모였습니다. 장소는 벳세다 광야입니다. 얼마 동안 모였느냐 하면, 3일 동안이나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강사로 모시고 얼마나 큰 말씀의 잔치를 열었는지 그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에 돌아갈 것도 잊어버리고, 또 먹을 것이 떨어진 것도 잊어버리고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집회가 끝났습니다. 집회가 끝나서 돌아가야 되는데 주님은 멀리서 온 사람들이 돌아가다가 시장해서 쓰러질 것까지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분하심을 받들어 거기서 찾아낸 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주님이 축복하시니 그 무리가 다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 동안 수고 많이 한 제자들에게는 한 바구니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런 축복의 잔치, 은혜의 잔치가 벌어진 끝입니다. 바로 이 일이 끝난 후의 장면이 방금 읽어 드린 22절의 말씀입니다. 축복을 나누어 먹고 누렸으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잔치가 끝나자마자 제자들을 재촉해서 건너편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무리를 다 보내고 그 무리가 다 떠나나 다음에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함께 하시고 뒷일까지 돌보아 주겠다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은 크게 은혜를 받았으면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돌아가느냐? 일터로 가라는 것입니다. 직장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직장으로 가고, 은혜를 받았으면 가정으로 가야합니다. 은혜 받고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은 곳은 이곳이지만 일하는 일터로 자기가 처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은혜 받는 곳은 바로 이 모임, 이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가 일터는 아닙니다. 여기서 은혜를 받고 새 힘을 받은 다음에는 여러분의 일터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일터는 가정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일터는 직장에 있습니다. 거기 가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거기 가서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원리이고, 예수님이 오늘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일터가 있는 줄 잘못 아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도회가 일터인 줄 알고, 남전도회가 일터인 줄로 알고, 청년회가 일터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 모여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영적 실력을 키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가서 학생들은 학교에 가서, 청년들은 직장에 가서, 주부들은 가정에 돌아가서, 거기 가서 교인 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일터인 줄로 잘못 아니까 모여서 엉뚱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바다 저 건너편에 너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고 일감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셔서 깨끗이 마무리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뒷일을 돌보아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2) 기도로 함께 하십니다(23절)

다음에는 기도로 함께 하셨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한번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청구서 하나가 하나님께 들어왔습니다. 그 청구서를 보니 마귀란 놈이 베드로를 내 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베드로가 제가 잘 믿는다고 뻐기고 뽐내는데 밀 까부르듯 키질을 하여 탁 쳐내버리면 자기가 안 떨어져 나갈 재간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를 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어떻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 했나니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것은 마귀가 까부른 것입니다. 그래도 쳐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지 아니한 것은 뒤에서 예수님이 기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날 위해 기도해 준다는 것은 대단히 복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 보내신 다음에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까? 은혜 받고 간 사람들, 세상으로 일터를 찾아 일하러 간 사람들, 새 일감이 기다리는 곳으로 찾아간 제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함으로 일하러 간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이름을 적어 놓고 기도할 때마다 기도한다면 나도 그 가정에 참여하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은 기도로써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주님께서는 기도로 함께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참여로 함께 하십니다(24-25절)

다음에는 참여로 함께 하십니다. 바꿔 말하면 직접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이 말씀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은혜가 됩니다. 배가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다 한 가운데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제 4경이었습니다. 4경이란 말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입니다. 성경에 보면 밤을 사경으로 나눕니다. 저녁 해질 때를 6시로 계산해서 첫 3시간을 1경, 또 그 후의 3시간을 2경, 그 후의 3시간을 3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제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 보내고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새벽 3시가 넘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내고 사람들을 흩어 보낼 때가 해가 저물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10시간은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이상한 사건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기 때문에 밤새도록 갔는데도 수리밖에 가지 못한 것입니다. 풍랑이 얼마나 심했는지 밤이 맞도록 갔는데도 갈릴리 바다를 건너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가르는 곳으로 갔는데도 앞으로 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울 정도로 심한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내 사업을 해 나가는데, 내 가정생활을 해 나가는데 고난과 시련이 닥쳐왔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고, 제법 봉사를 한다고 하는데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고난이 닥쳐오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아셨습니다. 다 아시면서도 가만히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냥 두지는 않았습니다. 또 그냥 기도만 하고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그 고난을 보시고 알면서도 내버려두셨습니까? 그것은 조금 전에도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갈릴리 바다로 가기 전에 벳세다 들판에서 엄청난 은혜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바다로 장면을 옮겨가면서 거기서는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 가만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풍랑 속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고난을 한참 당하고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가정이 고난 당하는 것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직접 오셔서 손댈 때까지 주님의 계획이 계셔서, 섭리가 계셔서, 그 때까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 때는 주님이 오실 때 인줄로, 직접 나와 함께 하시는 때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함께 하시고, 기도로 함께 하시고, 참여함으로 직접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II. 도와주시는 예수님(26-32절)


1) 말씀으로 도와주십니다.(26-27절)

첫째로 말씀으로 돕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구경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직접 도우시는 예수님입니다. 친히 도우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이 그 바다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얼마나 큰 도움을 베풀어주시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사업을 해 나가다가 어려움에 부딪혀 고비를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 하는 위기를 만날 때 권세 높은 사람이 한마디만 해 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권세 높은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 해 주시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안팎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집채같은 큰 풍랑이 일어나서 감당해내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습니다. 밖으로부터 위험과 거기서 느끼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큰 물결 속에서 이상한 물체가 나타났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유령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서워 소리를 지르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얼마나 급하면 비명을 질렀겠습니까? 이럴 때 주님은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한마디 말씀에 제자들의 공포가 다 사라졌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가 그렇게 불안해 떨던 제자들의 마음에 큰 평안을 주셨습니다.


2) 구원으로 도와 주십니다(28-31절)

다음에는 구원으로 도와 주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28-32절) "내니 두려워 말라"하시니 베드로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주님 나에게 오라고 명령만 내리십시오. 그러면 뛰어들겠습니다" 하는 자세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의 좋은 면입니다. 풍랑이 있는 바다에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 배입니다. 배는 안전하고 바다는 위험한 것입니다. 풍랑이 있는 바다에서는 사람이 배 안에 있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아무리 수용을 잘 해도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불합리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오라는 명령 한마디에 합리로 뛰어들고 안전에서 위험으로 듭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음에는 실패의 면을 본문을 통해서 가르쳐 줍니다. "오라"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뛰어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걸어갑니다. 얼마나 걸어갔습니까? 주님이 가까이 계셨다면 아무리 캄캄한 바다 위라 할지라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먼 거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으로 걸어간 것입니다. 가다보니 풍랑이 집채같이 닥치는데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앞을 가로막은 풍랑 때문에 풍랑 뒤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우리가 믿음에 실패하는 면이 이것입니다. 내게 어려운 고난과 고민, 좌절, 혹은 불행이 닥쳐올 때 그것과 씨름하고 그것만 아파하다가 그 풍랑 속에서 숨어 역사 하시는 예수님을 놓쳐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내 믿음이 가라앉는 때입니다. 예수님을 놓쳐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도 반드시 영접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풍랑 속에서도 나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데 그 예수님을 내가 놓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죽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주님을 놓쳐 버리면 "죽어, 죽어"하는 일만 생깁니다. 그럴 때에 살 길이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면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짤막한 기도 한마디입니다. 즉 기도가 나를 살립니다.

기도할 때가 바로 주님의 손에 붙잡히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얼마나 급한지 즉시 손을 내밀어 잡아주셨습니다. 급하면 급하게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삶을 다시 얻은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죽음의 두려움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은 내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구경만 하고, 말만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손을 내밀어 개입하사 나를 구원하심으로 도와주셨다"라고 어디 가서든지 간증할 수 있는 간증거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배우려고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체험이요 삶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이런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또 어디가나 간증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32절)

그 다음에는 깨달음의 도움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느니라"(31절-32절). 여기 보면 참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배는 여기 있고 주님은 저기 있어서 분간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바다에 내리자 마가 풍덩 빠진 것입니다. 얼마쯤 걸어가다가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붙잡아 배에까지 왔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서 손을 잡고 왔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히니 바다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풍랑, 즉 고난 위에서도 살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배에 함께 오르니 풍랑이 잔잔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정말 몸둘 바를 모르던 배가, 바다가 조용해지니 평안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시매 평안해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불안에 또 혹은 좌절에 떨던 내 마음이 평안해지고, 시험이 있던 내 가정에 주님이 들어오게 되면 평안해지고, 내 직장에 내 사업터에 주님이 들어와서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 사업에 평안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이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리니까 이렇게 재미있고, 주님의 손에 붙들리니까 정말 신기하고, 주님이 들어오시니 평안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풍랑을 제어할 능력도 있으셨지만 우리들로 하여금 새 체험을 하게 하고 우리를 새 신앙의 차원으로 인도해 주려고 주님이 이런 계획을 하셨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그 고난만 아파하던 제자들이 주님을 통해서 이런 깨달음을 받은 것은 얼마나 큰 도움인지 모릅니다. 내가 모르고 있을 때 깨우쳐 주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주님의 계획을 모르고 불안해 할 때 주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새로운 체험으로 깨닫게 해 주시는 도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III. 키워주시는 예수(33절)


1) 예배하는 사람으로 키우십니다(33상반절)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여기 절헌다는 말의 헬라어 원문은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입니다. 이 프로스퀴네오라는 말은 우리 성경에는 세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첫째는 절한다. 둘째는 경배한다. 셋째는 예배한다고 번역을 했는데, 이 말은 특히 예배한다는 말로 많이 쓰여지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절을 한다는 것은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예수님이 지금 보이는 분으로 안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예수님께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그 때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11시 대예배로 작정하고 드리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억지로 참여하자니까 끌려와서 참여하는 예배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바다에서 주님을 새롭게 만났고, 무섭고 놀라운 은혜를 받고 저마다가 감격스러워서 누가 시작하자는 말도 없이 하나같이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돈을 받고 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한 것도 아닙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반드시 예배하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된 것은 주님께서 키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으로 주님이 늘 키워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아멘의 사람으로 키우십니다(33중반절)

다음에는 아멘의 사람으로 키웁니다. "가로되 진실로"라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진실이란 말과 믿음이란 말을 따로 쓰지 아니합니다. 아멘이란 말은 "믿는다, 진실하다"라는 뜻으로 같이 씁니다. 본문에는 유대 사람들이 쓰는 히브리말은 아닙니다. 본문은 물론 알레또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믿는다는 것과 진실하다는 말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진실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실하지 못하다면 그 믿음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진실과 믿음이 따로 있을 때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진실도 아닙니다. 믿음의 별명이 진실이고 진실의 별명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진실로"라는 말은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로 고쳐해도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내가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자기네들이 잘나서 만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키워주시니 된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의 이만한 믿음도 예수님께서 키워 주신 것입니다.


3) 고백하는 사람으로 키우십니다(33하반절).

다음에는 고백하는 사람으로 키우십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여러분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똑 같은 사람입니다. 돼지의 아들은 돼지이고, 개의 아들을 개입니다. 사람이 아들을 낳으면 사람입니다. 즉 똑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다 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알고 체험한 후에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열 두 사람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가장 정확하게 보고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누가 키워주었습니까? 혼자 컸습니까? 주님이 키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도 이렇게 키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