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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 미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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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5/18)
본 문 / 미 6:6~8
설교  / 박봉수 목사

요즘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take-out한 커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걸어 다니면서 음식을 먹고, 이동 중에 휴대폰이나 PDA로 일을 처리하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띱니다. 남들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어디서나 ‘방해 받지 않는 나만의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새로운 문화 풍조를 ‘스탠딩 문화’라고 한답니다.

  문화 평론가 김지룡씨는 스탠딩 문화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스탠딩 문화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생겨난 ‘본질적’인 소비 성향을 갖추게 된 사람들의 특성이다……. 커피든 음식이든 ‘본질’ 그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할 뿐 먹기 위한 공간과 시간에 돈을 쓰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스탠딩 문화는 형식보다는 본질과 실속을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호텔 커피숍에 가면 자리 값에 서비스 값에 분위기 값이 포함되고 게다가 세금까지 가산되어 원가 500원도 안돼는 커피 값이 무려 만원 가까이로 불어납니다. 배보다 배꼽이 크고, 본질보다 형식이 더 중요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탠딩 문화는 이런 겉치레나 형식을 걷어내자는 운동이요, 본질을 회복하자는 운동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앙생활도 형식과 겉치레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이 그 중심에 자리 잡을 수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의 타락이요 영적인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간단히 말하면 신앙생활의 본질을 되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형식과 겉치레가 아니고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문제시 되는 형식적 신앙생활을 살펴보겠습니다.

6절을 보면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라고 말씀했습니다. 일년 된 송아지란 레 9:3을 보면 제물 중에 가장 값비싼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제일 비싸고 가장 좋은 제물을 바칠까에 신앙생활의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많은 제물을 바칠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드릴까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맏아들 또는 자식을 제물로 바칠 정도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일에 극단적인 열심을 보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문제는 한 마디로 요약해 보면 6절에 기록된 대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라는 잘못된 신앙적 열심에 있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바칠까, 얼마나 많이 바칠까, 무엇을 할까 라는 문제에만 골몰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를 고심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주일마다 성수 주일하는 것이 귀하고, 정성을 다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갖가지 이름으로 하나님께 많은 것으로 헌금하는 것도 귀하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봉사를 하는 것도 참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빠지면 안 됩니다.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없이 행해지는 열심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은 하나의 일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생활의 본질인 믿음에 대한 관심보다는 신앙생활의 형식인 일에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점점 본질은 간 데 없고 껍질인 형식만 남게 됩니다.

  요 6:28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주님의 제자들도 온통 관심이 일에 쏠려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버릴 각오가 되어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는 자리까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갈 생각까지도 했었습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요 6:29를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일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일보다 믿음이 우선이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인 믿음이 신앙생활의 형식인 일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도 눈에 보이는 형식에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예배를 멋있게 드리고, 주님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드리고……. 이런 일에 몰두하다보면 어느덧 신앙의 본질인 믿음이 훼손되기 쉽습니다. 그 믿음이 형식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다 그 형식마저 무너지게 됩니다.

  사 1:11-12를 보면 형식만 남은 신앙생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믿음 없이 드리는 예배, 믿음 없이 행하는 봉사, 믿음 없이 드리는 헌금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이 허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줍니다. 8절에서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롬 12:1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그 어떤 것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드리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을 가진 것을 드려서 용서받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삶 대신 자기가 가진 것을 드려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드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받고 싶어 하시는 우리의 믿음의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 공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공의란 히브리어로 미쉬파트(fP;v]mi)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재판에서 쓰여 지던 말입니다. 재판장이 공정하게 판결한 것을 가리킬 때 미쉬파트라고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는 마음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 정직하고 정의로운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살 때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옳고 바르게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청백리(淸白吏) 제도는 조선조에 관리들 중에서 청렴결백한 사람만을 선발하여 후세에 길이 거울삼게 했던 관기숙정을 위한 제도입니다. 이 청백리에 녹선된 분들 가운데 중종 때 허백당 김양진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전라감사직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말 뒤에 망아지 한 마리가 따라왔습니다. 이를 본 허백당이 종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처음 전라감사로 부임해 올 때 이 망아지가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보이는구나 전주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냐?”“예 그렇습니다.” 종이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전주감영의 물건인데 내가 어찌 갖고 갈 수 있겠느냐 빨리 가서 나무에 매어놓고 오너라” 종은 즉시 망아지를 끌고 공문 바깥 버드나무에 매어놓고 왔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혼자서 나라 걱정 다하는 체하고 이런 저런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서는 무슨 비리다 무슨 스캔들이다 해서 정치인들이 검찰에 줄줄이 불려가는 것을 볼 때 우리 마음이 답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시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멋지게 차려입고, 정성을 다해서 헌금도 준비하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로 눈 코 뜰 새 없이 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지 못하다면, 우리가 깨끗하지 못하다면, 우리에게 숨겨진 허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우리를 보시며 답답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청백리처럼 이 세상에서 공의를 행하고 깨끗하고 바르게 살다가 예배드리러 나오면 우리를 보시는 순간 그 마음이 시원해지신다는 것입니다.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보다는 우리 예배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기뻐 받으실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인자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dseje)입니다. 이 말은 은혜, 사랑, 긍휼, 인자라는 뜻으로 두루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 이웃의 어려움을 돌아볼 줄 아는 삶, 이웃의 아픔과 함께 할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았고, 또 지금도 그 헤세드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태양 빛을 받아 지구에 그 빛을 반사하는 달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그 헤세드를 이웃에게 나누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 18:23 이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에게 빚을 갚으라 하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여 통 사정을 하기에 불쌍히 여겨 일만 달란트나 되는 거금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가서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에게 빚을 갚으라 하니 가진 것이 없다고 통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임금이 화가 나서 저를 도로 잡아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만 달란트와 한 데나리온의 화폐 가치 차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10만원 정도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는 60만 데나리온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 사람은 이미 자기는 왕에게 60만 배의 빚을 탕감 받은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왕이 볼 때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러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입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셔서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조그만 도움을 바라는 이웃들을 외면하고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떠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만 달란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인데 고작 한 데나리온의 사랑도 나눌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나마 정성껏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살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며 우리의 예배를 진심으로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입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 것은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하고,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삼상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길 것인데 그 때 모든 사람들과 가축들을 다 진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15:9를 보면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제 멋대로 제 뜻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임하셔서 이 모든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사무엘에 사울에게 가서 추궁을 했습니다. 그 때 사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물건이 탐이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 놓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남겨 놓은 것이라고 핑계를 늘어놓았습니다.

  그 때 사무엘에 저 유명한 말로 사울을 책망했습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실제로 사울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러 나갔을 때 하나님께서 사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지 여부를 하나님께서 살펴보십니다. 불 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며 살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를 다윗의 예배처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배는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만든 것, 내가 행한 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고, 신앙의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봉사, 아무리 많은 예배, 아무리 많은 헌금보다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드리는 나를 보십니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받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앞에서 이렇게 찬양해야 합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서”



# 기도/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나를 받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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