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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애주일] 육체의 가시 / 고후 1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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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육체의 가시
본문 : 고린도후서 12:5~10


  지난 주일이 장애우 주일인데 지난 주일 부활절과 겹쳤기 때문에 오늘
장애우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저는 약 2년 전에 우리 한국 TV방송국에
서 제작한 장애인특별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지
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이 무엇인가를 하나
의 사회적 고발로 만든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사회 전반적 시설
이 장애인들을 고려한 시설이 되어있는가? 그래서 정상인들이 휠체어를 타
고 직접 장애인들과 같이 다니면서 녹화 방영한 프로그램을 기억합니다. 결
론은 이 사회에서는 장애인들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고
그 실체를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TV로 방영을 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대로 말씀을 드리면 장애인들을 위한 노력은 미국
이 가장 훌륭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어느 거리를 가도 장애인이 자기 혼
자 장애인 차를 타고 불편 없이 갈 수 있도록 도시계획이 되어있습니다.
또, 어느 건물이나 교회도 마찬가지로 장애인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화장실을 다녀 나올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있습니다. 또, 장애인들만이 살
기에 불편하지 아니한 아파트도 따로 건축을 합니다. 반드시 부모가 돌보
지 않아도 돌봐주는 국가적 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어서 이용할 수가 있습니
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관심이 가장 많이 갔던 사람들은 장애인들이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정신지체 아
니면 육체적 장애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잘못 생각하면 이 장애인
주일이 오해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장애우들을 정상인들이 생각
할 때 가장 주의할 것이 장애인들을 불쌍하게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말라
는 것입니다. 정상적,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 그것이 장애인을 향한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장애우는 선천적인 경우보다 후천적 요
인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장애인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없습니
다.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성서적으로 본 장애인을 보면, 오늘 성경말씀에 사도 바울이 자신이 장
애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아니하고 있는데, 이
것은 나에게 큰 고통을 주는 '육체의 가시'라, 그리고 '사단의 사자'라 이
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 말은 자신이 겪는 신체적 고통이 작은 것이
아니라 크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말한 것입니다. 대략 몇 가지 추측을
신학적으로 살펴보는데 있습니다.
  바울의 육체 가시는, 그는 시력 장애인이었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합니
다. 바울 서신 가운데 "내가 이렇게 큰 글자를 쓰노니" 글씨가 보이지 아니
해서 볼 수 있을 만하게 크게 썼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는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볼 때 시력의 결정적 타격을 보았다 그
런 해석을 많이 합니다. 잘 보지 못하니까 그것이 육체의 가시가 되어서 하
나님께 많이 호소를 하죠? 그 다음에는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었는데
이 바울은 지독한 외로움에 대한 호소였다 이런 해석도 합니다. 외국에 가
서 혼자 살면서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이 핍박을 계속 겪으면서 그 심
적 고통이 항상 그를 찔렀다 성경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심
히 떨었노라" 그 다음에는 그에게는 아주 극심한 굶주림의 경제적 고난이
있었습니다. 외투 한 벌이 없어서 헌 옷 하나를 외국까지 가져다 달라는 부
탁이 바울 서신 가운데 나오고 있습니다. 날마다 굶주렸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육체의 가시였을 것이다 이런 해석을 또 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세 가지가 다 해당되는 말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를 종
합해서 바울은 육체적 가시의 호소를 한 것이다 그렇게 또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그런 인간의 육체적 가시는 바울에게만 있었는가? 여러분도 저
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애 부분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
장애우들입니다. 장애라는 그 말 자체가 고통의 부분을 말하는 것인데 인간
은 누구나 고통의 한쪽 부분을 지닌 채 살아갈 뿐입니다. 신체적 약점이 평
생을 찌르는 아픔이 되신 교우님들도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면 신체적 아픔이 없는 사람은 아픔이 없는가? '차라리 내가 병들었으
면 좋겠다!' 그런 심정 고통이 큰 사람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때는
가족조차도 나를 찌르는 가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관계
인 남편과 아내도 피차 찌르는 가시가 될 때가 있고, 자식이라고 하는 존재
가 평생 나를 찌르는 가시 역할을 하는 때도 있고, 더 심각한 것은 내가 나
를 찌릅니다. 어떤 때는 평생을 살면서 물질이 나를 찌르고 혹은 애정이 나
를 찌르고 이웃이 나를 찌릅니다. 저는 아주 큰 사업가가 사업의 성공을 위
해서 외국에서 회담을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는데 저한테 그런 상담을 했
습니다. 그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실패를 하고 이 비행기가 가다가 추락
을 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고 저한테 말을 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자기 회사 직원들이나 우리 가족들에게 내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망하는 소식을 가지고 가는 한 기업인의
아픔을 목사한테 와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 가시가 안 빠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 빠
지느냐? 바울 선생은 오늘 기도를 해도 안된다고 그렇게 바울 자신이 말하
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
니" 하나님의 대답은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가만 두어라! 안빼주겠다!"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바울이 세 번 기도했다
는 말의 신학적 해석은 이렇습니다. 오늘 아침에 한번 그 다음날 한번 그리
고 저녁 나절에 또 한번 그런 간단한 기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이 그렇게 경솔하게 기도한 것을 이렇게 심각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유대
인들의 기도 문화가 있습니다. 한 제목을 놓고 40일 기도합니다. 예수님도
40일 금식 기도하신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한번이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바울 선생이 그러한 유대인의 기도 문화대로 기도하였기 때문에 "나
는 한 제목을 놓고 40일을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아침에 한번 중얼거리고 점심에 한번 중얼거리고 저녁에 한번 중얼거린 그
기도를 이렇게 심각하게 기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고 하나님의 일을 가
장 많이 하는 성자스러운 그 사람의 그러한 심각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
시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큽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기도해서 뭐하느냐 말
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날마다 죄짓고 바울의 기도도 안들어주시는 하
나님께서 우리 기도는 들은 척도 안하실텐데 어떻게 우리가 기도생활 할 것
인가? 이런 갈등을 갖게 됩니다. 바울의 기도는 그 가시가 빠져나가는 것보
다 더 큰 응답이 왔다고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
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바울이라고 하
는 네가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 가시가 계속해서 너를 찔
러야 하기 때문에 만약 그것을 뽑아버리면 너는 그렇게 큰 일을 할 수가 없
기 때문에 내가 그냥 두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우리들은 내가 생각한 마음의 방향대로 되어진 것
을 응답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
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처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심각한 세 번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응답
을 주셨는데 그 응답이란 "너를 찌르는 그 가시를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
라 계속 너를 찌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너의 기도의 응답이다." 왜 계
속 찌르게 하시는가? 오늘 여기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더 쉽게 번역하면 "네가 지
니고 있는 그 약점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너에게서 나타날 것이다! 그것
을 내 은혜라고 말한다!" 그렇게 응답을 받고 바울은 그때부터 자신의 약함
을 자랑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이 찌르는 가시, 나에게 주어진 이 약점,
이런 것들이 나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 우리가 한번 영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큰 유익이 있습니다. 육체는 찌르는 게 아
프지만 영적으로 큰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는 몇 가지 구분해 볼 수가
있는데, 약점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보다 죄 지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9장 41절
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고 하
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장애우들도 죄의 문제는 가지고 살아갑니
다. 그러나 훨씬 적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느 나라나 흉악범들이 있도
록 되어 있습니다. 또 죄의 질이 매우 고약한 중범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장애인들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한 달에 한번씩 교도소로 갑니
다. 지난번에 저도 가서 설교하고 왔습니다. 한때 저는 성북 경찰소의 유치
장 담당자였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모두가 다 신체
가 건강하고 나이가 젊고 외형적으로 보아서 아무 장애를 볼 수 없는 완벽
에 가까운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 흉악범이 되었지, 휠체
어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 중범자 되는 것 보셨습니까? 우리 시각장애인이
범죄자가 되는 것 매우 드문 일입니다. 장애인들은 세상에서 죄를 지을 가
능성에 있어서 그것이 매우 적은 영적 은혜가 있습니다.
  저는 첫 번 목회지가 홍파 복지원! 옛날에는 한국 맹인 대린원이라고 그
랬습니다. 장애우인들만 있는 교회에서 함께 제가 목회를 하였는데 거기서
제가 몇 년 목회를 하면서 정상인들보다 죄는 훨씬 적게 나타나는 것이 분
명한 것을 배웠습니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
든 사람들이 이 장애인들 같이만 착하게 살면 이 세상은 참으로 평화로운
세상이 되겠다는 그런 생각이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약 10년 전에 미국 교
육계에 큰 화젯거리가 미국 국민의 화젯거리로 등장을 했습니다. Harvard
대학에 교수인 헬리누엔 박사께서 갑자기 그 교수직을 사임하셨기 때문에
이 헬리누엔 박사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대학 교수이기 때문에 그가 만
약 책을 출판했다 하면 무조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20권의 책이 모두 그랬습니다. 어려서부터는 천재 신동이라는 그런 이름으
로 자라났고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가장 인기 높은 그런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바라는 그 교수직을 갑자기 그가 초개같이 내버리
고 무엇을 했느냐? 장애인 집단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데이브 브레이크
복지원이라고 하는데, 내가 여기 가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가서 하는 일이
뭐냐? 정신지체인들 뒷바라지하는데 그들이 똥싸면 치워주고 방 청소해주
고 목욕시켜주고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매스컴들이
온통 기사화 했습니다. 신문 기자들이 얼마나 많이 가서 그에게 인터뷰를
했겠습니까? 왜 이렇게 했느냐고!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내가 이들
을 도와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이들과 같이 깨끗하게 사는
법을 배워보려고 왔습니다." 그렇게 말해서 더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들
이 불쌍해서 도와주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무나 잘 살고 있는 사람들
을 내가 와서 함께 살면서 좀 배우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애우들은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또 영적으로 유익이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우리 장애우들을 보신대로 장애우들이 큰 소리
를 치고 교만스럽게 사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람은 약점이 생기면 겸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 7절에 나타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
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으
니" 바울은 이 찌르는 가시만 없었다면 사실 무한히 교만하여질 가능성이
많다고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가시로 인해서 자
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았다고 바울이 고백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큰 인물
들을 보시면 결정적 아픔의 가시 하나씩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
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라." 하는 약속을 보장해 주셨
습니다. 하나님을 배경으로 해서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
브라함 절대 교만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이 뭐하던 집안인데, 아버
지 데라가 우상 장사하던 사람입니다. 한 代만 올라가도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야곱은 가만히 있어야지 들추어낼수록 온갖 추한 것이 드러
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던 날, 하나님이 야곱에게 결정적 가시 하나
를 주죠? 환도뼈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절름발이가 되었어요. 고통스러운
가시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을 때 아들 요셉을 앉혀놓고 자신의
가장 고통스럽고 가시 부분이었던 그 환도뼈에 아들의 손을 대게 하고 맹세
를 시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이 가시가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
문에 그것 때문에 자신은 겸손해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자신의 장애를 말했습니다. 나는 입이 둔하고
혀가 뻣뻣하다고! 말더듬이 언어장애인입니다. 어떤 분이 방송에 나와서 그
런 말을 하더군요.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다로 가라고 하셨다구
요. 그런데 모세가 말더듬이라서 가나다 소리를 발음 못해서 가나안으로 갔
다고! 베드로는 성격 결함이 있습니다. 실수를 많이 합니다. 급하고 다혈질
적 반응을 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주변에서 가장 사랑 많이 받
은 사람인데, 그러나 출신이 어디예요? 창녀입니다. 삭개오는 신체장애인,
난쟁입니다. 가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 이것만 좀 빼버렸으면 좋
겠는데 이것이 평생 나를 찌르는구나!' 다 가지고 살게 마련입니다.
  가시는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그래서 빠지지 않는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빼려 하지 말고 품어야 합니다. 장애인들은 감사를 더 많이 하
고 살아감이 분명합니다. 장애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간증을 들어보면 눈물납니다. 장애인들은 몇 발작을 걷는 것만 해도 감사
를 드립니다. 하루동안 사고 없이 자기 주변이 지나간 것에 대해서만도 잠
자리에서 얼마나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자는지 모릅니다.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분명한 통계가 있는데 그 많은 나라들이 그들이 고
난을 당할 때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
면 그런 것이 다 물러가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지구 한쪽의 유럽이 가장
풍요한 나라가 되었을 때 더 많은 감사를 드리고 살아야 할 터인데 교회도
안나옵니다. 지금 전세계 유럽 서부 국가들 교인 느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
습니다. 미국은 오늘의 세대에 로마 제국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
데 그렇게 강대한 나라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셨는데 미국 교인은 점점 줄어
들어 갑니다. 제가 소속하고 있던 장로교회만 해도 1년에 2만명 이상 교인
이 줄어가고 있습니다. 풍요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비율! 그래서 하나님
은 잘못 가는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 가시를 주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
게 하시는 것입니다. 평생 빠지지 않는 가시, 원망스럽고 고통스럽지만 그
것이 은혜요 그것 때문에 나는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아무
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릴 때 "나같이
할 일 많은 큰 인물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 나
한테 좀 감사하시오!" 이런 태도가 되기 쉽습니다.
  이 사회가 지금 서비스 경쟁입니다. 기업이 살아남는 길은 서비스다! 오
늘날 모든 사람들은 다 왕대우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서비스가 얼마
나 얼마나 다양해지는지 추할 만큼 서비스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
화권에서는 교인들도 교회에 와서 대접받기 원합니다. 교회는 죽으러 오는
곳입니다. 희생할 것 찾으러 와야 합니다. 올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해서 어
쩔 줄 몰라야 합니다.
  장애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모합니다. 세상에서는 더 좋아질 아
무 희망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이 큽니다. "내 나라
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말입니
다. 가족들이 섭섭하게 생각할까봐 조심하지만 저는 장례식에 기쁨이 있습
니다. '그토록 고생을 하시더니 이제는 주님 품으로 평안히 가셨구나!' 참
잘된 일이라 속으로 생각합니다. '다시는 슬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
픈 것이 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그 평안
의 세계에 가셨으니 참 잘된 일이다!'
  2001년 4월 5일 서울 잠실 야구 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의 시
구자는 두 다리가 없어서 철제인공 다리를 만든 에덤 킹이라는 미국 이름
을 가진 한국 어린이였습니다. 신문에는 이렇게 났습니다. "부모도 조국도
버린 장애아를 Robert King씨가 데려가 이렇게 훌륭히 길러주었다! 그 미
국 Robert King씨 그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을 만들어서 국적을 주고
잘 길러다 데리고 나와서는 그 경기장에서 공을 던지게 했습니다. 그 아저
씨는 외국 어린이를 8명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그렇게 길러주고 있어요. 선
천적 요인보다 후천적 요인이 훨씬 많은 것이 장애우들이라면 우리 모두가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됩니다. 여기 지금 저와 같이 안경을 쓰고
계신 분들은 다 시각 장애인입니다. 이것 벗으면 저는 설교도 못합니다. 사
람이 한 60세 넘어가면 누구든지 치매기가 다 나타나잖아요? 치매 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뭐, 젊은 사람들도 건망증이 너무 심해요. 종로5
가에서 종로5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정상적 아닙니다. 아니, 다리미질
하다가 전화벨 소리 듣고 다리미를 귀에 갖다 대는 사람 정상입니까? 다 치
매 환자입니다. 제가 저 씨애틀 연합 집회를 한다고 강사로 오라고 해서 갔
습니다. 연합 집회니까 목사님들도 많이 오셨잖아요? 그런데 집회 마치고
집회하는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교회 큰 행사가
있는 날 다 잘하고 맨 마지막 순서로 축도 하려고 보니까 아, 그 동네에서
은퇴하신 연세 많으신 노인 목사님이 오셨기에 보통 그럴 때 축도로 대우
해 드리잖아요? 축도해 달라고! "아, 지금 여기 교회에 원로 목사님이 오셨
으니까 마지막으로 축도해 주시겠습니다." 그러고 끝내려고 하는데 아, 이
목사님이 치매가 있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올라오시라니까 올라 오셔서
는 축도를 하시는데 쭈욱 쳐다보더니 축도가 뭔지 아세요? "홍도야 우지 마
라 오빠가 있다." 우리는 다 장애인인데, 목사도 다 장애인이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의 은혜로 볼 수 있는 믿음으로
아픔을 품고 승화시키는 믿음의 선물이 오늘 같은 날 모두에게 주어지시기
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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