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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누어진 운명 / 창 9: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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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어진 운명
창세기 9:18-29
 
  미국의 유명한 호텔 체인점 할러데이 인(Holyday Inns)이 개업기념으로 설문조사를 해서 재미있는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무엇입니까?’
 
연령별로 조사했는데, 55세 이상의 미국인 51%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가정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30세에서 54세의 50% 이상이, 18세부터 34세의 49%가 가정이라고 답했습니다. 가정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답한 사람 외에, ‘자부심’이 있었고, 돈이라고 답한 사람은 8% 있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와 같이 현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운명을 결정짓기까지 하는 가정의 영향력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노아 가정에서도 인류의 운명이 나누어지는 사건이 나옵니다. 인류의 운명이 크게 두 번 결정되는데 한번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함으로 인해 사망과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비록 사망과 죽음 아래 있는 인류지만 노아의 가정 속에서 다시 복된 운명과 저주받을 운명을 나누십니다. 이것이 두 번째 사건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물로 심판하신 후 마음 아파하시면서 노아의 가정을 위로하셨습니다. 이렇게 노아의 가정을 위로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은 왜 이 가정에 저주와 축복의 갈림길을 만드셨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태초에 가정이란 기초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가정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노아의 가정을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 비결을 3가지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은혜를 기억하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노아는 500여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오랜 시간 신앙의 성숙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세 아들과 세 자부는 아버지의 리더십에 복종했습니다. 120년 동안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어도 아버지 뜻에 순종할 만큼 자녀에 대한 노아의 리더십은 살아 있었습니다. 주위 환경이 열악할 때도 노아의 가정은 영향 받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고 사랑했습니다. 인류가 멸망할 때에도 구원받은 의인, 의인 중에 의인이었다고 말씀합니다.

특히 홍수를 통해서 노아와 그 가족들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처절할 만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되 무섭게 심판하심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죄인은 다 죽고 의인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노아의 가정에 죄가 들어오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노아 가정에 죄가 들어온 통로는 무엇이었을까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의 가정에 죄가 어떻게 해서 들어오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생각할 때 노아가 경건하고 진실하며 착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은 다릅니다. 창세기 6장 5절부터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더라”

그 다음 8절 초두에 의미 있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 말씀은 노아의 사적에 계속해서 나옵니다. “노아는 경건하고 진실하고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이렇게 살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와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주님 은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의 노아를 한번 보십시오. 그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노아가 텐트 안에 있었다고 하는데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텐트는 개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독방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노아를 표현하던 상징적인 모습이었는데 오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와 동행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닌 홀로 독방에서 술 취한 모습으로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 은혜가 잊혀지면 우리가 아무리 500년, 10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해왔다 하더라도 지금의 노아처럼 벌거벗고 하체를 드러낸 모습으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인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집니까? 내가 큰일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노아는 참 의롭게 살았고 정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특별히 120년 동안 그는 방주를 지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했습니다. 그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홍수가 지나가고 폐허가 된 땅을 보며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그런데 노아가 하나님 은혜로 땅을 개간했습니다. 포도를 심고 포도 열매가 맺혀 수확할 때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격과 기쁨을 맛 볼 쯤, 노력하고 애써 얻은 좋은 결과로 인해 축복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하는 자기 의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만한 것을 누릴 자격이 있어.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 포도원에서 포도주를 마실 자격이 있어!’ 자기중심적이 되면서 하나님으로부터는 멀어지는 현상이 생깁니다.

노아가 가장 행복하게 살 때는 방주를 지을 때였습니다. 방주를 지으면서 자녀들과 대화하고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정을 통해 이루실 비전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노아는 자기 방에 들어가 있었고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었습니까? 방주가 노아를 지었습니까? 좀 역설적인 질문입니다만, 노아에게 방주가 없었다면 가정이 지켜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며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날마다 더불어 교제하지 않았더라면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방주를 짓는 것 자체가 노아 가정을 지키는 방편이 됨을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까? 어떤 책에는 여러분이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여러분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사실은 알고 보면 내가 주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주일이 내 인생과 삶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때로는 고난이 나를 지켜줍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정을 돌보며 인생의 방향을 잃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 은혜가 떠나면 별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은혜로 살아가고 있지만 ‘오늘 내가 노력해서 우리 가정이 이만큼 됐구나.’ ‘내가 이만큼 해서 그래도 자리를 잡은 거야. 내 가정에서, 내 교회에서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어!’ 이렇게 생각할 때부터 감사는 사라집니다. 은혜와 감사 가운데 하는 봉사는 마음에 감격이 있는데, 내 의를 가지고 하는 봉사에는 불평이 나오고 분노가 생기고 기쁨이 없어집니다. 인생을 은혜로 살지 않으면 그때부터 법이 나옵니다. 도덕이 나오고 윤리가 나옵니다. 도덕과 윤리와 법으로 따지면 우리 중에 당당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신혼부부 모임에 갔을 때 형제자매들이 한 질문입니다. “목사님 가정은 어떻게 지금까지 오셨습니까?” 모두 목회자의 가정에 관심이 많으시죠? 신혼 생활을 시작하는 부부들의 질문에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제가 순간적으로 당황했습니다만, 순간 마음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확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내 계획과 의지, 뜻으로 살아왔다면 지금의 우리 가정은 없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하나님 은혜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사용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살아온 고비마다, 넘었던 골짜기마다 그리고 지치고 힘들고 허덕이던 광야 길을 건널 때마다 하나님께서 붙드셔서 죄 된 길, 옳다고 알았지만 실상 멸망과 죄인의 길이었던 곳에서부터 돌이켜 하나님 앞에 지금 이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하셨음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은혜로 살아갑니까? 내 노력과 내 법으로 살아갑니까? 우리 맘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동행하시고 지키시는 은혜가 조금이라도 희미해진다면 노아처럼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죄가 그 삶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가정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복되게 사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하나님 앞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두 번째 비결은 하나님 언약을 기억하면서 사는 일입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 두려움에 가득 싸이게 되었습니다. 폐허, 재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홍수가 지나간 그 자리를 보면서 노아의 마음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도 두렵습니다. 그리고 폐허가 된 속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갈 것인가 암담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태초의 창조 질서, 창조의 모습, 창조의 언약을 다시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다 하십니다.

아마도 노아는 비만 오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수영하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사람은 나중에 물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120년간 방주를 지었고, 몇 년 동안 물난리를 경험한 사람은 얼마나 더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두시고 노아의 그런 두려움을 없애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동물과 식물이 인간을 두려워하며 인간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가족 안에 질서를 두셨는데 바로 부모입니다. 가정에 부모를 두고 하나님 언약의 징표로 삼으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 주권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계심 그리고 주인 되심을 나타내는 상징말입니다. 선악과와 같이 가정 속의 선악과는 우리 부모입니다.

부모는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잘해 주었기 때문에, 풍요로움을 주었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언약 가운데 두셨기 때문에 부모님이 내게 준 상처와 어려움과는 상관없이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하고 섬기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섬기느냐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섬기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겠냐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하체를 드러내고 자고 있을 때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흉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함의 죄입니다. 이 죄로 일평생 함의 자손은 저주를 받고 종이 되는데, 벌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행위를 따라 갚으신 것이 아니라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함에게 저주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님에 대한 순종의 문제를 철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레위기 20장 9절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신명기 27장 16절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출애굽기 21장 15절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을지니라’ 되어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20장 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공경’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부모에게 동일하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인간이 타락할 때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은 부모를 공경치 않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또한 로마서 1장 30절 타락한 인생 중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대했든지 관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꼭 지켜야 되지만 지킬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을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꼭 지켜야 되지만 지키기 너무 어렵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고 창조 질서의 복이 담겨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주신 하나님 언약의 축복이 있습니다. 축복권을 허락하셨습니다. 본문에도 나오듯이 노아는 자녀를 축복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자녀를 축복하기도하고 저주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또한 야곱도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요셉 또한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축복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부모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을 저주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이 서운하게 하고 속상하게 한다 할지라도 부모의 책임, 즉 하나님 주신 권한을 자녀 축복하는 일에 쓰기를 바랍니다.

자녀와 부모 각각에게 주신 이 언약을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단순히 부모님을 공경하며 그 절대 원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웃으며 조롱하듯 얘기한 함과는 달리, 뒤로 등을 돌리고 들어가 옷으로 아비의 하체를 덮었던 셈과 야벳을 하나님은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축복하시면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허물을 서로 덮어주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가려주신 것이 은혜가 아닙니까? 만약 우리 허물을 들추시고 죄를 드러내시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허물과 죄의 가리움을 받은 인생만큼 복 있는 인생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노인의 연약함을 블렌크너(Blenkner, 1965)는 ① 경제적 의존성(연금, 보험, 용돈) ② 신체적 의존성(퇴화한 신체 기능에 대한 보완) ③ 정신능력의 의존성(기억, 판단 능력에 대한 도움) ④ 사회적 의존성(사회적 접촉의 추구, 고립의 회피) ⑤ 심리적 의존성(감정적 유대, 안락감)의 5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이때 앞의 4가지 의존성은 정부, 사회보호기관, 전문가 등에 의해 해결될 수 있으나 심리적 의존성과 감정적 안정의 문제는 그 의존대상이 가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경우 사회보장제도의 미비로 인하여 이러한 5가지 의존성을 모두 그 가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연세가 지긋해질수록 연약함을 드러내는 부모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려주기를 원하십니다. 경제적 부끄러움을 가려줄 수 있는 자녀, 심리적이고 사회적으로 지치고 힘든 모습을 위로해 줄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할 하나님의 뜻은 가정의 연합입니다. 저는 가끔 왜 가정을 주셨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홀로 살기에 인생은 너무 험합니다. 험하고 힘겨울 뿐 아니라 홀로 있을 때 하나님께 반역하기도 쉽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제일 많이 짓는 때는 바로 혼자 있을 때입니다. 하와가 혼자 있을 때 사탄이 와서 유혹했습니다. 형제 셋과 야벳 없이 함 혼자 있을 때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갔습니다.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혼자 있을 때와 가족들이 함께 할 때는 분명히 다릅니다. 출장을 많이 다니시는 남자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낮에 일을 마치고 밤에 혼자 호텔에 들어갈 때 얼마나 공허하고 외롭습니까? 저도 지방에서 집회 참석하고 저녁에 호텔에 들어갈 때 경험했습니다만, 가족들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유혹이나 시험을 견딜 사람이 있을까요? 가족은 나에게 짐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바로 이 가족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방주를 지을 때 노아는 자녀들과 대화하며 자녀들의 영적 생활을 점검할 수 있었지만, 그가 부유하게 되고 평안하게 되었을 때 가정과 연합하지 못하였고, 이 때 함의 마음에는 죄가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 할 때, 성적 추행을 했다고 해석합니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볼 정도로 그 아들이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연합함이 그 가정에서 사라졌을 때입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지키고 축복하시기 위한 가정의 언약이라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희생을 절대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며 사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오해’라는 시를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가장 오해를 쌓기 쉬운 부모님에 관한 시입니다. 한번 보시면서 부모님과 오해가 풀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몸은 절대로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한 가지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머리만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아무 불만도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만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아는 여자라곤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빨리 불러와 좋은 음식 앞에서 먼저 일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입고 넥타이 메는 것을 싫어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주머니에는 늘 돈이 얼마쯤 들어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 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느덧 쌓아온 우리의 오해로 인해 부모님에 대한 무지가 굳어졌을지 모릅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을 열어 주님의 약속을 다시 한번 품고 우리 가정에 숨겨두신 축복을 회복하는 우리와 우리 가정,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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