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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잘 통하는 성도 / 시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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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잘 통하는 성도(시편 9: 1-12)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가정을 꼭 이루고 삽니다. 가정을 갖고 살 때에 한 지붕 밑에서 생활하면서 자녀들을 키우고 살림을 내주며 수십 년 동안 살아가는데 이 부부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잘 통하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참 잘 통하지 않는 부부도 많습니다.

우선 대화가 잘 안 통하고, 마음과 마음이 안 통하고, 믿음과 믿음이 안 통하기에 불행스러운 일이 많습니다. 이런 경우 참고 살아가는 결혼 생활이므로 그 가정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혀 가정 생활의 행복을 모릅니다. 그러나 부부가 잘 통하면 재미가 있습니다. 대화가 잘 통하고 뜻이 잘 통하고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가정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과 정말 잘 통하는 사람은 믿음 생활이 재미가 있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통하면 믿음 생활은 재미가 없고 끝장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안통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내 목적이 다르고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전혀 통하지 아니하면 그 믿음은 끝장이 난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뜻과 뜻이 통하고, 하나님과 이렇게 잘 통하는 사람은, 부부 사이에 잘 통하는 것처럼 그 믿음은 행복합니다. 본문 시편 9편을 지은 사람은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잘 통하는 사람을 이스라엘 천지에서 찾아보던 중에 오직 한 사람, 다윗을 만났습니다. 다윗과 하나님은 너무너무 잘 통했습니다. 믿음으로 통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잘 통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하나님과 잘 통하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I. 성도의 본분(1-3절)


1. 감사의 본분(1상반절)

첫째로는 감사의 본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당연히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부가 잘 통해서 행복하게 되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의 믿음 생활이 하나님과 잘 통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모릅니다. 다른 것을 다 제쳐놓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1절에 보니 "내가 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하나님께 감사했느냐를 알려면 이 말씀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사무엘하서 13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때가 이 시편 9편의 배경입니다. 암몬 자손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과는 끊을 수 없는 사이입니다. 한 피 받은 자손입니다. 그런데 이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다윗을 괴롭혔습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 땅을 향해서 애굽에서 나올 때 암몬 자손의 지역을 지나고자 했습니다. 물을 먹게 되면 돈을 내고, 포도를 먹게 되면 사 먹겠다고 했습니다. 피해를 안 주겠다고 해도 지나가지 못하게 괴롭혔습니다. 피곤한 민족이 멀리멀리 돌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제일 먼저 협력해야 될 민족이 오히려 주위에 있는 다른 민족들과 협력하여 괴롭히는 데 앞장을 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로서는 못 견디게 괴로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다윗의 군대가 가서 암몬 자손을 전멸합니다. 완전히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두고두고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지 않을 사람에게서 그런 일을 당할 때 너무너무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운 일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면 하루아침에 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감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을 쏟아 부어 감사해야 합니다. 그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감사한다 했지만 마음에 없이 말로만 하는 것을 사람도 알아차리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잘 통하는 성도는 언제고 이런 심각한 고민,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셨고 앞으로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꼭 감사하십시오. 감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잘 통하는 성도의 첫째 본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전파의 본분(1하반절)

둘째로 전파의 본분입니다. 기사라고 하는 말씀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개입하여서 해 주실 때 이것을 기사라고 합니다. 말을 바꾸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셨다.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일을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언제나 어디서나 계속 이야기하며 다니겠다는 뜻입니다. 이때에 비로소 하나님만 높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큰 일을 해 주셨건, 작은 일을 해 주셨건 축복이 크던 작던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꼭 전파하고 다녀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언제 그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느냐하면 암몬 자손이 그렇게 괴롭힐 때 요압 대장을 보냈을 때입니다. 요압 대장이 군사들과 함께 나가 암몬 자손의 왕도 랍바성을 침공하였습니다. 이제 싸움은 다 이겨 놓고 마지막 항복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때 다윗 임금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다 이겨 놓고 항복 받는 절차만 남았는데 내가 만약에 항복 받으면 이 성이 나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습니다. 그러므로 임금님이 오셔서 항복을 받으십시오. 영광은 임금님이 받으십시오. 라는 전갈이었습니다. 다윗이 기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가서 왕관을 빼앗아 쓰고 항복 받고 성읍을 불태워 버리고 사람들을 붙들어 노예를 삼고 완전히 일을 끝냈습니다. 이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내 신하가 나를 이렇게 높여줄 때 내가 높일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하신 이 모든 기사를 내가 전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항상 여러분들에게 해 주신 일들을 누구에게나 간증하고 전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본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3. 희락의 본분(2절-3절)

다음은 희락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해 주신 일을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내 남편이 나에게 좋은 옷을 하나 맞춰 주지 않을 때는 남편이 싫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옷을 맞춰 주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남편 자체를 좋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나에게 정성을 드려서 한 상을 따뜻하게 차려줍니다. 그 한 상을 따뜻하게 차려 준다는 자체가 식은 밥 한 상을 무성의하게 차려 주는 것보다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아내 자체가 즐거워야 합니다. 즉 아내 자체를 기뻐해야 합니다. 이런 기쁨과 즐거움은 오히려 본분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나에게 해 주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될 즐거움이며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는 그 믿음이 잘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는 나에게 여타의 것은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습니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의 본분이라고 해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마음이 잘 통하는 성도의 본분은 감사하는 일, 전파하는 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II. 성도의 은혜(4-7절)


1. 변호해 주시는 은혜(4상반절)

첫째로는 하나님께서 변호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변호해 주는 사람을 변호사라고 합니다. 나의 변호사는 나를 위해 뛰어 주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편에 서 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를 감싸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변호하신다, 또는 나의 변호사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천하 만민이 내 편 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습니다. 천하 만민이 내 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 원수가 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내 편 되는 그것 이상 믿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니엘이라고 하는 청년이 아주 어렸을 적에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왕이 보니 너무 지혜롭고 총명합니다. 그래서 가르쳐 키워서 나중에 국무총리를 시켰는데 그 토박이들이 시기 질투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을 하나의 흠으로 잡아 굶겨 놓은 사자 굴에 던져 넣습니다. 굶겨 놓았으니 사자의 눈에 보이는 것마다 먹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사자가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지금 사자와 다니엘은 죽이고 죽임을 당하며, 먹고 먹히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의 편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사자의 입을 막아 밤새도록 다니엘을 범접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말을 바꾸어 다니엘의 편이었다는 말입니다. 절대로 사자의 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편이요, 딸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 우리편이요 절대로 사자의 편, 마귀의 편, 환란의 편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편에서 우리를 감싸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위해 뛰시고 일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변호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2. 심판의 은혜(4하반절-6절)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암몬 자손에게 그렇게 심판해 주셨다 말입니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완전히 이름조차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암몬 자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보십시오. 암몬 자손에게 다윗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잘하느라고 해 주는데도 원수를 삼아 괴롭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럴 때 절대 약자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항상 강한 자의 편에 섭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자기의 이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판단은 나에게 오히려 억울함을 더해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롭게 판단하셨다, 하나님이 시와 비를 가려 주셨고 하나님이 잘 잘못을 가려주셨고 하나님이 참과 거짓을 가려 주셨다는 말입니다. 원통한 일, 괴로운 일을 하나님께서 전부 의롭게 판단해 주셨다는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큰 은혜가 됩니다. 그렇치 않을 사람에게서 억울한 일 당하고 괴로운 일당하고 참 말할 수 없는 원통한 일 당합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죽을 때까지 이 한은 풀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항상 때가 되면 의롭게 심판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심판은 우리들에게 은혜가 됩니다. 이 심판을 믿으시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3. 예비하시는 은혜(7-8절)

보좌를 예비하셨는데 과거의 심판은 끝났고 앞으로 또 다른 심판을 위해 예비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심판하십니다. 암몬 자손이 아니라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실 터인데 지금 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요 앞으로 행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말세 심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지금 과거에 심판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다보는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 안목이 믿는 사람에게는 참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지난날에 나에게 해 주신 일을 생각해 보니 앞으로도 또 일해 주시리라 하고 내다보는 눈이 참 귀한 눈입니다.

아말렉 족속 즉 원수의 나라 진멸하듯 하나님께서 말세가 되면 백보좌를 베풀고 원수에 대한 심판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한두 번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전투에는 이기고 전쟁에는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토닥거리는 싸움은 몇 번 이겼어도 전체적으로 보는 전쟁에는 패배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억울하고 괴로운 일에 시비를 가려주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마지막 말세에 가서 백보좌 심판이 없다면 최후의 승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다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가서는 예수님이 우리 있을 곳, 영원히 살 곳을 예비하러 가신 것 아닙니까? 천국을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저 원수 마귀를 비롯해서 원수의 편에 선 사람에게는 지옥이 예비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우리들에게는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독일의 선교사가 일본에 와서 30년을 선교를 하고 갔는데 믿는 사람 한 사람을 얻었습니다. 세례 베푼 사람이 오직 한 사람입니다. 일본에 안 태어나고 한국에 태어난 것을 큰복으로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노릇도 했고 중국과 소련에게 약소 민족으로 설움도 많이 당했지만 그래도 한국에 태어난 것을 생각해 보면 행복합니다. 일본에 가보십시오. 동경 시내에서 어쩌다가 교회 하나 발견할 정도입니다. 일본의 교회가 큰소리쳐도 일본 정부에서는 코웃음칩니다. 그 수가 원래 적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리다 선교사와 수양관을 가기 위해서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달려가 보았습니다. 겨우 두 교회를 보았을 뿐입니다. 보일 적마다 내려서 찾아가 보았더니 선교사가 자기 집에 세운 교회입니다. 일본 사람의 동네 동네마다 왜 그렇게 귀신이 많습니까? 일본이 저렇게 문명이 발전한 나라로서 귀신의 집이 저렇게 많은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잘 살아도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네들보다 조금 못해도 교회가 많아서 좋습니다. 물론 약간의 부작용도 있습니다. 그래도 차라리 부작용이 낫습니다. 정말 믿음 축복 받은 나라 한국에 태어난 것 감사하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다. 독일 선교사가 한 명의 신자를 얻고 30년 만에 실패했다고 생각했고, 또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실패했다고 여겼습니다. 바로 그 한 사람도 자기 집의 가정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가정부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동경신학-지금은 일본신학-학장입니다.

하나님이 일본 신학교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묘한 일입니다. 그 한사람이 우리의 백명, 천명을 당합니다. 우리의 만명이 바울 한 사람을 당하기 힘듭니다. 바울 한 사람을 주님이 준비하셨듯이 일본의 신학교를 위해서는 그 한 사람을 준비했더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는 상상 밖의 엄청난 것 즉 하늘나라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잘 통하는 성도가 받는 세 가지 은혜는 변호해 주시는 은혜, 심판의 은혜, 그리고 예비하시는 은혜입니다.


III. 성도의 영광(9-12절)


1.안전의 영광(9절)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란 때의 산성이시로다"

첫째는 안전의 영광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잘 지켜 주고 보호해 주시는 영광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산성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산성은 차라리 거추장스러운 것이지만 옛날 다윗 시대의 산성은 굉장한 것입니다. 아무리 원수가 쳐들어와도 산꼭대기 높은 곳에 성을 쌓고 문 하나만 내 놓았습니다. 그리 들어오는 원수만 쳐부수면 아주 안전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전란 중에, 환난 중에 제일 안전한 곳이 산성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요 하나님이 산성처럼 나를 지켜주시니 원수가 감히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품안이 가장 안전한 처소라는 것입니다. 어머님의 품은 그 아이에게 전부요 산성이듯 다윗에게는 하나남의 품인 산성입니다. "비첼"이라는 히브리말은 끊어짐의 때를 의미합니다. 끊어짐의 때는 소망이 끊어진 때를 말합니다. 살 길이 없고 피할 길이 없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손대는 시간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자신 만만할 때 하나님은 내버려두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까지 맡아서 해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만약 자녀가 자기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까지 부모가 도맡아 처리해 준다면 병신을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자녀들이 하다가 못 할 때에 는 부모가 도와 주는 것입니다. 즉 자녀가 감당 못할 때 부모가 일해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다가 불가능할 때 하나님이 개입하시는데 이 때가 성공의 시작이 되는 때입니다. 이 때가 바로 승리가 시작되는 가장 안전한 시점입니다. 환난의 때의 산성, 즉 가장 안전히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 말 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2. 함께 하는 영광(10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9절의 압제 당하는 자와 여기서의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표현만 다를 뿐 뜻은 같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내가 청년시절에 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워즈워드의 시를 읽으면서 무척 좋아했고, 김 소월의 진달래꽃을 참 좋아했습니다. 지금 책꽂이를 찾아보니 없었습니다. 워즈워드의 시 가운데 유명한 시 하나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버림받은 여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병든 여자도 불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병들어도 남편이 사랑만 해주면 불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건강했을지라도 버림받으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것도 불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사랑만 해 주면 불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일 불행한 여자는 버림받은 여자라는 구절로 끝납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림받은 남자, 버림받지 않을 사람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위가 잘못해서 때로는 징계를 하고 진노를 하실지라도 버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곤고 중에도 낙심하는 일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기억의 영광(11∼12절)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불의가 이 세상에서 판을 치고 정의가 뺨을 맞아 억울한 일 당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나 하는 경우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기억해 둡니다. 언제고 하나님께서 칼을 빼시는 날에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꼭 원수를 기억해 둡니다.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가난한 자, 겸비한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난한 자 또 겸손한 자는,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 하시리로다 라는 말씀은 믿는 사람이 십 년 전에 기도한 것이라도 하나님은 다 기억해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응답을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준다고 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지구본을 한번 놓고 보십시오. 이 지구상의 대한민국은 아주 작습니다. 대한민국에도 서울 한 구석인 천호동 한 모퉁이에 살고 있는 나를 기억해 주신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기억은 우리 성도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내가 신학생 때 기독교 교육학을 가르쳐 준 분이 새문안 교회에 시무하시다가 나중에는 숭전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강신영 목사님입니다. 내각 신학교 다닐때만 해도 신학자들 중에는 기독교 교육을 전공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후 십년이 지나서 내가 목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어린 목사 아니겠어요? 강 목사님과 여럿이 모이는 기회가 있어서 저분이 분명히 날 가르쳤지만 그 많은 학생 중에 나를 기억하리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래도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나의 이름까지 부르며 기억해 주셨습니다.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나를 가르쳐 주신 스승이 제자 된 나를 기억해 주는 곳도 이렇게 영광인데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준다는 것은 더욱 큰 영광입니다.

하나님과 잘 통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렇게 기억해 주시는 영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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