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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결혼은 신성합니다 / 마 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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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결혼은 신성합니다
마5:31-32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옛날 어느 마을에 서로를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부부는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건만 이상하게도 아이가 생기지를 않았습니다. 남편의 집안은 자손이 귀했기 때문에 남편의 친척들은 가문의 대를 이어줄 아이가 태어나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에게서는 아이가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부부가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 이혼을 허용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친척들은 그 법에 따라 부부가 갈라설 것을 계속해서 종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문제로 깊이 고민하던 그들 부부는 어느 날 나라 안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어른 한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 분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잘 처리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 어른은 부부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먼저 남편을 불러서 귓속말로 몇 마디 일러주었습니다. 남편은 잘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런 뒤에 지혜로운 어른은 부인을 불러서 역시 귓속말로 몇 마디 일러주었습니다. 부인도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 다음날 남편은 지혜로운 어른이 일러주는 대로 양가 친척들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여러분이 원하시는 대로 이혼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부부에게 여러분이 베풀어주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조촐한 잔치를 열고자 합니다. 부디 모두가 오셔서 석별의 정을 함께 나누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이혼을 위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곳에 참석한 친지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여자가 불쌍하다는 사람도 있었고, 가문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갈라서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잔치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남편은 앞에 나아와서 친척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부부는 그동안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우리 부부가 오늘 이혼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저의 아내는 우리 가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셈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제가 가진 것 중에서 무엇이든지 아내가 가장 원하는 것 한 가지를 이혼 선물로 주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제 의견에는 이의가 없으실 줄 압니다."
그 소리를 듣고 친척들 모두가 동의하는 뜻으로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지혜로운 어른이 일러준 대로 말을 했지만, 정작 자기 아내가 무엇을 요구할는지 남편인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아내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모두가 그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동안에 금은패물을 넣어두었던 보석상자를 요구할거야. 아마도 살고 있는 집을 달라고 할걸?"
그들은 나름대로 추측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내게 약속한 것처럼 내가 가장 원하는 당신을 나에게 주시기를 원합니다."
뜻밖의 말에 모두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멍하게 서 있던 남편은 비로소 아내의 뜻을 깨닫고서 덥석 아내를 끌어안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척들은 그들 부부의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이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아무도 그들 부부에게 갈라서라고 종용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2:16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19:6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임의로 맺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신성합니다. 그런데 이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임의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결혼은 신성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짝지어 주신 우리의 아내, 우리의 남편을 더욱더 지극히 사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에 나타난 결혼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에 복을 주셔서 부부 사이나 또는 가족들 사이에 더욱더 사랑이 깊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결혼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구약성경 첫 머리에 나오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결혼의 기원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세 가지의 중요한 결혼의 원리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결혼은 신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짝지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보시고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시고, 그 두 사람을 하나님은 친히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결혼은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임의로 맺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은 신성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결혼은 독점적입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여러 명의 남자와 여러 명의 여자를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을 만드시고 그 두 사람을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같이 살아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갈라서고, 다른 사람을 택해서 살 수 있는 여지를 애당초 하나님은 만들어놓지 않으셨습니다. 남자는 오직 자기 아내만을 독점적으로 사랑하고, 여자는 오직 자기의 남편만을 독점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결혼은 부부 사이에 독점적인 관계가 맺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결혼은 영속적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연합해서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연합해서 하나가 된다는 증거가 바로 자녀입니다. 우리의 자녀를 보시기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 곧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합해서 하나가 된 것이 우리의 자녀입니다. 몸도 하나이고, 감정도 하나이고, 생각도 하나이고,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합해서 하나가 된 부부가 이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자기의 몸을 둘로 쪼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몸을 둘로 쪼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결혼은 중요한 세 가지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신성합니다. 오직 자기의 배우자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독점적입니다. 그리고 영원불변토록 사랑해야 합니다. 영속적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결혼의 한 가지 대원칙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우리의 아내와 우리의 남편만을, 영원불변토록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대원리요, 결혼의 대원칙입니다.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결혼한 지 50년이 훨씬 넘으셨음에도 정말 다복하게 살아가는 부부였습니다. 믿음도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식사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할머니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습니다. 할머니는 황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습니다. 장례식이 다 끝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자녀들은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지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할아버지는 자기의 자녀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다.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날이다."
그 소리를 듣고 자녀들은 깜짝 놀라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아버지! 오늘은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시던 어머니를 떠나 보내신 날인데 기쁘시다니,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때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엄마는 지금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겠느냐? 나는 너희 엄마가 나보다도 천국에 먼저 간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있단다. 생각해 보아라. 만일 내가 먼저 천국에 갔다면 너희 엄마는 오늘 울면서 나를 땅에 묻었어야 할 테고, 또 앞으로 나 없이 혼자 외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되지 않았겠느냐? 따라서 나는 너희 엄마가 나보다도 먼저 천국에 가기를 내심 바라왔었단다."

그는 결혼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짝지어 주신 자신의 아내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키르기즈스탄에서 사역을 하시는 어떤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나라에는 회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일부다처제를 허용합니다. 그곳에 사는 어떤 남자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을 잘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8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 사실을 알고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깊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그를 불러서 성경을 펴들고 간곡하게 권면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남자는 한 여자만을 데리고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대로 어서 빨리 당신의 부인 문제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한두 달 뒤 그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선교사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제가 선교사님 말씀대로 저의 아내 문제를 깨끗하게 잘 처리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선교사님은 너무나 반가워서 되물었습니다.
"그래요? 잘 됐네요. 그런데 어떻게 처리를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그는 능청스럽게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어제 부로 제가 8명의 아내를 모두 다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제가 딱 한 명만 새롭게 아내를 얻어들였습니다."
이 남자는 결혼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편리대로 생각하고, 자기 편하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혼의 원리를 망각하고 자기 편리대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1절 말씀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또 일렀으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5:20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21절 이하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얼마나 외식적인지 여섯 가지 실례를 들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 예가 살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예는 간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예가 우리가 오늘 살펴보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혼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혼을 하면서도 수치스럽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혼을 하나의 용기있는 행동이나 미덕이 되는 것처럼 간주했습니다. 심지어는 원치 않는 아내를 내보내는 것이 종교적인 의무로까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이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러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나쁜 아내는 남자에게 있어서는 문둥병과 같다. 어떻게 하면 문둥병에서 치료할 수 있는가?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문둥병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또 어떤 서기관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If a man has a bad wife, it is a religious duty to divorce her(만일 어떤 남자에게 나쁜 아내가 있으면 그와 이혼하는 것이 종교적 의무이다)."
그러면 "나쁜 아내" 곧 "버려야할 아내"는 누구인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남편에게 무안을 주었을 경우도 이혼의 사유에 해당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것이 점차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음식을 만들다가 요리를 태웠거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서 음식의 맛이 제대로 나지 않을 경우도 이혼사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 남자들은 별의별 사유를 다 만들어서 아내를 내버렸습니다. 그저 아내가 싫으면 특별한 사유 없이도 무조건 내보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쓰여진 이혼증서를 보면, 이혼사유를 특별히 기록하는 난이 없습니다. 단지 이혼 당사자들의 이름과 두 증인의 이름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받은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결혼해도 좋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여기에 이혼사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만 있을 뿐입니다. 이혼증서만 써주면 남자는 언제라도 거리낌없이 자기 아내를 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혼은 전혀 수치스럽거나 죄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고, 오히려 용기있는 행동이요, 종교적인 의무로까지 간주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구약의 율법을 아전인수격으로 잘못 해석한 결과였습니다. 성경에서 이혼증서라는 말이 가장 먼저 사용된 곳이 신24:1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이혼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에게서 수치되는 일이 발견될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음행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점차로 넓게 확대해서 해석하더니 나중에는 이것조차도 아예 빼버렸습니다. 그저 살기 싫으면 무조건 아내를 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신24:1의 중반부 말씀입니다.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런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비록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이 발견될지라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얼마든지 관용의 마음으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고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내버리는 것이 무슨 용기있는 행동이요, 종교적인 의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가급적이면 이혼하지 말고 같이 살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 아내가 기쁘지 않아서 부득이 내보내야 할 경우에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혼증서를 써주는 것입니다.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이유가 신24: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당시에는 여자에게 경제력이 없었습니다. 혼자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혼증서가 주어진 목적은 무엇입니까? 본시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신24:3-4의 말씀을 봅니다.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찌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찌니라."

남자는 일단 자기 아내를 내어보낼 경우, 두 번 다시 그 여자를 자기 집으로 들여오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재결합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혼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보내기 전에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본래 뜻하고 있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이혼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급적이면 이혼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는 것이 율법의 본래 취지입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도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악용해서 남자들의 정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을 시키고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그 당시 사람들을 온통 성적 방종의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문란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그마치 남자들로부터 다섯 번씩이나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긋지긋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던 당시에는 정식으로 결혼하지도 않고 그저 다른 사람의 첩으로 얹혀 사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 여자만 그러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을 가리켜서 여러 번씩이나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라고 질책하시면서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권세로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분입니다. 율법의 수여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서 신24:1-4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의 참뜻을 우리에게 지금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제가 질문 하나를 드려봅니다. 본시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사람은 남자든지 여자든지 할 것 없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을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음행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혼입니다. 그러니까 이혼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내가 음행하지도 않았는데 정당한 이유 없이 아내를 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위적으로는 헤어졌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원래의 혼인 관계는 원칙상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음행한 연고도 없이 자기 아내를 내버렸습니다. 버림받은 아내는 혼자 살 수가 없으니까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버림받은 여자는 자기 남편 이외의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니까 간음한 셈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버림을 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남의 유부녀와 동침하는 셈이 되니까 역시 간음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또 그 아내를 내버린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여자와 함께 삽니다. 그러면 자기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는 셈이 되는 것이니까 역시 간음죄를 짓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 온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유부남하고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니까 역시 간음한 셈이 됩니다. 이와 같이 이혼은 몇 겹으로 간음을 초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는 마음에 품은 음욕을 간음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혼을 간음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혼은 몇 중으로 간음을 초래하기 때문에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8:11의 말씀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덮지 못할 죄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음행, 우리의 부족, 우리의 간음, 우리의 이혼까지도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결론적으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8:11의 하반부 말씀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두 번 다시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미 과거에 쓰라린 경험을 했다 할지라도 두 번 다시 똑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지금의 나의 아내, 지금의 나의 남편에게 더욱더 적극적으로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아하, 내 배우자가 음행을 저질렀으니까 이제는 안심하고 갈라서도 되겠구나. 성경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구나."
그것을 지금 의도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구약의 호세아서를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얼마나 음란한 여인이었습니까?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내버리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갈라서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내라 할지라도 용서하고 데리고 와서 함께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사랑을 우리의 배우자에게 베풀어주시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한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의를 깨뜨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가르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통 음란한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스스로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외식적인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질적으로 다른 의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가 받아야만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이혼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격차이가 32%로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시댁과의 관계로서 18%를 차지하고, 세 번째가 배우자의 성적인 부정으로 1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경제적인 이유라든지 기타 의견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와서는 잘못된 여권신장의 결과로 인해서 남자가 여자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것보다, 오히려 여자가 남자들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어떤 신혼부부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시어머니가 함께 유원지에 갔습니다. 뱃놀이를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잘 놀다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득 아내의 마음 속에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만일 뱃놀이를 하다가 배가 뒤집혀서 어머니와 내가 물에 빠져서 사경을 헤매게 될 때 남편은 누구를 먼저 건져줄까?"
당연히 남편은 아내인 자기를 먼저 구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연애하던 시절에 남편은 늘 입버릇처럼 아내인 자기 없이는 못산다고 말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궁금한 생각에 남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보, 만일 뱃놀이하다가 배가 뒤집혀서 어머니와 내가 빠져 사경을 헤맬 때 당신은 누구 먼저 건져 줄거야?"
아내는 당연히 남편이 아내인 자기를 먼저 건져줄 것이라는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를 먼저 구해드려야 되겠지!"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아내야 몇 번이고 다시 얻으면 되지만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오직 한 분뿐이지 않소. 그러니 어머니를 먼저 구해 드려야 옳지 않겠소?"
물론 아내는 이성적으로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너무나도 그 말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애정이 식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고민하다가 결국은 이혼상담소의 문까지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상담소장은 아내의 말을 다 듣고 난 뒤에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부인, 그러지 마시고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수영을 배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일을 당할지라도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혼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신성한 것입니다. 우리가 임의로 맺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은 배필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이 믿음을 우리가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짝지어 주신 나의 아내만을 나의 남편만을 영원불변토록 사랑하라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혼의 원리, 대원칙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임의로 나눌 수도 없지만 임의로 맺으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 가운데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분들도 많이 계신데, 내 임의로 맺으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든지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리브가를 짝지어주시기까지 40년을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는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드셔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사도 바울처럼 여생을 혼자 살기로 작정하신 분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이것은 특별한 사람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임을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고 생각하시고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삼으시고, 예수님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위해서 더욱더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결혼은 신성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늘 우리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우리의 아내, 우리의 남편을 더욱더 사랑하고 가족 간의 사랑이 더욱더 돈독해 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늘 화목하고 주안에서 누리는 평강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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