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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여인의 기도 / 마 15: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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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인의 기도
(마 15:22∼28)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약 50∼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시다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본문에는 그 여인이 단순히 가나안 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7장 26절에 따르면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로'는 '시리아'를 의미하며, '보니게'는 '페니키아'를 가리키므로, 그 여인이 시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페니키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여인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질병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여인은 자신의 딸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께 나아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하여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께 소리지르는 여인을 돌려보낼 것을 부탁하자 예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라고 냉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예수께 좀 더 다가와 무릎을 꿇고는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다시 한 번 간청했습니다. 애원하는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난데없이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즉시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들으시고 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본문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때에 그 여인의 딸이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간청하는 여인을 대하시는 주님 의외의 태도와 말씀이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하는 자세와 그 여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기도의 장애물과 그 장애물들을 어떻게 극복해 가야하는 지에 관한 소중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우리가 기도하면서 넘어야 하는 세 가지 큰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장애물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아무 응답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반응하지 않으신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치 병든 딸을 위해 울부짖으며 간청했던 여인을 향해서 예수께서 침묵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왜 처음에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간청에 대해서 아무 반응도 하시지 않고 침묵하셨을까요? 우선 침묵은 무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해서 침묵으로 이미 반응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무반응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에 따라서는 우리의 기도에 반응하시고, 때에 따라서는 반응하시지 않는 그런 분이 결코 아닙니다.

시편 34편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귀는 의인들의 부르짖음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다른 형태의 반응일 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면 부정적인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그 기도를 중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 중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때때로 침묵은 주절주절 눌어놓는 말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 많은 사람보다는 침묵하는 사람이 훨씬 더 무서운 법입니다. 비록 예수께서 침묵하셨지만 딸의 병이 낳기 위해 간청했던 여인은 침묵 속에 계신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침묵이 전달하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주목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역시 기도하면서 종종 경험하는 하나님의 침묵을 하나님의 거절이라고 성급히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침묵이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서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을 통해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신지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기도의 방해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계속 간청하는 여인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녀가 계속 소리를 지르므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예수께 청을 합니다. 그들의 청이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고 빨리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미였는지 아니면 소리 지르는 여인을 야단쳐서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미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간청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여인을 향한 그들의 우월 의식과 경멸의 태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향해서 갖고 있던 우월감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등장한 '자녀'와 '개'라는 비유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이방 여인이 시끄럽게 따라오는 것이 못마땅하니까 빨리 돌려보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보다 한 술 더 뜨셨습니다. 제자들의 청을 듣고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는 저 여인과 같은 이방인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의 태도와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여인이 무엇을 느꼈을 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자격에 대한 의심입니다. "그래, 나 같은 이방인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예수 앞에 나아가겠는가?" 그처럼 기도의 방해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방해꾼이 바로 기도자로서의 나 자신의 자격에 대한 의심입니다. 쉽게 말하면 "나 같은 죄인이 기도할 자격이 있을까?" "과연 하나님께서 나처럼 부족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실 것인가?" "늘 실수와 허물로 때묻은 모습으로 기도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가?" "믿음으로 사는 삶을 자주 실패하면서 하나님을 찾겠다고 기도하는 것이 어쩌면 위선이 아닐까?" 등등의 의심과 불확신이 기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내 발목을 붙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자격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격을 보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 분의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3:12에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기도할 때, 기도자로서의 내 자격을 의심하게 하는 음성이 내 안에서 들려온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탄의 음성입니다. 자신의 자격에 대한 의심의 소리들 속에서 여인이 오히려 예수께 더 가까이 나아와 무릎을 꿇고 더 적극적으로 간청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 들려오는 의심의 음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세 번째 장애물은 기도자로서의 내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 내 자신입니다. 여인이 예수께 더 가까이 나아와 무릎을 꿇고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애원하자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며 거절하셨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개'는 이방인들, 즉 이방 여인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여인은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저는 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제 딸을 제발 좀 고쳐주십시오." 자신을 가리켜서 개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바로 여러분이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 말씀에 반응했겠습니까?

모욕감과 굴욕감을 도저히 참을 길이 없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치를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수님을 향해 독한 저주를 늘어놓으며, 침을 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을 지도 모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가 종종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바로 내 자신 안에 내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듭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신들의 뜻을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합니다. 심지어는 성경구절까지 인용해 가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정확히 알고 또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도의 종착역은 순종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먼저 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내 마음과 생각들을 솔직하게 말씀드리며, 내 소원과 필요에 대해서 쏟아놓지만 결국 기도하면서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기도를 마치면서 그 뜻에 순종을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하면서 나 자신 안에 있는 죄와 헛된 욕망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욕심을 하나님 앞에서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 놓고 나를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영혼의 귀와 눈이 하나님을 향해 열리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을 내 안에 담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인과의 대화를 마치신 예수께서 여인을 향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라고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크다"는 말은 영어 성경에서는 "네 믿음이 위대하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위대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믿음이 위대한 믿음입니까? 큰 일을 꿈꾸는 것이 위대한 믿음입니까? 큰 일을 계획하는 것이 위대한 믿음입니까? 큰 일을 구하는 것이 위대한 믿음입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십시오. 그 여인에게서 어떤 위대한 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딸이 귀신 들려 절망적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그녀 자신은 이방인으로서 '개' 취급을 받았고,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에게 무릎까지 꿇었고, 침묵과 경멸 속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애원했습니다. 그녀가 예수께 청했던 것도 위대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녀는 자신이 큰 부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도 아니고, 자신의 조국을 위해 간청했던 것도 아니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애원했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신의 딸을 위해서 간청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해서 그녀의 믿음이 위대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녀가 간청한 목적이 위대해서도 아니고, 그녀가 간청한 내용이 위대해서도 아닙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침묵 속에서, 자신의 자격에 관한 의심 속에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종 속에서 계속해서 주님께 간청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위대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믿음은 곧 위대한 응답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즉시 그 여인의 딸이 그 중한 병에서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가져야할 믿음은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믿음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내적인 순종이라면 순종은 그 뜻을 행하기 위한 외적인 믿음이다." 또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시인하면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헤아리려고 끊임없이 묻고(ask), 찾으며(seek), 문을 두드리는(knock) 행위가 기도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경솔하게 낙심하지 않고, 그 침묵의 메시지를 발견하려는 믿음, 기도자로서의 자신의 자격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 앞에 절망하지 않고 중보자 되신 예수의 이름을 끝까지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보다는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 뜻을 순종하기를 결단하는 믿음, 바로 그 믿음이 위대한 믿음이며, 그 믿음이 응답 받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참된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기도하면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겪었던 기도의 장애물들을 겪고는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자신의 자격에 대한 의심, 자신의 뜻을 버려야하는 아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영적인 여행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정거장을 지나고, 기도자로서의 자신의 자격에 대한 의심이라는 정거장을 지나고,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이라는 정거장을 지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기도는 마지막으로 응답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기도 여행이 방향 없이 아무 곳으로나 치달리다가 늘 도중에 중단되는 것이었다면 이제 우리의 기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 역시 수로보니게 여인이 들었던 동일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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