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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베랴의 아침식사 /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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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디베랴의 아침식사
성경본문 요한복음 21:1-14


설교내용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입장이 있고 살아가는 입장이 있습니다. 내 입장과 남의 입장은 다 존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이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가 딸의 집에 갔는데 딸이 몸살이 나서 사위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장모가 들어가 보니 설거지 하는 사위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모는 사위에게 "아내가 아플 때는 이렇게 한번씩 하는 것도 좋은거야"하고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아들집에 갔습니다. 가보니 아들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이런 일 하라고 내가 너를 대학공부시킨 줄 아느냐, 제발 좀 바보짓 말아라"는 풍자가 있습니다.

  진리는 절대기준이다

  왜 그런가?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내 것이 귀하면 남의 것도 귀한 줄 알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평범한 진리요 도덕훈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교가 좋은 것처럼 다른 종교도 다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진리에 대한 의미를 성찬식이라는 다른 각도에서 의미를 논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하는 것, 진리를 믿는 것,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항상 절대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설거지 하는 아이를 보는 친모의 입장과 장모의 입장이 다르듯이 그렇게 진리를 대한다면 그것은 진리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입장, 처지, 생각을 뛰어넘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아주 못난 제자들입니다. 제자답지 못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3년간 가르쳤는데 십자가를 지시는 그때를 기점으로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주 못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은 스승을 배반하여 팔았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가면서 쓰러지고 매맞을 때 아무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제자가 있는가 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난 그때부터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 찾아주신 주님

  그런데 예수님은 그 도망치고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날 주님은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후, 주의 날에 다시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또 제자들을 만난 것은 세번째 만남입니다. 이날도 주의 날이라고 보면 됩니다.

  세번째 만나 주신 이 날을 기점으로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지 벌써 두 주간이나 되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두 번이나 제자들을 만나주셨는데도 제자들은 부활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보름 동안이나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두 번이나 만나 뵈었는데도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가지 않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있는 편견이고 불신앙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땅에 계셨는데 40일 동안 주님은 제자들에게, 개인에게, 대중들에게 11번이나 나타나셨습니다. 왜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40일 동안 11번이나 나타났는가? 주님의 부활을 믿어야 될 사람들이 주님을 못 믿고 있기 때문에 믿도록 하시기 위한 주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40일 동안 주님은 이 제자들과 친척들과 그 당시 주님을 따라다녔던 신실한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도록 하는 작업을 40일동안 하셨다는 것입니다. 못 믿고 있는 제자들, 도망쳐 나온 제자들, 옛 직업으로 돌아간 제자들, 스승의 뜻을 이루어 주지 못한 제자들을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못난 제자들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상대합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과 찾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예배 가운데 오십니다. 우리 찬송 중에, 기도중에, 우리가 예배 드리는 이 회중 가운데 성령으로 임하십니다. 말씀으로 임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남이나 자랑이 아니라 주님이 매력을 가질 만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도 주님의 제자들처럼 도망치고 부인하고 세상 것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들을 오늘도 예배를 통하여 변함없이 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못남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디베랴에 찾아오신 주님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 새벽에 찾아오셨습니다. 바닷가에 서 있었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몰라 보았습니다.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지난밤에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보라" 그래서 던졌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때 요한이 베드로를 보고 "주님이시다"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성미 급한 시몬 베드로는 옷을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르고는 주님을 맞이하러 바닷물에 첨벙 뛰어들었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게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물을 끌어 당겨보니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생선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 아침식탁을 차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림같은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식탁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보름 전에 십자가를 지실 날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떡과 잔을 나누면서 성찬식을 거행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아침식탁을 통하여 형식은 다르지만 또다른 성찬의 의미를 가진 식탁을 나누고 계십니다.

  이 아름다운 식탁 속에 주님은 중요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 사랑합니다" "네 어린양을 먹이라"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사랑합니다" "네 양을 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네 양을 치라" 이 중요한 고백을 통하여 주님은 시몬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제2의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자비와 인내의 주님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몇 가지가 느껴집니다. 저 같으면 한 마디하고 먹으라고 하 겠습니다. 주님은 매우 인자하고 자비로운 분입니다. 저 같으면 "야 이놈들아, 여기까지 오려고 도망쳤느냐? 도망을 하려면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가지, 고작 여기까지 와 놓고 도망쳤느냐?" 하고 전부 꿇어 앉혀 놓고 벌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한 사람도 주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제자들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기다려 주시고, 식탁에 다시 초대해 주셨습니다. 이 제자들을 다시 제자답게 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식탁, 그것이 오늘 우리의 성찬예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갖고 있는 이 약점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제자답지 못함이 오늘 우리 안에 다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성찬식탁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식탁을 통하여 우리도 주님을 다시 만나고 회복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서로 만나고 교제하는게 인사하는 것입니다. 인사를 나누는 것과 나누지 않는 것은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특별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을 만날 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비슷한 사람은 인사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인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인사하면 좋겠는데 하지 않습니다. 인사하지 않고 내리면 꺼림직도 하고 다음에 만나면 상당히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사를 한번 하고 나면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식탁의 교제와 행복

  그런데 동서양의 인사가 다릅니다. 서양의 인사는 횡적인 것을 가깝게 하는 인사입니다. 서로 만나면 악수합니다. 육체가 접촉을 합니다. 우리나라 양반들은 아무리 만나도 악수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우리 어르신을 만나면 악수하지 않습니다. 사돈들이 만나도 악수하지 않습니다. 동양은 횡적으로 인사하지 않습니다. 서양은 더 반가우면 포옹하고, 더 반가우면 얼굴 비비고, 키스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인사할 때 서로 귀를 맞잡고 얼굴을 가까이 하고 혀를 날름거립니다. 그것이 인사입니다. 아뭏튼 서구식 인사는 횡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식 인사는 높낮이를 따집니다. 그래서 절을 합니다. 낮은 사람이 절을 통해서 자세를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낮은 자세를 갖추어야 인사입니다. 악수를 해도 아랫사람이 더 고개를 숙여야 인사가 됩니다.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경에서 중요한 인사의 의미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가까워지려면 다정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인사중의 인사는 식사를 같이 나누면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식탁이라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주 다정하게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깊은 대화를 하고 나면 잘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서로 티격태격 해도 식사를 같이 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깊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식탁을 통하여 못난 제자들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자기 자신을 드러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도망치고, 갈릴리 바다로 돌아와 버린 제자들, 주님을 실망시킨 이 제자들처럼 오늘 우리도 그런 약점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성찬의 은혜를 나누는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주안에서는 하나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확인입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겠다는 이 고백이 바로 성찬을 나누는 일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먹고 마시는 이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자녀다움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성찬의 은혜를 함께 누리고 이렇게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환경에서는 상식 속에서,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다' '불신앙이다' 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계시 받지 않아도 상식적으로도 구별되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영적인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성찬의 은혜를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는지 압니다. 우리는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세번씩이나 찾아오게 만드는 제자들의 이런 모습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함께 먹고 함께 일하고 함께 사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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