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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모, 어떻게 섬길 것인가? / 룻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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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룻기 1장 16~17절 
제목 : 부모, 어떻게 섬길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되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여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오월 둘째 주일은 한국 교회가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부모,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오늘 설교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는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시어머니를 잘 섬긴 한 여인을 통해서 “부모, 어떻게 섬길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합니다. 우선 룻기에 기록된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어두운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사사시대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의 아름다운 신앙의 이야기는 아무리 어두운 시대에도 주님의 구원 사역은 경건한 남은 자들을 통해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 패역한 우리 시대에 대해서도 소망을 갖게 합니다.

룻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기드온이 사사로 재임하던 기간에 일어난 것으로 대개 생각합니다. 그 당시 베들레헴은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베들레헴-“떡집”이란 뜻입니다. 떡집이란 뜻을 가진 베들레헴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은 시대의 비극이요 역설 같습니다.

이 때 유대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기근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베들레헴을 떠나서 요단 건너 이방 모압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설레는 꿈의 여정이 아니라 배고픔을 면하기 위한 생존의 방편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고향을 등진 가슴 아픈 이민이었습니다.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을 데리고 나선 것은 순간적인 굶주림을 면하게 해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히 따른 행동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엘리멜렉은 이방 나라로 도피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먹고 살겠다고 이방나라로 이주를 하는 행동은 약속의 땅에서 복을 내리시겠다고 언약하신 하나님을 신뢰치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엘리멜렉의 이주는 “믿음대로 살자”가 아니라 “우선 살고보자”는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자주 반복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모압 이주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었다는 것은 이어진 사건들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가장인 엘리멜렉 자신이 죽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의 두 아들도 차례로 죽습니다. 이주 십년 만에 연이은 남자들의 죽음으로 급격한 가족해체를 겪고 맙니다.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차례로 죽음으로 남겨진 것은 슬픔과 절망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함께 고향을 나섰던 하늘같은 남편과 생명 같은 두 아들이 이국에서 차례로 묻었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녀의 삶은 정말 융단폭격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이제 미망인 나오미와 그녀의 두 아들에게 시집온 모압 여자들인 오르바와 룻만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을 떠난 지 십년 안에 남편과 두 아들들 모두를 잃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사별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사람이 겪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자들에게도 고통은 피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처럼 처절하게 소중한 모든 것이 짓밟혀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나오미가 견딜 수 있었는지 상상이 안 됩니다. 정말 그렇게 보면 인간생명은 모질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나오미와 같은 처지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희망이 남아있습니다.# 아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희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룻기 서는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껴지는 시련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거룩한 문서입니다. 이제 곁에 남아있는 며느리들조차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는 처절한 현실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녀의 앞에는 먹구름만 가득해 보였습니다. 홀로된 두 며느리들과 함께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일만 남아있었습니다. 이제 나오미는 자신과 두 며느리들을 위해서 무언가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러죠?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나는 더 이상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비참한 처지에서 고향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귀향하기로 결단합니다. 결단하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마침내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은 그녀의 귀향 결심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자식마저 잃고 귀향하는 나오미가 며느리들의 미래를 생각할 때 그 고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귀향길을 나선 나오미의 눈에는 이국의 풍경이 아니라 자신들의 처참한 처지가 들어왔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말문을 열기까지 무거운 침묵이 세 여인들 사이에 오랫동안 흘렀을 것입니다. 세 여자가 걷는 발자국 소리만 들렸지 아무도 감히 입을 열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즘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그들의 처지가 너무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나오미가 입을 열어 며느리들에게 권합니다.

나오미는 오르바와 룻이 얼마나 자기의 남편들과 시어머니인 자신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준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동일한 사랑으로 그들을 선대해 주실 것을 소원하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도록 축복합니다. “나도 고생했는데 너도 고생해봐라”는 것이 주님 마음이 아닙니다. “나는 누리지 못했지만 너희는 누리기를 바란다”는 나오미의 마음이 주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결혼을 통해 안정된 미래를 복 빌고 있습니다. 복된 가정, 포근한 안식, 믿음직한 남편, 귀여운 자식,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두 며느리가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두 며느리를 그 어미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한 것은 짐을 벗어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고향에서 재혼을 통해서 복된 미래를 갖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그 무엇도 그들을 위해서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두 며느리 아무도 시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소리 높여서 울면서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 나오미의 간곡한 설득이 다시금 시작됩니다.

어쩌면 11절에서 13절은 며느리들과의 대화라기보다는 나오미 자신의 신세타령처럼 들립니다. 자신을 따라나선다고 하면 너희들이 희망이 없다. 내가 오늘밤 남편을 둔다한들, 자식을 낳는다 한들 너희가 그 자식 보고 평생을 살겠느냐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는 온 가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버티지 못하고 고국 땅을 등졌던 10년 전의 사건을 회한과 슬픔으로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가득한 먹구름 뒤에도 은빛 광채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과의 이별을 간절하게 설득하자 마침내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나오미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떠나간 오르바에 대해서도 심하게 비난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오르바는 성격이 적극적이지 못하여 시어머니에게 부담을 줄 것을 염려하여 예루살렘 행을 포기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연을 모르는 남의 일에 대해서 좀 관대하게 생각을 해주면 안될까요?

한편 오늘 우리의 주인공 둘째 며느리 룻은 오르바의 선택과는 반대로 시어머니와 함께 끝까지 동행할 것을 결심합니다. 돌아가라고 설득하는 시어머니를 “붙좇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밀치는 나오미에게 룻은 확고한 충성과 깊은 애정으로 더 달라붙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본래의 질문을 던질 때입니다. #“부모, 어떻게 섬길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의 주인공 룻은 어떻게 보여줍니까? #먼저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섬기기로 결단합니다. #

나오미가 말합니다.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이때 룻의 아름다운 고백이 나옵니다. 룻의 고백은 언제나 듣는 모든 신앙인들을 감동시킵니다. 신구약 66권에는 많은 신앙의 고백들이 있지만 정말 이보다 더 우리를 감동시키는 고백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서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표준새번역 1:16-17) #

룻의 이 고백에는 살아있는 신앙이 꿈틀거립니다. 뜨거운 마음과 간절함이 서려 있습니다. 단순한 인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홀로된 시어머니 나마저 버리면 어떻게 하나. 의무감에서 나온 겉치레 고백은 더욱 아닙니다. 너무도 애틋하고 진실한 믿음이 아름답고 비장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모압에서 온 한 여인이 이제 공적으로 주 여호와와 그의 백성을 섬기기로 서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모압 백성과 그 신 그모스에게 속한 자가 아닙니다. 룻은 나오미와 함께 머물기 위해 자신의 모압 뿌리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바라보면서 본토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룻은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도 보장도 없이 오히려 불안할 수밖에 없는 미래에 이국의 땅으로 마음을 돌리고 있습니다. 굳은 결심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함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룻의 고백은 아름답고 감동적이지만 그의 뜻은 단호합니다. 룻은 자신의 고향 모압으로 돌아가서 동족 모압 남자와 재혼하여 그들의 신을 섬기며 모압 인으로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비록 비극적으로 결혼은 끝났지만 결혼을 통해서 접한 이스라엘 하나님을 그녀는 알았던 것입니다. 시어머니 통해서, 그리고 남편을 통해서, 그들을 통해서 보여준 신앙인의 삶이 자기 동족처럼 살기에 만족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돌아간 오르바의 행동에 꼭 돌팔매를 던질 필요는 없지만 우리의 주인공 룻의 선택은 탁월했습니다.

룻은 또 다른 남자를 만나서 보호받는 자신의 생활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자신이 보호하고 돌보아야 할 시어머니와 함께 하기로 결단합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신앙을 같이 하기로 결단합니다. 과부로서, 이방인으로서 살아야 할 불안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만 룻은 그 현실을 자신의 운명으로 선택하고 그 해 보리 추수 때에 베들레헴을 찾아듭니다.

고향을 들어서는 나오미의 얼굴에는 고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가 정말 나오미냐?”고 옛 친구들이 물을 만큼 10년 고난의 세월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깊은 상체기를 남겼습니다.

나오미는 다가오는 동향인을 향해서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주문합니다. 더 이상 기쁨의 나오미가 아니라 괴로움의 마라라고 험난한 자기 인생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룻에 대해서는 동네 아무 여인도 아는 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시골사람들의 특징은 아는 사람에겐 관심을 나타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기를 주저 하니까요. ‘누구냐’고 아무도 데리고 온 며느리에 대해서 정식으로 묻지는 않아도 자기들끼리는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들판이 누렇게 익은 보리 추수 때였지마는 돌아온 룻에게는 냉혹하기 짝이 없는 빈곤의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들판에는 곡식이 익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지마는 집에는 내일 먹어야할 곡식 조차도 남아있지 않는 현실이었습니다. 다시금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부모, 어떻게 섬길 것인가?”# 룻이 보여준 두 번째 대답은 시어머니를 #공양함으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시어머니가 솔직하게 터놓고 말해준 이상으로 삶은 긴박했습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아침 룻은 아무 주저함 없이 시모에게 요청합니다. “밭에 나가 볼까 합니다. 혹시 나에게 잘 대하여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따라 다니면서 떨어진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그래, 나가보아라” 가난과 기근에 휩싸여 있는 시어머니로서 그 외에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가서 떨어진 이삭이라도 줍겠다고 먼저 말해온 며느리가 내심 무척 고마웠을 것입니다. 아니었다면 낯선 땅에 따라온 며느리를 나가서 보리이삭 주워오라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추수하는 보리밭에서 이뤄진 목가적이고도 로맨틱한 사건에 감동해서 그 때의 룻의 심정을 제대로 생각해보려 들지 않습니다마는 당대의 이삭줍기는 지금 쓰레기 통을 뒤지는 것과 같은 밑바닥 삶입니다.

이삭줍기라는 밑바닥 인생으로 베들레헴 생활을 출발하지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그늘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그녀에게 온전한 상을 주신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상 주시기로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를 어떻게 섬기고 있습니까? 부모 섬긴다는 것은 언제나 철없는 아이들만이 해야 될 일이라고 그렇게 도덕책에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특별히 사, 오십 대의 성도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사, 오십 대면 그 분들은 이제 칠, 팔십대가 되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그분들을 어떻게 모시고 있습니까?

그 분들은 젊었을 때 우리를 돌보아주느라고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힘들어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셨습니다. 풍족하게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형편이 어려워서였지 결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형편이 허락하는 한 제일 좋은 것으로 자식인 여러분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경로우대증이 나오면 사실 이전처럼 경제력이 없어집니다. 지금 그 분들은 약하고 힘든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챙겨드리지는 못하지마는 한 해 한 주일이라도 그 분들의 수고를 기억해 드려야 합니다.

그 분들이 사셨던 가난하고 험난했던 시절을 기억하십시오. 그 형편에서도 우리들을 돌봐준 그 분들의 공로를 기억하면 그것을 기념한 어떤 값진 메달이라도 달아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달아드린 조그만 꽃송이는 더 아름답고 귀한 것으로 달아드리고 싶은 우리의 마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이제 그 분들은 약하고 힘든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힘 있고 경제력 있는 여러분들이 돌보아 드릴 차례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부모 공양에 뛰어난 성도들이 모인 교회, 울산교회라는 칭송을 듣기를 원합니다. 우리 세대는 자기 부모조차도 돌보지 않는 시대입니다. 차라리 호적 등본에 자식이름 없으면 국가로부터 나오는 혜택이라도 받으련만 자식노릇 못하는 자식 때문에 그마저도 도움 받지 못하는 부모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험한 세상 속에서 자기를 낳은 부모마저도 섬기지 않으려고 하는 이 더러운 세상 가운데서 여러분이 여러분 부모 잘 섬기고, 아니 부모가 살아계시지 못해서 우리 부모 연배의 이웃 어른들에게 잘 섬긴다고 하면 사람들이 우리 울산교회를 칭송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며칠 금식을 했다고 해서 감동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끼라도 따뜻한 음식으로 돌봐드릴 수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정말 울산교회에 기대를 가질 것입니다. 다리 밑에서 음식을 차려 드리는 것은 마지막 수단이죠. 그러나 그보다 더 따뜻한 인정을 가지고 이웃에 조석을 챙기지 못하는 분들을 돌봐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부모 효도하기에 탁월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 울산교회라는 이름 듣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칭송뿐 아니라 하늘의 상급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룻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는 부모 섬김의 본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어머니와의 대화#입니다. 첫 장의 고백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시어머니와의 대화도 정말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저를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생활 첫날 아침에도 어머님께 여쭙니다. “어머니 제가 들판에 나가서 보리이삭이라도 주우러 나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 다녀오너라” 다녀와서는 궁금해 하는 시어머니에게 낱낱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이 들어 몸이 약해지고 경제적인 능력도 없다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약해지고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이제 이 집에서 더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분들이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은 성도의 도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집사인 아들, 며느리를 두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여러분 그 신앙으로는 천국 소망이 없습니다. 그분들이 이 집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있는 것입니다. 나이 들면 세상 돌아가는 일도 아는 것이 적어지며 더욱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어르신들의 일반적인 마음입니다.

그래서 좀 동네 소문도 알고 싶어 합니다. 정보를 공유하고 싶어 합니다. ‘누구한테서 전화가 왔었냐?’부터 시작해서 모르셔도 되는 일에도 꼬치꼬치 캐묻기도 하십니다. “뭐라 그러더노?” 그럴 때에 “좀 잠자코 계셔요”라거나 “어머님은 몰라도 돼요”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자녀가 듣고 보고 배웁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대화할 상대가 없다는 것도 그 분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하나 만났다 하면 몇 번씩 들은 이야기인데도 또 얘기하고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바쁜 여러분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들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고 여러 가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집안 사정 이야기를 해드리고 또 말씀하시면 들어야 합니다. 다만 약하고 돌봄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어서 그런지 아이 같아지며 자기중심적이 되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화할 때는 나무라는 태도가 아니라 그 분들의 감정에 대해서 공감하시고 그분들의 의견에 맞장구쳐주어야 합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일 있을 때마다 상의 드리고 조언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방에서 나물을 하나 무쳐도 ‘어머니 뭘 넣을까요?’ 그리고 무슨 일이든 ‘이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며 물어보면 부모님들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 국 끓이는데 소금을 넣으면 어떻고 간장을 넣으면 어떻습니까? 그걸 가지고 꼭 자기 고집 피워야 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진리가 아니라면 어른 의견을 존중해가지고 그렇게 해드리는 것이 효도 아닙니까? 대학은 무엇 때문에 다녔습니까? 그래 초등학교 간신히 나온 어머니 하고 티격태격 맞부딪힐 바에야 학사증은 무엇 때문에 받습니까? 더 배운 사람이 이해를 먼저 해드려야 안되겠습니까?

네 번째로 룻에게서 배울 수 있는 부모 섬김의 본은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특히 타작마당 사건과 관련해서 그렇습니다. 룻으로서는 이스라엘의 문화나 전통에 익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 주간 동안 이삭 주우러 다니도록 하더니 이제는 목욕을 하고 향수도 좀 뿌리고 화장도 좀 하고 좋은 옷 입고 밤중에 지금 보아스를 찾아가라고 명하면 여러분, 정상적인 사람 같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날보고 밑바닥 생활 시키더니 이제는 그것도 못해서 날보고 창녀일 하라고 하는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도 할만 하잖아요. 그런데 어머니가 시키는 일을 의아해 하면서 마음에 안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하고 있습니다.

어디 모압 여인 룻하고 이스라엘 시어머니 나오미 하고만 문화가 다르겠습니까? 세대가 다르다보면 서로의 의견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자를 소금에 찍어먹든 설탕에 찍어먹든 그런 것 가지고 그렇게 시어머니에게 못됐게 하는 것은 정말 집사답지 못한 일입니다. 세대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다보면 가치관도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좋은 것 있으면 뭘 농 안에라도 넣어놓으려고 그러잖아요. 그래가지고 나중에는 뭘 넣어놓았는지 다 잊어버리고 썩고 그러잖아요. 그래도 그분들이 살아오시던 시대에는 그렇게 먹을 것을 아끼지 않고는 우리를 키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오신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무시하는 것은 여러분이야 말로 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어긋난 일이 아니면 청종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2) #

혹 말이 안 되는 말씀을 하시더라도 ‘어머니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씀 하세요’ 라고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그런 말 해보신 분들은 반드시 교회당 떠나기 전에 회개기도 하시고 이제는 어머니를 칭송하는 말, 어머니를 격려하는 말, 어머니를 신뢰하는 말 외에는 하지 않기로 다짐 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나이 드신 어머니가 상처가 되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똑똑한 것 같지만 똑똑해 졌으면 누구 덕입니까? 똑똑한 것 같이 생각 되지만 세상을 오래 사시고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그 분들에게서 놀라운 지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만한 점은 룻이 시어머님께 #기쁨을 안겨드림#으로 섬긴다는 점입니다. 룻은 어머니가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 룻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무엇을 좋아하실지 알고 그것을 해드리는 것이야말로 잘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룻은 보아스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은 후에 어머니의 품에 아기를 안겨드리고 그 아이를 양육하는 기쁨을 안겨드렸습니다. 그래요 연세가 드신 분들이 요즘처럼 교육을 받지 않아서 위생관념이 있겠습니까? 혹시 먹든 과자 손자 입에 넣어준다고 그렇게 눈치할 일 없지 않습니까? 할머니들에게서는 손자들이 대단한 존재더라고요. 삶의 의미와 같더라고요. 그렇게 귀한 손자조차도 그래 위생적인 엄마 품에만 두려고 하시지 마시고 조금 비위생적이라 할지라도 그 손자가, 손녀가 사랑 받도록 하십시오. 세상이 오늘날만큼 존재하는 것은 그런 조건 없는 어른들의 사랑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칭송소리 한번 들어보십시오.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안고 나가니까 동네 사람들이 모두들 칭송하고 있습니다. “찬송 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이지 않게 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동네 사람들의 소원대로 다윗의 초대 왕 다윗의 증조모되는 축복을 나오미가 누린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이네”라고 모두들 부러워했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말해야 알아듣는 관계가 아닙니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챕니다. 여러분, 연애해 보시지 않았어요? 연애할 때 여러분, 상대방이 해달라고 해야 무엇 해줍니까? 알아서 해주는 것 아닙니까? 말하지 않아도 요구하지 않아도 알아서 행동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지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알아서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기를 자녀 삼아주신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자입니다.

한 때는 여러분이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 키울 때에 달라고 해야 주던가요? 이제는 여러분의 섬김이 필요합니다. 연세가 드시면 몸도 마음도 약해집니다. 여기 저기 아픈 데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경제력도 없어져서 누군가가 돌보아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혼살림 차린 집에 가보면 모든 것이 새것입니다. 옷들도 새것이 주로 눈에 띠고 가구도 새 것이고 사람도 신랑, 신부 모두 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이 많아지면 새것 찾기가 힘듭니다. 전에는 몸도 마음도 새 것이었으나 이제는 낡고 약해졌습니다.

어르신들 집에는 가구도 낡았고 집주인도 늙었습니다. 이도 흔들리고 먹어도 소화력이 떨어집니다. 여러 장기에 여기 저기 이상이 생깁니다. 근력도 줄어들고 체력도 떨어집니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고 발에는 무좀이요 변비나 치질은 기본입니다. 그러다보면 정서도 불안하고 기억력도 감퇴합니다.

우선 눈이 침침해지고 말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주일날 교회 와서 앉아도 어떤 때는 목사의 설교조차 잘 들리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어쩌자고 가끔가다 목소리를 너무 낮춰가지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딴사람은 웃는데 내용을 모르니까 신경질까지도 납니다. 은혜 받으러 왔다가 불평하며 돌아가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비록 우리 경로대학에서 장수학도가라는 노래를 가르쳐드리지만 그것은 사실 접대위로용이지 현실대처용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즈음 우리 경로대학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를 여러분은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들의 일생은 일흔 살부터
마음도 몸도 왕성합니다.
칠십에 우리를 모시러오면
지금은 안 간다고 전해주세요

우리들의 인생은 일흔 살부터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삽니다.
팔십에 우리들을 모시러오면
아직은 빠르다고 전해주세요

우리들의 인생은 일흔 살부터
아무 것도 불만은 없이 삽니다.
구십에 우리들을 모시러오면
재촉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우리들의 인생은 일흔 살부터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백세에 우리를 모시러오면
서서히 간다고 전해주세요.#

예, 어떻습니까? 우리 어른들을 위해서 박수한번 쳐 드립시다. 백세에 모시러 와도 천천히 갈 거라고 전해달라고 그러는데 장수학도가를 들어보면 아주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건강해서 경로대학에라도 나와야 가르쳐 드리는 노래 아닙니까? 연세가 드시면 몸도 마음도 약해집니다. 여기 저기 쑤시고 아픕니다. 그 때 여러분의 섬김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 맺습니다. 부모, 어떻게 섬길까요? 룻을 통해서 오늘 몇 가지를 살폈습니다. 진정한 효도는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효도의 근본터전입니다.

그리고 섬김은 봉양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먹을 것 드리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효도의 큰 대목 아닙니까? 대화를 통해서,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 때 하늘 아버지께서 부모 공경에 마음을 쓰는 여러분 모두를 복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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