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 / 롬 13:8-10

  • 잡초 잡초
  • 307
  • 0

첨부 1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 롬13:8-10


“사랑”은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영원한 주제일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며 그 이해도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이 그 가장 깊고 넓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아마도 기독교신앙에서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 8절에서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돈을 꾸거나 빚을 지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2)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돈을 꾸거나 빚을 져야 할 경우가 있음을 인정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한 말의 뜻은 꾼 돈을 갚지 않고 빚이 계속 남아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의 요지는 꾼 돈이나 빚은 깨끗이 청산할 수 있지만 사랑의 빚은 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영원한 의무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사랑의 모든 의무를 다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이 영원하고 또 영원히 갚을 수 없이 크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고대 교회의 신학자 오리겐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의 빚은 영원하다. 우리는 그것을 다 갚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매일 갚아야 하면서도 항상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에 관한 본문의 가르침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8절 하반절에서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10절 하반절에서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10계명의 계명들을 예로 들어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것은 우리의 십계명이해뿐 아니라 모든 율법이해를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원리란 부정적인 형태로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찾는 것이며, 그 뜻을 사랑의 동기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서 열거된 계명들만 봐도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했듯이 부정적인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저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탐내지 않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잘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탐내지 않는 행동이나 마음의 상태에 사랑이 함께 하지 않으면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고 부정적인 형태로 주어진 계명들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며 사랑의 동기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진정 잘 받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 한 가지를 예로 들어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의 밑바닥에는 두 가지 근본사상이 깔려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생명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그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따라서 그 어떤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도 그 생명을 좌우할 권리가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조차도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니므로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12:10절에 보면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즉, 하나님 손에 있다)” 했습니다. 따라서 자살행위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또 이 자살행위는 직접적이고 단시간 내에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살행위뿐만 아니라 마약이나 음주 흡연을 통해서 스스로의 생명, 건강, 육신을 서서히 죽여 가는 행위도 제6계명의 정신을 더 넓고 적극적인 의미로 적용하자면 금지된다는 것입니다. 또 육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서서히 죽여 가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서서히 자기를 죽여 가는 행위, 즉 분노, 경멸, 저주 등도 제6계명에 의해 금지되는 것임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내가 직접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남의 목숨을 끊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는 뜻이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그 이상의 깊은 의미, 넓은 의미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의미를 보다 바르게, 온전하게,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 이 계명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준수는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한 위협요소로부터 그 사람을 보호하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만 놔두면 이런 저런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될 때 그 위험요소를 제거해 주는 노력, 그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피하게 해 주는 노력까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안 죽이면 되지, 남이 길 가다가 차에 치어 죽던 돌에 맞아 죽던 그것은 내 상관 아니다”라는 식의 생각은 제6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에서 공사 중인 큰 건물에서 돌이 떨어지는데도 “돌조심 하세요” 하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말 한 마디 해주는 자세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보다 긍정적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남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남의 생명을 아끼려는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제6계명입니다.

마5:21-24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6계명의 의미를 이렇게 발전시키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니까 단지 생명을 끊는 것만이 아니라 형제에 대해서 화내는 것, 바보라고 욕하는 것, 미련한 놈이라고 흉보는 것들이 다 지옥 불에 들어갈 죄이고 살인하는 것과 동등한 행위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좀 더 확대해서 “형제에게 노하지도 말고, 욕하지도 말고, 업신여기지도 말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제6계명을 바르게 지키려면 모든 사람에 대해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할 줄 알고, 아량을 가져야 되고, 인내와 아량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고, 좀 못나 보여도, 좀 답답해 보여도, 좀 굼떠도, 좀 속 썩여도 “저 사람이 왜 저럴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용서하며 할 수 있는 대로 화목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6계명을 바로 지키는 길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6계명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는 단지 생물학적 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같이 귀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생명보다 더 중하게 여깁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명예를 더럽히는 것은 살인 이상의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생명보다 더 중하게 여깁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살인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자유”나 “명예”뿐 아니라 “인격”, “순결”, “감정”, “의지”, “건강”, “평화로운 삶”, “유쾌한 삶”, “질 높은 삶을 살 권리” 등등 사람에게서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짓밟거나 위협하는 모든 행동 또한 살인행위와 마찬가지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남의 자유를 박탈하는 납치, 감금, 이런 것은 살인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또 남의 인격을 짓밟는 온갖 종류의 모욕행위, 중상모략, 근거없이 상대방을 공격하는 모든 언행, 특히 요즈음 익명성이라는 편리함을 이용해서 인터넷게시판에서 남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는 것도 살인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이나 남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도 살인행위에 버금갑니다. 남의 순결을 그 상대방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빼앗는 성폭행, 매춘강요, 인신매매, 이것 다 살인행위보다 더한 것입니다. 또 성추행, 음담패설 등 남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짓밟는 행위도 살인행위에 준하는 것입니다.

대학의 신입생환영회나 입대송별회 등에서 강제로 술 먹이는 행위, 억지로 담배 피우게 하는 것, 노래 못하는 사람에게 굳이 노래시키는 것, 춤 못 추는 사람에게 괴상한 춤 동작을 하게 하는 등 남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행동을 강요하는 것들도 다 살인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 아드레날린이 많이 나와 가지고 암 걸리기 쉽습니다. 그것이 사람 죽이는 것입니다.

금연구역에서 버젓이 담배 피우거나, 오?폐수를 몰래 방류하거나, 음식물에 공업용 화학약품을 섞거나, 작업장에 안전장치를 하지 않거나, 공사를 맡았다 하면 부실공사밖에 할 줄 모르는 것, 술 마시고 운전하는 것, 술 먹고 버스기사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 등 남의 건강을 해치거나 신체에 손해를 가져오거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모든 행위는 살인행위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평화롭고 유쾌하게 살 삶의 권리를 짓밟는 모든 행위는 다 살인행위에 준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조용하게 잠을 자야 되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소음을 만들어 내는 행위, 건강해야 될 사람에게 온갖 먼지를 만들어 내는 행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다리벌리고 안거나 다리 꼬고 앉아서 옆에 사람 불편하게 하는 것, 주차 아무렇게나 해가지고 다른 차 주차하는데 힘들게 만드는 등 남에 대한 사랑의 관심과 배려 없이 자기 좋은 대로만 행동하는 모든 것도 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 멀쩡한 사람을 소위 왕따시키는 것도 무서운 살인행위입니다. 제6계명의 의미는 내 뜻대로 살고 싶은 권리를 남에게도 인정해 주고, 내가 원하는 자유와 안전과 안락함과 유쾌함을 남에게서도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살인하지 말라”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형식으로 주어진 제6계명의 긍정적, 적극적 의미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제6계명을 진정으로 지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아무에게도 그 어떤 악한 일도 행하지 않는 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제6계명의 진정하고 온전한 의미를 따르는 방법, 그 사랑하는 방법을 고전13:4-6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에 우리가 6계명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바로 지키는 방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탐내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까?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누구에게 말하기 참 힘들었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요즈음 젊은이들은 아주 쉽게 잘 합니다. 너무 쉽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말로든 행동으로든 사랑하기를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볍고 왜곡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의 깊은 의미를 알고 그 사랑을 폭넓게 우리 삶에서 실천하는 우리 청년들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어른들부터 그 본을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인성교육이 실종되었고 공중도덕의 교육이 사라져버렸다는 개탄의 소리가 높은 오늘날 교회에서만이라도 청년들이 그러한 사랑을 배움으로써 우리 사회를 건강하고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