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 요 21:15~17

  • 잡초 잡초
  • 376
  • 0

첨부 1


제목 :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본문 : 요한복음 21장 15~17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장 15~17절 말씀


  주의 복된 날입니다. 주의 복된 전에 나오셨습니다. 혹 나쁜 일이 있어서 상한 마음으로 나왔을지라도 오늘 예배 드리며, 말씀 들으며 우리 심령에 주님 주시는 은혜와 기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제자들의 마음은 모든 것이 이렇게 끝나는가 싶으니 한편으로는 허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거예요.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베드로가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갈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그러면 우리도 같이 가겠습니다" 따라 나선 거예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손에서 놓았던 그물을 다시 잡고 갈릴리 호수로 나선 것입니다. 마음도 편치 않았고, 그물을 던져 보았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은 거에요. 새벽 미명에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3년 동안이나 가까이서 듣던 음성이었지만 아무도 예수님이라고는 기대도 상상도 못했기에 그저 무심코 "없는데요"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밤새 헛수고 했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그물이 무거운 거예요. 이때 제자들이 정신이 든 거에요. 성품이 예민한 요한이 베드로에게 "형님, 주님이십니다" 그랬더니 베드로는 옷을 벗고 있다가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들어 겉옷을 몸에 두르고 물에 뛰어 내렸습니다. 너무도 감격스러웠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작은 배를 타고 고기가 잡힌 그물을 끌고 뭍에까지 나와 보니 큰 고기가 많이 잡혔는데, 153 마리나 잡혔더라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벌써 바닷가에 숯불을 피우고, 생선을 굽고, 떡도 마련해 놓아서 함께 아침을 먹게 되었더라는 거에요. 조반 먹은 후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하신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주 짧고 단순한 말씀인데 여기에는 깊은 듯이, 큰 뜻이 들어있더라는 거예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더러 자신있게 약속하고 장담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되었느냐?" 책망하시지 않았어요. "아무리 그렇지만 그렇게 할줄은 물랐다. 네 속에 아직도 믿음이 남아있느냐?" 추궁하지도 않았어요. 오직 한 가지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그가 회개하기 전의 이름인 시몬이라고 부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가 감격스럽고 반가워서 참을 수 없어 물로 뛰어 들어 예수님께 가까이 나오기는 했지만, 지난 날의 일이 생각나서 죄송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고 있었을 거에요. 그때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한가지만 물으신 거예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는 어부였던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고, 주님의 사랑도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 믿고 은혜를 가장 많이 받고 충성도 많이 한 제자였어요. 그의 신앙고백도 탁월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는 이제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가 큰 실수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그랬더니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때 베드로는 장담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큰 소리쳤는데, 장담하고 다짐했는데, 연약한 소녀 앞에서 수치스럽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자기를 잡으러 온 것도 아니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핍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연약한 소녀 앞에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 부인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좌절감에 빠져있는 베드로, 실패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은혜를 주신 거에요. 

  제 조카들이 어렸을 때에는 삼촌이 제일 무서웠어요. 부모들이 못 가르치는 것, 삼촌이 다 했어요. 지금은 다 장가가고 성인이 되었는데, 어렸을 때의 기억때문인지 삼촌은 지금도 어려워해요. 그런데 한참을 야단을 친후에 "앞으로 또 그럴래? 안 그럴래?" 그러면 "안 그럴께요" 그러면 다짐을 해요. "정말로?" "진실로?" "맹세코?" 거듭 물어보면 "예, 예, 예" 정신없이 긴장해서 대답을 하다가 "말로만?" 그러면 "예" 대답을 해요. 우리가 "주님 사랑합니다" 말하기는 쉬워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고백이 쉽지가 않더라는 거예요. 입술로가 아닌, 말로만이 아닌, 주님 사랑하는 고백이 내 속에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동안 베드로가 거짓으로 주님을 따른 것 아닙니다. 누구보다 잘 믿고, 잘 순종하는 열심있었고, 마음에 확신 있었습니다. 정말로 주를 위해서는 죽기라도 하겠다는 각오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연약한 거예요. 넘어질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넘어지지 않고, 실수하지 않는 완전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은 장담해 놓고도 때로 넘어집니다. 실수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넘어졌을 때라도 주님 의지하고 붙드는 사람을 다시 일으키시고, 다시 들어 쓰십니다. 아멘! 몇 십년을 열심히 믿었고, 교회를 위해서 많이 봉사하고 헌신하기도 하고, 때가되니 직분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설 수도 있어요. 그러나 지나고 보니 주님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거에요.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앞에 물으시는 말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나에게서 다른 것 원하시지 않습니다. 정말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있느냐? 이것 확인하고 싶어하시더라는 거예요. 마음 중심으로부터 대답을 들으시기 원하시더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하셔서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전에 즐기고 사랑했던 이 세상 모든 것들보다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것 조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 내 속에 진실이 회복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이 회복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패 자체보다도 많은 경우에 죄책감 때문에 시달리게 되더라는 거예요.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더욱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 때문에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 다른 것은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더라는 거예요. 실패가 더욱 큰 은혜받고 새로운 세계를 보는 기회가 되더라! 아멘! 

  어느 목사님이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람을 쳐다보지 못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이 너무 무서워서 정면으로 보지 못한 것이 수십년 동안 사람을 정면으로 보지 못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무서운 아버지에 대한 억압이 자신도 모르게 열등의식으로 잠재되어 있었던 거예요.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들어오시는데, 밤이면 도박을 해서 돈을 다 잃어버리고 아침에 집에 돌아와서 화풀이를 집안 식구들에게 다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분노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이 속에 잠재되어 갑니다. 세월이 흘러 큰 목회를 하는 목사가 되고, 아버지가 되었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한 것을 그대로 자기 자녀들에게 반복하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술에 취해 들어오거나, 도박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들에게 "이 자식아 공부도 못한 것이 세상 살아서 뭘 할거냐" "이놈아, 네 아버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이렇게 되었지 않느냐? 너는 좋은 집에서 살고 네가 사달라는 것도 다 사주는데도 왜 못하는거냐?" 호통을 치고 혹독하게 대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에게서 받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된 과거의 상처들이 그 원인이더라는 거예요. 다 잊어버렸는데, 잠재되어있는 쓴 기억들이 자녀에게 그대로 드러나더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깨닫기를 "내가 죽어야 되는데, 아직 안 죽었구나!"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영적인 것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의 모든 과거의 상처도, 아픔도, 쓴 기억들도, 분노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내가 죽을 때 과거가 치유되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내 속에 있는 좋지 않은 부분을 잘라내거나 수술을 하려고 하면 마취를 시킵니다. 완전히 죽여놓고 잘라낼 것 잘라내고 꿰멜 것 꿰메는 거에요. 그런데 죽지 않고 의식이 살아있으면 제대로 치료도 수술도 못하는 거예요. 아프다고 소리치고 견디지 못하니까, 우리의 믿음 생활도 그렇습니다. 많이 알고 많이 말합니다. 그런데 열매도 역사도 일어나지 아니하고, 믿음이 늘 희망 사항이 되고 말더라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죽어야 될 때 안 죽으니까, 소리만 치다가 마는 거예요. 예수 믿고 천국가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에요. 길지않은 인생 사는 동안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내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체험되면 달라집니다. 새롭게 바꾸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이나 상처를 잊어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잊어버리려고 한다고 잊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잊었다고 생각하는 고통이나 상처는 우리 속에 잠재되어 남아있는 거예요.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를 뿐이에요. 상처나 쓴 기억가운데 잊혀진 것이 있고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미 잊혀진 상처도 속에 잠재해 있어서, 언제 어느 때 돌발적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꼭꼭 숨겨두고 잊을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만 합니다. 우리 속에 상처나 쓴 기억들이 잠재해 있는 한 행복하게 살 수가 없어요. 어느 부분에서인가 그것이 나를 얽매이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나도 불행하고 함께있는 사람도 피해를 입게되는 거예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고백하고 치유받아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의 양심의 죄책감을 드러내서 치유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도 치유의 손을 펴셔서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나의 깊은 부분을 어루 만지셔서 회복시키시고,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믿음의 사람으로, 늘 실패와 좌절 가운데 갈등하고 고민하며 찌들려 사는 사람이 아닌, 더욱 튼튼한 영의 사람으로, 승리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기를 원하시더라는 거예요. 부활하신 주님의 손길이 오늘 이시간 우리 심령을 어루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음성듣고 주님을 만남으로, 지난 날의 상처와 쓴 기억들이 드러난 것이든지, 숨겨진 것이든지, 아물고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안 붙들어야 할 것 붙들고 있으면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가 없어요. 전쟁이 한창일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한 젊은 남자가 비행기 폭격 이후에 집에 가 봤더니 자기 아내는 이미 폭격에 죽어있었습니다. 죽은 아내를 확인하고는 어린 아들을 찾아 헤매는데 아들이 없어요. 그런데 방 한쪽에 보니 작은 해골이 놓여 있었는데 그 뼈를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그 뼈를 늘 품에 안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뼈를 앞에 놓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정신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밤 잠이 들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립니다. "아버지, 저예요. 아버지 아들이에요" 아버지가 말하기를 "이 나쁜 놈이 나를 놀려, 죽은 내 아들까지 들먹이다니!" 화가 나서 술병이니 잔이니 닥치는 대로 문을 향하여 던지며 소리를 지르더라는 거예요. 찾아온 아들은 자기가 오랫동안 아버지를 찾아다닌 것을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안 받아들이는 거예요. 진짜 아들이 돌아왔는데, 아들을 받아 들이지 못한 거예요. 결국 남의 뼈를 끌어안고 자기의 아들로 생각하며 살다가 병들어 거리에서 죽게 됩니다. 이 사람은 과거라는 뼈다귀를 품에 안고 다녔습니다. 잘못된 뼈다귀를 안고 슬픔에 잠겨 살았어요. 살아 있는 아들을 만났으나 안 믿은 거에요. 스스로 자기를 죽여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 가슴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끌어안고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머리 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찾아오셔서 "다 내어버리라. 내가 이미 다 해결하였노라! 내가 이미 감당하였노라! 내가 이미 깨끗이 씻었노라! 너희들의 상처를, 너희들의 쓴 기억들과 죄악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노라! 내가 해결하였노라! 내가 다 감당하였노라! 내가 다 씻었노라! 내가 깨끗하게 하였노라 아멘!" 이 시간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가지고 힘겨워하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겨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되어질수록, 내 존재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주님 배반할때의 베드로의 모습은 수치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가는 곳마다 주의 영광드러낼 뿐 아니라 그 인생이 가치있는 인생 되어지고, 존귀한 인생 되어진 것입니다. 자신만 축복받은 것이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을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는 존귀한 존재가 된 거예요. 주님 능력 주시니까 역사가 달라지고, 열매가 달라지고, 그 인생이 달라진 거예요. 우리를 어둡게하고, 우리를 괴롭게 하고, 우리를 실패하게 하고, 우리를 갈등하게 했던 온갖 악한 것들이, 우리를 죄의 종되게 하던 우리 육의 연약한 모습들이 주님 사랑함으로 바꾸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새 힘, 새 능력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우리 속에 있는 낙심과 한이 변하여 소망과 기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는 실패가 변하여 승리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가난과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한숨과 눈물이 변하여 감사와 찬양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속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서, 우리의 가는 길이 새로워 지기를 축원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님의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정이 새로워지고, 회복되어 새 출발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속에 큰 믿음, 견고한 믿음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 인간관계에서 서로 믿는다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신뢰를 잃어버리면 회복하기가 참 어려운 거예요. 한번 기대를 저버리고 배신한 사람을 다시 믿어주는 것이 쉽지 않더라는 거예요. 베드로는 이미 자격을 잃었어요. 이미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믿어 주셨습니다. 배신하고 떠나간 제자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도, 믿을 것도 없다고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사명을 주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이전보다 더 큰 일을 맡겨 주신 거예요. 그리고는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실패했다고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더라는 거예요. 실패한 나를 찾아오셔서, 배반하고 불순종하였던 나를 다시 부르셔서, "내가 너를 믿노라! 내가 너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노라!" 더 큰 계획을 보여주시고, 더 높은 비전을 준비하시고 보여주시더라! 믿으시면 아멘! 열심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힘만 있다고 되는 것 아니에요. 실패하고, 깨어지고, 낙심하고, 그러다가 은혜받고 다시 시작하는 이 과정을 통해서 나를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런 나를 통해서 더 큰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더라! 아멘! 우리의 다짐과 결심, 너무 믿지 마세요. 언제 또 무너질지 알 수가 없어요. 죽을 각오를 해도 안 되는 일 있습니다. "힘으로도 능으로 안 되는 주의 신으로 되느니라!" 주님이 나를 붙드시고, 성령이 나에게 힘주시면 넉넉히 이길 줄로 믿습니다. 승리의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영광 받으시고 나도 존귀한 삶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하는 일은 작은 것도 부담스럽니다. 아까워요. 하기 싫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은 기뻐요. 아깝지가 않아요. 주면서 좋은 거예요. 희생하면서 기쁜 것입니다. 우리 부모의 마음이 그렇잖아요?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는 것,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뒷바라지 하는 것, 돈으로 계산해 본다면 엄청날 거예요. 그러나 부모는 이 모든 것을 기쁘게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힘들어도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하며 자녀를 돌보고 뒷바라지 하는 거예요. 주님 사랑하는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어느 집에서 시골에서 키운 닭을 두 마리 사왔는데, 한 마리는 맛있게 삶아 먹고, 한 마리는 나중에 먹으려고 매여 놓았는데, 풀려서 여기 저기 다니는 거에요. 그것을 잡으려고 온 마당을 쫓아다니고, 옥상에도 올라가고, 집안 여기저기를 다 돌아다니는데,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 참을 그렇게 쫓아 다니다가 숨이 차서 쉬고 있는데, 이 사람의 마음 속에 "네 몸보신 좀 할려고 그렇게 땀을 흘리며 쫓아 다니는 네가 주님을 위해서는 한 번이라도 땀을 흘려 보았느냐?" 이런 마음이 들더라는 거예요. 마음에 큰 찔림이 오고 감동이 오더라는 거예요. 은혜를 받으려면 이런 것에서도 은혜를 받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나를 위해서는, 내 자녀와 가정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애를 씁니까? 얼마나 많이 마음을 쓰고, 얼마나 애를 태웁니까? 그런데 때로는 주님을 위해서는 우리가 너무 소홀할 때가 많더라는 거예요. 형편되는 대로, 여건되어질 때만, 이럴 때가 많더라는 거예요. 

  믿음 생활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는 좋아하는 단계예요. 주님이 좋고, 교회가 좋고, 목사도 좋고, 주변 사람들도 좋고, 봉사하는 것이 좋아서 믿는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좋은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거예요. 어제 좋던 것이 오늘 안 좋을 수도 있더라는 거예요. 이 단계를 넘어서면 의지하는 단계가 됩니다. 주님의 도와주심이 필요하구나, 깊이 느끼고, 주님을 의지하는 단계입니다. 이 믿음도 큰 믿음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붙드는 믿음도 귀한 믿음이에요. 그런데 더 깊은 단계는 주님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이 세워주신 목사를 사랑하고, 주의 일을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하기에 마음도 드리고, 몸도 드리고, 정성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복받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대가를 바라고가 아니에요. 그저 사랑하기에 드리면서도, 헌신하면서도 그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게 됩니다. 그런데 시골길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본 거예요. 왕궁에 돌아와서도, 천사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끝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었는데, 고민이 된 거예요.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신분의 격차가 엄청나지마는 그것은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려 줄 수 있을까? 사랑이 모든 조건이나 환경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려 줄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 여인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을 얻고 목수가 되어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풍습을 배우고, 말을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게 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 마침내 그 여인을 만나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노라고,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으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해요. 나에게 아직도 상식선에서 계산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사랑은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주님 오늘도 나를 향하여서 "네가 나를 얼마나 믿느냐?" "네가 나를 얼마나 따르느냐?" 이것 보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시더라는 거예요. 사랑에는 내가 없어집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아직도 그 사랑은 깊은 사랑은 아니에요. 내 것을 주장하는 한, 아직도 그 사랑은 깊은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자존심도 없어지는 거예요. 아직도 내 자존심 그것이 무엇인지, 자존심이 나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라면 아직 그 사랑은 깊은 사랑은 아니에요. 사랑은 나에게 있는 것, 다 주고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입니다. 옥합을 깨뜨려서 향유를 주님 발에 부었던 여인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헤아리시고 기뻐하며 칭찬을 하신 거예요. 모스크바 박물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는 그림이 있는데, 감옥에 갇힌 한 남자가 쇠창살 틈으로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젖을 빠는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이 생겨난 배경은, 아버지가 반역죄로 "굶어 죽이는 형"을 받았는데, 사람을 산채로 굶어죽인다는 것이 잔인한 형벌이지요. 그런데 굶어 죽을 때가 되었는 데도 죄수가 안 죽더라는 거예요. 이상하게 여긴 간수가 면회하는 장면을 몰래 지켜 보았더니 딸이 매일 면회를 와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먹이고, 돌아가서 젖먹이 아이에게는 우유를 먹이더라는 거예요. 이 사실이 상부에 보고되었고, 딸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하여 아버지를 살려주기로 했다는 실화입니다. 사랑은 없는 길도 만들어 내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많은 수식이 필요가 없어요. 우리의 마음 깊은 속에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생각부터 사랑의 사람이 되어지고, 우리의 눈이, 우리의 손길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것 못 갖추어도 괜찮아요. 사랑의 마음이 내 속에 있을 때, 주님께서 넉넉히 감당할 만한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그 길을 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의 앞날을 축복하시고, 책임지실 줄로 믿습니다.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의 심령과 생활 속에 임하고 체험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511 1.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2. 이전에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