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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란 무엇인가? (태신자 초청주일) -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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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기독교란 무엇인가? (5/11) 태신자 초청주일
본 문 요 3:16
설교자 박봉수 목사
 
  미국에서 있었던 엉뚱한 실화입니다. 어느 부자가 신문에 이런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누구든지 정말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한다면 그 사람에게 상금으로 백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단 만족한 삶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기가 만족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모여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상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부자가 묻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정말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면 왜 백만 불이 또 필요합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먹고 살기 힘들 때 그 부족함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생사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먹고 살만해 졌습니다. 그러면 만족함을 느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그 부족함은 그대로 남아 있고, 오히려 또 다른 부족함을 느낍니다. 삶의 질에 대한 부족함입니다. 남들처럼 여행도 다니고, 레저도 즐기고, 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해 보고 싶은 부족함을 느낍니다.

  자살에 관한 여려 가지 통계조사 보고를 요약해 보면 자살률이 가난한 사람보다도 부자가 훨씬 더 높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전문직종의 자살률이 평균 일반인보다 높고, 특히 의사의 자살률이 일반인의 3배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살기 좋은 스웨덴이나 스위스 같은 나라의 자살률이 가난한 나라의 자살률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잘 살게 되면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부족함이 있고, 잘 살면 또 잘 사는 대로 부족함이 있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의 불행의 원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족함을 느끼지만 채울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좌절을 겪습니다.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도 느낍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채울 수 없는 부족함의 그 깊이에 절망도 느낍니다. 여기서 우리 인생은 깊이 불행을 느낍니다.

  그런데 성경 시 23:1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자기는 인생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0:10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우리 인생을 풍성케 해 주는 종교입니다. 우리 인생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종교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인생의 행복을 누리도록 해 주는 종교입니다.


진리 때문에 풍성합니다.

  희랍의 철인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켜 들고 아테네 한 복판을 활보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둡다 어둡다” 외쳤다고 합니다. 대낮인데도 진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 밤중과 같다는 것을 풍자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최첨단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지식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 게놈 지도까지 완성되어서 그 복잡하다는 인간의 유전자까지 밝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 인간이 모르는 부분이 거의 없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참 진리에 대해 여전히 인간은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진리에 관해서는 여전히 짙은 어둠이 우리 위에 덮여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쇼펜하워라는 사람이 한번은 어떤 공원에서 벤치에 앉아 홀로 깊이 무엇인가 골똘히 사색에 잠겨있었답니다. 긴 시간 사색을 하는 바람에 해가 지고 공원 문 닫을 시간이 되도록 그 자리에 앉아있었답니다. 공원 지기가 웬 노인이 오래도록 한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갈 곳없는 노인인 줄 알고 내 쫓으려고 소리를 버럭 질렀답니다. “당신 누구요! 어디서 왔소!” 그 소리에 쇼펜하워는 눈을 번쩍 뜨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어디서 왔느냐고, 내가 지금 그걸 생각하고 있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이러고 있소!”

  그렇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그뿐 아니라 여전히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지식은 넘쳐나지만 정작 진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여전히 진리에 눈멀어있고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 1:9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진리의 빛이 이 세상에 비추었다는 것입니다. 그 빛이 진리의 어둠을 몰아내고 참된 진리를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보여주셨고, 가르쳐주셨고,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요 1:19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숙제를 냈답니다. 내일까지 이 교실을 가득 채울 것을 가져오너라. 어떤 아이는 풍성으로 교실을 채워보려고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솜으로 가득 채워보려고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종이로 채워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자기가 채워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방에서 초 하나를 꺼냈습니다. 성냥으로 촛불을 밝히자 이내 방안은 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빛 되신 예수를 영접하면 우리 심령에는 진리로 가득 차게 됩니다. 과거에 모르던 놀라운 진리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잘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참된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믿음 때문에 풍성합니다.

  사람은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길거리에 나설 때 중앙에 노란 줄이 하나 그어있습니다. 그 선 저 너머의 차들이 이 선을 넘어오지 않을 것을 믿고 차를 운행합니다. 비행기를 탈 때 제대로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비행해 줄 것을 믿고 탑니다. 고층 빌딩에서 일하거나 거주할 때 그 빌딩이 무사히 거기 그렇게 있어줄 것을 믿고 삽니다.

  그러나 때로 그 믿음이 송두리째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저쪽 편 자동차가 중앙선을 넘어와서 내 차와 충돌을 합니다. 날아가던 비행기 문이 열려서 수많은 사람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고층 빌딩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려 수많은 사람들이 잿더미에 함께 깔려버립니다.

  믿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또 믿을 수 없는 것이 세상사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염려 걱정이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자기 실력 의지하고 삽니다. 자기 건강 의지하고 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식 의지하고 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아 놓은 돈 의지하고 삽니다.

  그러나 때로 이런 것들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자기 실력이 하루아침에 인정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자리가 흔들립니다. 건강도 하루아침에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자식들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습니다. 보증 잘못 섰다가 있는 돈 다 날립니다. 이렇게 될 때 내 인생도 흔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믿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입니다.

  한 번은 늦은 가을 산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낙엽도 지고 바람도 무척이나 쌀쌀했습니다. 뱀들도 다 동면에 들어갔고, 다람쥐 청솔모들은 겨우내 먹을 것들을 챙겨놓느라 부산했습니다.

  그 때 산비둘기가 제 앞의 나무에 날아와 앉았습니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산비둘기는 다가오는 추위를 어떻게 넘길까? 먹을 것은 준비했는지? 추위를 피할 준비는 했는지? 괜히 제가 걱정이 됐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산비둘기는 걱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 눈에는 산비둘기는 정말 믿음이 좋아 보였습니다. 너무도 태연했고, 오히려 찬 바람 맞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실제로 염려는 사람만 합니다. 걱정도 사람만 합니다. 저는 개가 염려하면서 머리 싸매고 누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들판의 참새가 앞날을 걱정하면서 자기들끼리 모여 한숨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사람만 하는 짓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요 14:1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아갈 때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하나님의 명령만 따라 나셨습니다. 우선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마실 것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광야의 날씨에 대비한 준비도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만 믿고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준비해 주셨습니다. 만나라는 전무후무한 음식을 준비하셔서 아침마다 이슬처럼 내려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불기둥으로 밤의 추위를 피하게 해 주셨습니다. 구름기둥으로 낮의 태양을 막아주셨습니다.

  저들이 준비한 것은 오직 믿음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신 일이 없습니다.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온 저들은 한 마디로 담대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히 11:38을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우리 안에 믿음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상황과 주변 여건과는 관계없이 믿음 가운데 굳게 서게 됩니다. 그래서 담대해 집니다. 염려 근심 두려움이 없는 삶 바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랑 때문에 풍성합니다.

  우리 문화의 핵심 주제는 뭐니뭐니해도 사랑입니다. 영화, 드라마, 음악, 소설 10이면 8, 9가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 사랑은 아픔과 상처가 있는 사랑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이라고는 하나 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릭 프롬이란 사람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란 책에서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성숙하지 못한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성숙한 사랑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해서 그대를 사랑하는 사랑”이랍니다. 이에 비해서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랑”이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숙치 못한 사랑은 나를 위한 사랑이고, 성숙한 사랑은 너를 위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하면서도 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랑이 나를 위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한국인이 뽑은 가요 100이 선정돼서 소개가 됐더라구요.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지는 몰라도 1위가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더군요. 저는 그 노래를 정확하게 잘 모릅니다. 그러나 몇 소절이 기억이 납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아무나 하나”

  물론 그 가사 뜻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글자 그대로 보면 이 말은 성경 말씀입니다. 왜냐구요? 성경에서도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 1서 4:7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간단히 요약해 보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을 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로 다섯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가 관심입니다. 사랑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는 말이죠. 둘째는 책임감입니다.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이해입니다. 서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아껴주는 마음입니다.

  물론 이런 기술들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필요한 것이죠. 사랑은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만 사랑으로 실천이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전 13: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러분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것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을 까요? 한 마디로 불가능하죠.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지만 주님이 힘주시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저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자식을 둘이나 죽인 원수 중의 상 원수를 자기 양아들 삼아서 돌봐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삶 그 삶은 복된 삶입니다. 사랑받기 보다도 사랑하는 삶은 정말 풍성합니다. 멋있고 아름답습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진리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세상을 올바로 보게 해 줍니다. 믿음으로 우리 마음을 담대하게 해서 세상을 용기있게 살게 해 줍니다. 사랑으로 우리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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