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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 위기와 건전한 가정 / 시 12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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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게 되거든 그 아들을 위하여 하루에 한번씩 기도하라. 사랑하는 아들이 전쟁에 나아가 전투를 하게 되거든 그 아들을 위하여 하루에 두 번씩 기도하라. 그러나 그 사랑하는 아들이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게 되거든 그 아들을 위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라. 이와 같은 격언에서도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를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가정을 중히 여겼던 영국과 러시아의 지혜가 여러분들 속에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가장 소중한 축복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비로운 눈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부인이 남편에게 투덜댑니다."당신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에나, 나를 위해 꽃 한 송이를 사올 줄 모르는군요.”무뚝뚝하기로 소문난 남편이었어도, 아내의 서운한 마음을 헤아리며 퍽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남편은 큰마음을 먹고 퇴근길에 꽃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리고는 빨간 장미꽃 백 송이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걸 들고 집에까지 갈 것을 생각하니,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장미꽃 백 송이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쑥스럽고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 주인에게 신문지로 꽃이 보이지 않도록, 잘 가려서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두툼한 신문지로 가려진 꽃다발의 모양새가, 마치 신문방망이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집에 가지고 와서는, “이거 받아요.”하며 무심한 듯 아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은 부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 반응을 두 가지로 나눠봅니다.
첫째는 장미꽃 백 송이 보다도, 그걸 포장한 신문지를 보는 겁니다. 그래 맛있는 음식을 개밥그릇에 담은 것처럼 지각하는 겁니다. 그래 장미꽃 백 송이를 받고도 기분이 나빠지는 겁니다.

둘째는 포장한 신문지를 보기보다는, 내용물인 장미꽃 백 송이를 보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튀는 것을 쑥스러워 하는 남편의 투박한 성격을 헤아리며 씽긋 웃습니다. 그리고는 그 장미꽃 선물에 대해 아주 기뻐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비록 포장은 거칠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물을 보십니까? 포장을 거칠게 할 수밖에 없는 남편의 성격을 이해하며, 다만 그 안에 담겨있는 정성만을 보게 됩니까? 아니면 포장의 거친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오며, 기분이 나빠지는지요.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속마음을 보십니까, 아니면 겉에 드러나는 모습을 보십니까? 남편이 신문지로 포장을 한 것은, 그의 속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성격입니다. 사람들에게 튀는 것을 쑥스러워하는 성격, 투박한 성격입니다. 여성에 비해 남성들에게, 상대적으로 그런 면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포장도 예쁘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그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큰마음을 먹고 장미꽃 백 송이를 샀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그 일조차도 남편에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내에 대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내가 서운해하는 마음을 헤아리며, 큰마음 먹고 자신의 애정을 표시한 것입니다. 남편이 애정을 표시하는 그 마음,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친 포장을 물고 늘어져서, 잔소리를 하고 바가지를 긁는다면, 그건 부인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요, 부부관계를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입니다. 지혜로운 부인은 결코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부인은 남편의 거친 겉모양 속에 담겨있는, 자신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만나려 할 것입니다. 부인은 행복해질 것이고, 부부관계도 한층 나아질 것입니다.

이는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를 겉모습으로 만나지 않고, 그의 속마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대화할 때도, 상대가 표현한 말보다 그 밑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인생 전반의 차원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보는가, 어떻게 보는가, 이것이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서로 친한 물동이 두 개가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물동이는 시무룩한 표정이었고, 다른 물동이는 무척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밝은 표정을 가진 물동이가 친구 물동이에게 묻습니다.“잘 지냈니?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두운 거지?”그러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물동이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합니다.“어휴! 나는 이제 이 우물에 끌려오는 것에 질렸어. 어째서 매일 여기서 물을 채워가도, 돌아올 때는 꼭 비어서 오는 거지?”그 말을 들은 밝은 물동이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그건 말이지, 생각하기 나름이야. 나는 언제나 빈 통으로 이 우물에 왔다가, 돌아갈 때는 가득 채워서 간다고 생각을 하니까, 늘 기분이 좋아.”

자, 이 두 물동이가 처한 조건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우울한 물동이는 집에서 우물가로 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비어있는 상태를 지각하는 것입니다. 곧 헛수고로 지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밝은 물동이는 우물가에서 집으로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서 문제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가득 찬 상태를 지각하는 것이지요. 곧 성취감으로 지각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똑같은 조건에서 한 물동이는 헛수고로 지각하여 우울하고, 다른 물동이는 성취감으로 지각하여 밝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풀어야 할 중요한 화두입니다. 이 화두를 잘 풀어 인생을 살면, 대체로 넉넉하고 밝은 마음으로 삶을 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화두를 잘 풀어낼 수 있을까요? 바울이 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바울이 이 말을 한 원래 취지를 확대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에서 육안에 보이는 것은 신문지로 포장한 장미꽃입니다. 한 사람은 신문지를 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속에 있는 장미꽃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육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의지적으로 선택하여 보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장미꽃을 보는 사람은 단순히 장미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장미꽃을 사는 남편의 마음을 보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남편의 마음, 그것을 보는 겁니다.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을 볼 수 있을 때, 이제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장미꽃을 보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볼 수 없으면, 신문지를 보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인 것입니다.

물동이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빈 상태입니다. 우물가를 중심으로 하여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밝은 물동이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가득 채워진 상태를 미리 보는 겁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과연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초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마음으로 우주의 운행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성장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은총을 철석같이 신뢰하는 것, 이는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은총을 믿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아는 것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아직 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그것은 아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앎이 더 높은 수준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믿음에서 앎으로까지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날마다 이렇게 외칩니다.“난 알아요! 그분의 은총을!”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 그는 속 사람이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영혼이 나날이 성장합니다. 그리하여 신문지로 투박하게 포장한 장미꽃을 받고,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매번 빈 상태로 우물가로 오지만, 그러나 늘 밝은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난 알아요! 그분의 은총을!”이라고 날마다 외칩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구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그것은 신비로운 눈입니다. 그 신비로운 눈은 행복합니다. 그 신비로운 눈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이렇게 외치십시오. "난 알아요! 당신이 그 신비로운 눈을 열어주실 것을!”

가정 위기의 원인

한마디로 오늘의 가정들이 위기에 직면한 원인은 사회의 산업화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식민지, 해방, 독립, 6.25전쟁, 그리고 산업화하는 급속한 변화를 단시일 내에 체험하였습니다. 이런 급격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가정들은 전통적인 가정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서울대 이광규 교수는 “후기산업시대의 가족공동체”라는 논문에서 산업화에 따른 가족의 변화의 특징을 세 가지로 들었습니다. 첫째는 핵가족화입니다. 공업화에 따라 농촌인구가 도시로 몰려오면서 자연 핵가족화가 양쪽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시로 온 자녀들은 부부가족을 이루고, 농촌에는 노부부만 남는 핵가족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족의 소인수화(少人數化) 경향입니다. 자녀들을 적게 낳는 경향을 말합니다. 두 자녀 갖기 운동에서 1985년 이후에는 한 자녀 갖기 가족계획이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더욱 자녀들의 수는 감소되었습니다. 세 번째 특성은 가족의 고립화 현상입니다. 대도시에 몰린 가족들은 이웃과 더불어 지역공동체 의식을 형성하기도 전에 직장 따라, 학군 따라 자주 이사를 해야 하고, 또 내 집이 마련되기까지 수도 없이 많이 이사를 해야 하는 관계로 이웃과 오래 사귈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가정은 쉽게 깨어질 위험을 안고 있는 상황입니다.

건전한 가정의 형성

성경에서 가르치는 건전한 가정은 동양의 가정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가정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가부장제를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자로서, 또 그 약속을 이어가는 자로서의 가부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적 전통의 가부장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본문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고, 또 3~4절에서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며, 아들 딸 손자 손녀를 보면서 오래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족간의 관계를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와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부간의 관계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표현하였습니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였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내주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가부장제를 말하지만, 이것은 권위와 힘으로 가정을 지배하는 자로서의 가부장이 아니라 오히려 섬김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책임적인 가부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겉모양으로는 동양의 가부장적 가정과 똑같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남녀유별, 장유유서에 의해서 지탱되어 온 유교적 가정개념은 기독교적 개념은 아닙니다. 유교의 사상은 결국은 권위주의적인 데 반해서 기독교의 사상은 높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기며 희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순전히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희생에 의해서 된 것이기에 거기에는 권위주의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봉사와 희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질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함에 있어서도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교육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신앙전통을 따라 가정을 올바로 세워 가야 하겠습니다. 동양의 가족개념을 완전히 신앙적으로 재해석하여 주님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가정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세계가 다시금 가정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그 가정을 올바로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때입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가정을 올바로 세워 가야 하겠습니다. 바른 신앙에서 바른 가정이 이루어지고, 바른 가정들이 모일 때 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올바로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가정, 그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가정, 개인 위주의 삶에서 가족 공동체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부관계는 게임이 아니다

결혼은 두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합쳐서 하나의 삶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들은 결혼을 통해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기쁨도 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포기하는 뼈아픔도 각오해야 합니다. 한 개인의 관심사가 부부라는 공동체의 관심사가 다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기 싫어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 본성이 부부들의 성공적인 결혼을 향한 영롱한 꿈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인간에게 존재하는 본성을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듯이 인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결혼 생활에 있을 수 있는 불행의 가능성을 우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불행의 가능성을 인지하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결혼을 성공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진정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요?

유대인의 교훈집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행복에서 불행으로는 한 순간이다. 그러나 불행에서 행복으로는 영원한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어떤 부부가 지금 이 순간, 행복에 젖어 있다고 하여, 그리고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여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을 가지는 일에 태만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 순간 안에 불행이 찾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해서 인생의 차를 출발시켰거든 인생의 종국의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한시도 핸들을 놓아서도 안되고, 바깥의 경치가 좋다고 해서 한눈을 팔아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주와 전 세계를 소홀히 할지언정 서로에 대해서는 소홀하지 말라."

어떤 부부가 아름답습니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한가지 전제로 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부부관계에 철학이란 없고 또한 철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부부관계의 성패는 노력에 있습니다. 그 노력으로 부부의 강한 연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대개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철학도 없이, 이유를 따지지도 않고 그저 상대방을 사랑했습니다. 이유와 원인을 중시하는 현대 인생들의 사고 체계로 말미암아 현대 부부들의 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현대 사고방식 속에서도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지속시켜 흐린 날 한 뼘의 푸른 하늘을 발견하는 기쁨을 우리들에게 선사하는 아름다운 부부들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저는 아름다운 부부에게 있는 첫 번째 원리가 바로 <무승부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승부의 원리란 생명의 원리이다

무승부의 원리란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부부란 타이틀 매치를 벌이기 위해 링에 올라가서 상대방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 하는 권투 선수는 아닙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는 승자와 패자의 우열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그대의 결혼이라는 사랑의 컵에서
사랑이 넘치게 하려면
그대가 잘못했을 때 시인하고
그대가 잘했을 때 침묵하라.

우리 인생들은 사회생활에서 항상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주장을 하며 삶의 승리자가 되려는 본능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은 합리화시키고 잘한 것은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들에게는 잘못한 것을 시인하는 용기와 잘한 것에 침묵하는 겸손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의 높은 산이 깎이고 나의 낮은 골짜기가 메워져 평탄한 대로를 함께 걸어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위자료는 바로 당신

한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다 남편이 몹시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나가 버려!”아내도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섰다.“나가라고 하면 못 나갈 줄 알아요!”그런데 아내는 다시 자존심을 내려놓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남편은 왜 다시 들어오느냐고 소리를 지릅니다.“가장 소중한 것을 두고 갔어요!”“그게 뭔데?”“바로 당신이에요!” 남편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부부싸움을 하다가도“우리가 부부싸움을 하면 뭐해? 이혼을 해도 당신이 위자료로 나를 청구할텐데…”라며 여유 있게 웃고 맙니다.

'결혼과 가정’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선물이요 축복인데 우리의 죄성과 이기심 때문에 문제와 고통 그리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가정 ,완벽한 남편, 완벽한 아내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성을 지닌 인간으로‘쫓겨나서 사는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러나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고 우리에게 약속하신‘풍성한 삶'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가족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저축한다는 말의 의미

서양사람들은 좋으면 어쩔 줄 모르게 기뻐하며 상대방에게 온갖 달콤한 소리를 다 하다가도 사랑이 일시적으로 식거나 마음이 변하게 되면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냉정해지고 상대를 푸대접하며 욕설과 저주를 합니다. 물론 희로애락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좀더 여유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하고, 인간의 간교한 마음을 이해해야 하며, 좋다고 너무 기뻐하지 말고 너무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도 꾸준히 가꾸고 저축했다가 혹시 상대방이 실수하거나, 밉게 굴거나, 아니면 싫증이 날 경우에 관용을 베풀고, 측은하게 생각하며,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주는 아량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인생은 즐기기 위해서 왔는가?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태어나서 성장하게 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룩하고 자녀들을 낳고 기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부부간에 서로가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기대하고 또 사랑 속에 살아야 할 것은 당연하다. 또 기대에 어긋난다고 좌절하고 실망하여 마침내 헤어지고 말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자체를 하나의 쾌락이나 일시적 욕망 충족이나 성공하기, 앞서기, 큰 인물 되기, 으시대기 등만을 위해 산다면 무의미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가치 있는 삶이 변화되지 않는 인생의 목표란 결국 사명감의 삶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사명감의 삶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좌절이나 소외는 있을 수 없고 언제나 해야 할 과제, 넘치는 기쁨, 사랑을 듬뿍 쏟아 넣는 데서 오는 성취감 등을 느끼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사명감의 자세에서 살게 된다면 마음이 느긋해질 뿐 아니라 사소한 일을 가지고 헤어지거나 가정을 파괴해 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가족관계란 잘잘못을 따지는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은혜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서로의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길 때, 우리 마음에는 천국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도 천국의 기쁨이 가득해서 영원한 가정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순례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소풍을 나온 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경험은 영원한 가정 천국에 가면 모두가 추억이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즐거운 경험뿐만 아니라 고통스럽고 아프고 슬픈 경험들까지도….

그런데 나는 언제 죽어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일곱 살 난 아들과 다섯 살 짜리 딸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응급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피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같은 혈액형은 딸아이뿐이었습니다. 다급해진 아빠가 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얘야, 너 오빠에게 피를 좀 나눠줄 수 있겠니?”딸아이는 잠시 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침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때까지 딸아이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습니다.“네 덕분에 오빠가 살게 되었어!”아빠의 말을 들은 딸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정말 기뻐요. 그런데 나는 언제 죽어요?”아빠가 깜짝 놀라 아이에게 되물었습니다.“죽다니. 네가 왜 죽는다는 말이냐?”"그렇다면 피를 뽑아도 죽는 게 아닌가요?”아빠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습니다. 잠시 후 물었습니다.“얘야, 너는 죽을 줄 알면서 오빠에게 피를 주었다는 말이냐?”“네, 저는 오빠를 사랑하거든요.”여러분, 이 꼬마아이와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사모님의 수기

어느 사모님의 수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하늘이라 말하고 아내는 땅이라고 말하는데, 우리 남편은 비 한 방울 내리지 못하는 원망스런 하늘이었고, 땅은 메마르고 갈라지고 있는데도 그 사정을 모르는 무심한 하늘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의 단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새 하늘로부터 단비를 받았기에 저의 심령은 사막이 되지 않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이 되어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아마 많은 한국 남편들이 이런 원망스런 하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모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인간 남편이 하늘의 역할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어느 인간 아내가 남편이 원하는 만큼 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새로운 하늘이신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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