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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과 존귀의 주 / 히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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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과 존귀의 주
히브리서 2장 5절-9절


우리가 예배시간에 부르는 찬송을 관찰해 보면 찬송이 주로 4절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이 의미하는 것은 기. 승. 전. 결을 의미합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절이 1절입니다. 그 문제를 더 구체화시킨 절이 2절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절이 3절입니다.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그러니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절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의 틀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우리가 보는 신문 만화를 보면 4컷으로 되어 있습니다. 4컷의 만화도 기. 승. 전. 결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음악회에 가서 음악을 들을 때에도 음악이 기. 승. 전. 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4영리도 바로 기. 승. 전. 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 1영리: 당신은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 아십니까?
제 2영리: 죄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3영리: 바로 당신의 그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제 4 영리: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이것이 4영리의 구조입니다.

이런 구조 중에서 가장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3 번째입니다. 그래서 4영리 전도 책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는 진리를 3번째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나누는 히브리서는 성경의 기. 승. 전. 결 부분에서 3번째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도 기. 승. 전. 결이 있습니다. 태어남이 있는가 하면 자라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저는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클라이막스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경험한 인생의 클라이막스는 무엇이었습니까? 사상이 여러분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습니까? 돈입니까? 권력이 여러분의 인생을 돌려놓았습니까? 마약과 술이 여러분의 인생을 망치게 하는 클라이막스였습니까? 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터닝 포인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은 바뀌는 것이요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다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은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환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을 복되게 마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왜 이토록 예수님이 소중한 분입니까? -- 5절

장차 올 세상의 통치권을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천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천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천사는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에게 주지 않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소중한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우리 눈에 보이는 분에 의해서 인도함 받고 싶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거의 모두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입니다. 사상입니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힘으로 지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눈으로 보고 만지고 느낀 바 된 예수님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를 보고 계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직접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웨슬레가 임종 직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나는 지금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체력이 떨어져서 시력이 없어 졌습니다.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점점 기력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주님께서 지금 내 곁에 계십니다.”

여러분! 이런 웨슬레의 경험은 초대교회 스테반이 한 경험입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스데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일어서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은 이데올로기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데올로기에 충성해서 죽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직접 보는 사람들입니다. 천사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은 보이는 분이십니다. 사상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천사를 믿겠습니까?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지금도 구체적으로 나를 만지시고 나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믿어야겠지요? 왜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6절

이 말씀은 시편 8편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말씀하면서 시편8편의 말씀을 지금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이 6절부터 8절의 말씀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이 시편 8편을 암송하고는 있었지만 어디에서 말씀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인자라는 단어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더 확실히 구분이 됩니다. 사람은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인자는 son of man 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성경 공부를 처음 할 때 인자라는 단어가 나와서 참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 주신 고모님 성함이 인자거든요. 그래서 저는 성경에 우리 고모님 이름이 나오는 구나 라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해보니 인자는 우리 고모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고모님은 예수님과 같은 이름을 갖고 계시는구나 라고....혹시 여러분 가운데 인자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이 계십니까? 긍지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마음 속에 인간을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이시기에 인간을 돌보시는 것입니까?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6절에서는 인간과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관계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은 만드시고 나서 아담과 하와에게 피조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피조물들이 인간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자기의 이름을 얻기 위하여 아담과 하와 앞으로 조용히 나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앞으로 나오는 동물들에게 각각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순한 양 같은 동물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양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아주 사납게 생긴 사자와 호랑이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들을 사자라 호랑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사자는 호랑이는 사람을 보고 달려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죄를 짓기 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토록 순종 잘하고 같이 놀던 뱀이 어느 날 하와에게 찾아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말을 하는 뱀이 여자에게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뱀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감히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뱀은 이렇게 말을 하고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것입니다. 이 때 여자는 뱀을 야단 쳐야했습니다. 야단 칠 권세가 여자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뱀의 이런 헛소리를 받아 준 것은 여자의 잘못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피조물들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나운 짐승들은 우리를 보고 달려듭니다. 온순한 동물들은 사람만 보면 슬금슬금 도망갑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권위를 사용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 새들이 점을 쳐준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여러분들이 돈을 주고 새가 물어주는 쪽지를 열어본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는 사람과 동일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서 자녀들이 여러분 앞에서 순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자녀들 앞에서 죄를 짓거나 큰 실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녀들 앞에서 실수하고 죄를 지었다면 우리 자녀들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정이 아니라 사자와 호랑이처럼 우리 자녀들은 우리를 향하여 비난할 것이고 덤벼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을 다스릴 권세 위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끝내는 인생이 바로 죄 된 인생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이 다 이렇게 살다가 덧없이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은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다시 6절 보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실 뿐만 아니라 이런 우리를 예수님은 돌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수하고 또 실수한 우리를 버리지 않고 돌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해피 버든이라고 말합니다. 버든은 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겨운 짐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짐으로 함께 하십니다. 이런 짐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행복한 짐입니다. 부부는 서로가 행복한 짐입니다. 저의 집에 행복한 짐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께요. 제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누워서 아내에게 물 좀 떠 달라고 말합니다. 지금 공개석상이니 이렇게 젊쟎게 이야기하지 제가 물 떠 달라고 할 때 그 분위기 아시겠지요? 그 때 아내는 어떻게 합니까? 화를 버럭 내면서 지가 떠다 먹을 것이지 투덜대면서 물 떠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게 행복한 버든입니다. 이 짐이 없으면 투덜대면서 물 떠다 줄 기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투정을 받으시고 지금도 물을 떠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악한 것을 고치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떻게요?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나쁜 속성을 고치시기를 원하십니까?---9절

말이 어렵지요? --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신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음을 맛보신 이유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악한 것을 힘으로 무력으로 고치지 않으시고 반대로 당신의 죽음으로 고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낮은 존재로 계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영광과 존귀와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런 고난을 맛보신 이유는 다 우리를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의 심정으로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지금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때 이들이 갖는 마음은 두 가지 일 것입니다. 하나는 도망하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힘을 합쳐 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것입니다. 도망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힘을 합쳐 대항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면합니다. 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낮아짐으로 이기는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심판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도 이런 심판권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한결 같이 이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도 그렇게 잘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에게 삶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으려고 하면 이렇게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에게는 무력으로 대항 할 권세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십자가로 화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러 다닌 사울을 향하여 복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지금도 심판을 연기하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 우리도 인내함으로 승리하는 백성이 되기를 주님의 임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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