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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서 생명을 전하라 / 사 48:6 ~ 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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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생명을 전하라

-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48 : 6 ~ 7, 11~ 13

  네가 이미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똑똑히 보아라. 네가 인정하지 않겠느냐? 이제 내가 곧 일어날 새 일을 네게 알려 줄 터이니, 이것은 내가 네게 알려 주지 않은 은밀한 일이다. 이것은 이제 내가 창조한 일이다. 옛적에 일어난 것과는 다르다. 지금까지 네가 들어 본 일이 없는 일이다. 네가 전에 이것을 들었더라면 '아, 바로 그 일,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번 일만은 그렇지 않다. 나를 위하여, 바로 나를 위하여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겠느냐? 내 영광이 남에게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야곱아, 내가 불러낸 이스라엘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내가 곧 시작이요 마감이다. 내 손으로 땅의 기초를 놓았고, 내 오른손으로 하늘을 폈다. 내가 하늘과 땅을 부르기만 하면, 하늘과 땅이 하나같이 내 앞에 나와 선다." 아멘.


-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6 : 6 ~ 11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서 20: 19 ~ 23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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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생명과 죽음의 이야기는 지난주 부활절 예배로 사실은 마감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생명에 힘입어서 살아갑니다.

오늘 성서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서 본문을 보니까, 제자들은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마리아의 얘기를 듣고 겁에 질려서 문을 잠갔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국사범으로 몰려서 처형당하거나 중형에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얘기를 들은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혹시 그게 환상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부활하셨다면 로마가 그분을 찾느라고 우리를 핍박하고 또 죽음으로까지 내몰 텐데,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그들은 문을 꽁꽁 걸어 잠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분노와 좌절, 또는 불안이 가득 찬 방에, 꼭 잠긴 방에 지금 예수께서 불쑥 들어오셨습니다. 문도 열지 않고 환영처럼 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불안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평화가 있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불안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이 병이 가득 찬 방에 나타나셔서 불안을 이길 평화가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음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한테 “생명아 생겨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슬픔과 좌절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가득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전혀 다른 언어, 전혀 다른 세계의 대비, 이것이 오늘 제자들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만남입니다.

평안하라. 두려워 말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제 나와 함께 지내면서 행하고 말하던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대신하실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 전에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불안에 떨던 제자들에게 부활한 예수께서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으셨다는 구절입니다.

자, 오늘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을 믿었고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다시금 입김을 불어넣으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던 말씀, 그 말씀 때문에 오늘 우리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이 말씀을 안경 삼고서 한번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만드실 때 불어넣었던 생명의 입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다.

인간들의 이야기는 사실은 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열정의 이야기입니다. 운명처럼 주어지는 죽음과 질병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 생명을 찾아가려는 노력, 그것을 이론화하고 실험해보기도 하는 생명을 향한 몸부림, 이게 저는 인간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생명, 집단의 생명, 우주의 생명, 생명을 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갈증, 이 갈증 속에서 사실은 신의 이야기가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창세기 이야기를 하기 전에 로마 사람들의 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로마인에게는 신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입니다. 그중에 불안을 관장하는, 불안의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 산을 거닐다가 흙덩이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흙덩이를 빚어서 물체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지금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만들어 놓고서 이 물체를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이 물체에다 뭔가 생기를 불어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로마신들 중에 으뜸가는 신, 하늘의 신, 천신인 주피터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주피터한테 부탁합니다. 하늘의 신이시여 하늘의 생기를 좀 이 물체 속에 불어넣어 주십시오! 주피터가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더니, 이 물체가 살아 움직이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게 된 이 물체의 이름을 뭐라고 하느냐는 것 때문에 둘 사이에 논란이 생겼습니다. 불안의 신은 불안이라고 하자는 것이고, 하늘의 신은 하늘의 입김을 불어넣었으므로 하늘의 입김이라고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싸움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 하나의 신이 등장했습니다. 땅의 신이었습니다. 이 땅의 신은 이 물체를 땅의 흙으로 만들었으므로 땅이라고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늘의 신, 땅의 신, 불안의 신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아서, 시간을 주관하는 신에게 판단을 의뢰했습니다. 시간의 신이 판정을 내립니다. 하늘의 신은 이 생물체가 죽은 다음에 그대가 불어넣었던 하늘의 생기를, 우리말로 말하면 혼을 도로 찾아가시라. 땅의 신은 이 생물체가 죽으면, 그대 땅의 한 부분이었던 흙으로 된 육신을 가져가시라. 영육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안의 신은 이 생물체가 죽을 때까지만 다스리고 죽은 다음에는 손을 떼시라.

죽은 다음에는 하늘과 땅은 분리되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안의 영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체의 이름은, 땅의 한부분인 흙으로 만들었으므로 ‘호모’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라틴어로 흙이라는 말은 호모스인데, 그 흙의 이름을 따서 호모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인간을 가리키는 ‘호모’라는 말은 여기서 생겼습니다. 그리스신화가 됐든, 로마신화가 됐든, 신화들은 인간의 갈등과  역경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과 죽음을 직시하면서, 그것을 극복할 새로운 생명을 향한 열정을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드시고 자기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으셨습니다. 흙에서 났으나, 하나님의 입김이 들어 있는 사람을 이름하여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아담’도 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온 것이니, 호모스가 호모로 된 것이나 아다마가 아담이 된 거나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아담을 만드신 하나님은 아담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이 사실이 창세기 증언의 핵심입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피조물의 몸을 입고 오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죄라는 감옥의 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에게 이름을 하나 붙여 주십니다. “예수가 누군지 아느냐? 예수는 제2의 아담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 십자가에 등장한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이름은 제2의 아담! 제2의 아담 예수가 에덴동산에서 불어넣었던 똑같은 생명의 입김을, 불안이 가득한 방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입김을 불어넣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이 아닙니까? 그 성령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나는 제3의 아담이다.”

삼위일체가 다른 게 아닙니다. 천지를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신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가 되셔서 우리한테 오셨고, 성자 예수가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똑같은 분이지, 셋이 아닙니다. 이 성령 속에 천지창조 때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생명의 입김이 있습니다. 생명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는 성령을 받아야 된다는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역사와 문화 속에 신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불안도 겪고 인간의 죽음까지도 짊어지시고 인간과 함께 죽은 신에 관한 얘기는 성서에만 있습니다. 피조물과 함께 고통을 끌어안은 신의 이야기, 그건 성령의 이야기입니다. 불안과 좌절과 슬픔도 함께 안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한테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부활했으니 너희도 부활하리라. 왜? 내가 너희 속에 너희와 함께 있으므로!

하나님이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이 진리 말고 또 다르게 하나님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성서 뭐라고 써 있든지, 신화적 표현이 어떻든지 간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인 예수가 우리와 함께 죽고, 우리와 함께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속에 지금 그분이 내재해 계시므로! 예수는 제2의 아담이 되고 성령은 제3의 아담이 되어 오늘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합니다. 여러분 안에서 사는 건 누굽니까? 여러분 안에서 사는 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는 누가 삽니까? 죽었다가 부활한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갑니다. 신과 인간의 하나 됨! 신비의 말씀!

이 신비는 과거 출애굽 역사에서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역사에서도, 그 모든 기적을 베풀면서도 한번도 말씀하지 않았던 신비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 신비의 사건을 새롭게 행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새로운 사건은 예수에게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생겼습니다. 하늘에 계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하나님이 아니고, 이제 아예 땅 속 깊이까지 오셔서 땅이 되어 버린, 흙이 되어 버린, 인간이 되어 버린 그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지난주에 여러분은 부활절 메시지로 예수의 무덤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시신이 안치된 무덤에 갔더니, 무덤 문은 열리고 예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부활절에 이 이야기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 뒤에 주일학교 아이들 보고, 무덤이 빈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다음주에 올 때 나무 상자든, 종이 상자든, 상자 하나에다가 부활을 상징하는 것을 하나 꼭 담아 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그 다음주에 상자에다가 방학 숙제 하듯이 나비를 잡아온 가져온 아이도 있었고, 새파란 나무 잎사귀를 따 가지고 온 아이도 있었고, 나뭇가지 하나를 담아 온 아이, 작은 나무를 뿌리째 옮겨 심어서 가져온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중에 지진아, 지능이 약간 모자란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 아이는 종이로 만든 상자만 가져왔습니다. 진짜 빈 상자를 가져온 겁니다. 선생님께서 왜 빈 상자만 가져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지난주일 부활한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부활하면 빈 상자에 남아 있지 않잖아요. 살아나신 예수님은 이 상자에서 나가셨어요. 그래서 비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이 너무 감동하여, 빈 무덤 속에 남겨진 부활한 생명의 흔적, 이 생명의 흔적은 이 아이가 가져온 빈 종이상자에 있었다며, 유명한 글을 썼고, 나중에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숙제를 받았다고 한다면, 교회에 오실 때 상자에 뭘 담아 오시겠습니까? 한번 추론해 보십시오. 그 동안 흘린 눈물이 너무 많아서 슬픈 눈물을 가득 담아 오셔도 괜찮습니다. 여기 교회에다 붓고 가십시오.  좋은 일이 많아서 함박웃음을 담아 오셔도 좋습니다. 여기에 펼쳐 놓으면 이 교회가 얼마나 웃음바다가 되겠습니다. 혹시 죄 지은 것이 너무 많으면 그 죄 가득 담아 오셔서 여기다 펴놓으십시오. 주님이 대신 져 주십니다. 중생이라 이름하는 생명에 대한 경험을 담아 왔다면 그 생명을 좀 풀어놓으십시오. 혹시 어린 아이처럼 다 비우고 “나는 텅 비었습니다. 그 생명은 내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시는 분이 계시면 빈 통 들고 오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당하는 고통 속에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내 고통을 알아주실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기도는 헛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고통당하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내 고통을 알아주실까 하고 걱정하다니,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내가 즐거울 때에는 하나님도 함께 기뻐하십니다. 인간의 기쁨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함께 기뻐하시고 인간의 절망, 좌절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함께 아파하신다고 배워 놓고서도 하나님은 응답하실까, 하나님이 아실까, 우리 이렇게 살지 맙시다. 그것은 부활 이전의 신앙, 하나님과 인간 가운데 오셔서 함께 계시기 이전의 신앙, 그렇게 믿기 이전의 신앙, 어릴 적의 신앙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함께 우시고 같이 아파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육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주신 말씀은 “내가 다시 입김을 불어 넣으마. 성령을 받아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갑니다. 죄악이 넘쳐 나는 곳으로, 폭력이 넘쳐 나는 곳으로, 전쟁의 파국이 있는 곳으로, 좌절이 있는 곳으로 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돌리셔서 그 길을 벗어나게 하십니다.

사실 죄가 용서받는 게 아니라, 죄에 허덕이는 인간이 용서받습니다. 죄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허덕이는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구원은 죄인이 구원받는 것이지, 죄가 구원받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죄라 결과인 죽음은 마지막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결딴이 날 것이고, 지금은 매일 같이 죄인이 회개하면 구원받는 역사가 생겨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때문에 죽었지만, 죄인으로 죽으셨지만, 죄를 극복하고 의인이,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구세주가 되신 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해 갑니다. 부활 속에 이런 위대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부활 체험이 허락된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춤추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고 그분과 함께 일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오늘 선물로 주십니다. 그 생명에 참여하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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