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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요 20:19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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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봉목사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20:19-23><2003년 4월 27일> 


□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 20:19-23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
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
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
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
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 19절-23절)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동트기 전에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가다가 부활
한 주님을 만났고, 이것은 즉시 제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달려와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하루 사이에 주님의 부활은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었고,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모여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안으로 잠그고 있는데 홀연히 주님이 저
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②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③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
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하셨던 말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는 말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것은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명령>과 <부탁>은 다른 것입니다.
명령은 순종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병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군인사회에서 명령은 생명과 같습니다.
즉 어기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부활을 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널리 증거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왜 이런 명령을 하십니까?
부활은 나의 부활인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 신앙을 소유했다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번도 예수 부활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
는 결과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그만큼 확신에 찬 부활 신앙이 없다는 증거
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큰 기쁨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그 기쁨을 반드시 말하게 되어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아직도 없
기에 전해 줄 힘도 없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남들이 다 부활의 증인이 되었는데 아직도 회의 속에 빠져 있는 교인들
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도마가 그랬습니다. 도마는 어디에 갔다 왔는지 다른 제자들이 다 주님을 만난
기쁨 속에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지만, 그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러다 여드레를 지난 후 주님이 친히 자기 앞에 보여준 후에야 '오! 나의 주, 나
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아빠, 엄마라고 말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만일 때가 지나는데도 말을 못한다면, 얼마나 부모 마음이 답답하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영적인 장애자들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것은 이 세상 속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니지만, 세상을 등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
는 말입니다. 마치 잠수함에 물이 들어오면 안되지만, 그러나 잠수함은 바다 속
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어야 하는 존재들이란 말입니
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다는 것은 세상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누룩
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이어
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교회 안에서만 있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주
님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으
로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세상으로 향해 나가야 합니
다.

끼리끼리만 모이고, 끼리끼리만 즐거워하고 행동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대로 사
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못됩니다. 신앙인의 봉사활동은 교회
안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 오늘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까지는 좋은데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면 안됩니다.
예수의 부활을 모르고 있는 저들에게 그것을 증거할 사명으로 나가야지 세상 사
람들과 함께 어울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기는 <원칙>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삶의 현장에서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서 있지 못하기에 그리스도인들끼리 다른 행동들이 나옵니다.
이번에도 보면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 시위를 하는데 믿는 사람끼리도 서
로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봅니다.
왜 그렇게 나타난다고 보십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을 자기생각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에 보냈습니까?
그것이 요한복음 3: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
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고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을 구원시키려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바로 그것을 알면 됩니다. 이 땅에서 주님이 행동한 그것이 우리의 원칙입니다.
그 원칙이 갈라디아 5:22-24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①사랑과 ②희락과 ③화평과 ④인내와 ⑤자비와 ⑥양선과 ⑦충
성과 ⑧온유와 ⑨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령의 열매야말로 주님께서 이 땅 위에서 실천하신 삶의 모습이요 우리에
게 주신 절대적인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
성령의 열매를 맺히도록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대 사회활동은 바로 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와 함께 우리의 정욕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으로, 그분의 희락으로, 그분의 화평으로, 그분의 오래 참음
으로, 그분의 자비로, 그분의 양선으로, 그분의 충성으로, 그분의 온유로, 그분
의 절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원칙>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3.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이 원칙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사람이 변합니다. 성격까지도 변합니다.
생각이 변하고, 인생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변합니다.
그래서 <부끄러워야 할 것>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만 바라보면서 살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
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말씀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요, 참패요, 절망이요,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조롱이요, 천대요, 창피요, 패배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고 하였습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 위에 육신으로 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움이요 수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찮은 마굿간
에 탄생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성자 하나님의 아
들이 빈민촌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 부끄러운 일이겠
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조금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난을 단 한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의 손에 넘겨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굴욕이요 부끄러움이었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전혀 부끄
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끄러워하였다면, 가난하고 죄 많은 인간
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
과 온유와 절제를 보여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자신의 사명수행
을 기뻐하였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주님의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주님처럼 우리도 부끄러워해야 할 것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면
서 살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이기 때문
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작은 차를 타고 다니면 부끄러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작은 수입을 부끄러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병들거나 가정에 어려움이 오면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런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부끄러워해서는 결코 바른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정직하고 진실되게 산 결과가 가난이요, 육체의 연약함이라면, 그
것은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크나큰 자랑이요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정작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뇌물이요, 불의요, 무절제요, 탐욕이요, 무
분별한 사치요, 허영이요, 방탕이요, 교만이요, 진리에서 벗어난 거짓된 풍요로
움일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돈 하나 갖고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것, 바로 그것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5:11-12절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
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고 하
였습니다.
전도자들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 증거가 성령의 능력입니다.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권능을 말합니다.
인간사에는 자신의 능력이 좌우되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것은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
로 있으리라'고 한 말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개인 인간은 부족하지만  주님의 권능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그를 높
여 들어 쓰십니다. 그래서 전도는 지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아이큐가 높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오늘도 성령 충만하면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하여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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