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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가정을 위한 지침 / 골 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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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행복한 가정을 위한 지침
성경말씀 : 골로새서 3:18-21

우리가 가정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자주 언급하는 "스위트 홈“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일세” 라는 노래는 언제나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이 가사는 19세기에 미국의 시인이었던 존 하워드 페인(John Howard Payne, 1791-1852)이라는 사람이 지은 “홈, 스위트 홈”이라는 시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Home, home, sweet, sweet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oh, there's no place like home!“

홈, 홈, 스위트, 스위트 홈
홈과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네
오, 홈과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네


시인이 말하는 홈은 단지 그가 어려서 살았던 건물로서의 집이 아닌 어렸을 적의 행복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사랑의 보금자리로서의 집, 곧 부모 형제가 함께 어울려서 오순도순 지냈던 집을 말합니다. 존 하워드 페인은 유명한 배우요 극작가요 시인으로서 고향인 미국을 떠나서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고, 말년에는 아프리카의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서 영사로 일하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이 분은 예술가로서 명성도 얻었고, 말년에는 영사가 되었으니까 사회적으로 보면 상당히 성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가정이 없이 혼자 살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외로울 때마다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가정을 떠올렸을 것이고, 그 결과 “스위트 홈”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그 어떤 교훈보다도 더 깊이 우리에게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랑의 보금자리여야 할 가정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혼은 서구인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한국인들도 서구인들 못지않은 이혼율을 기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이혼을 생각하고 결정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결손 가정이 점점 많아져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정의 파괴는 당사자인 남편과 아내는 물론이고 어린 자녀들에게도 만회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안겨 줍니다. 이 시간 저는 성경에 근거해서 “행복한 가정을 위한 지침”에 관해서 상고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가정의 소중함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가정의 역사는 멀리 에덴동산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공동체는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중에서 먼저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아담은 짐승들과 새들에게 적합한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 일을 끝내고 저녁이 되면 모든 육축과 새들과 들짐승들이 각기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아담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 때가 되면 아담은 쓸쓸했을 것입니다.

그 같은 아담의 모습은 하나님의 보시기에도 좋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해서 창세기 2장 18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채우셨습니다. 그런 다음,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와를 본 아담은 단번에 알아보고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가정에 관한 귀중한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먼저, 가정의 창시자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가정이 신성하고 소중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건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는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떠보려고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4-6)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시 묻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8-9)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뜻에 의해서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만났다가 쉽게 헤어집니다. 만약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부부가 되는 것이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가정을 깨는 것을 그렇게 쉽사리 결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다음,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 대하여 돕는 배필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아담이 먼저 지음 받았고 하와는 나중에 아담을 돕는 배필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아내만 남편의 돕는 배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부가 된 후에는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돕는 배필이 되고, 남편은 아내에게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이 부부의 정상적인 관계입니다.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는 것은 남편이든, 아내든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어려서는 어머니의 품을 가장 좋아합니다. 어린아이는 자나 깨나 엄마를 찾습니다. 엄마가 없이는 죽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열 살이 넘으면서 서서히 엄마의 곁을 멀리하고 친구를 좋아합니다. 청소년들은 부모 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청년으로 장성하면 이성을 그리워하게 되고, 결혼을 하면 친구보다 아내나 남편을 더 좋아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만약에 이러한 변화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오히려 비정상인 것입니다. 간혹 보면, 장가를 들었는데도 아내보다 어머니를 더 생각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어머니와 상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남편 노릇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했으면 이제 돕는 배필인 아내와 남편과 힘과 지혜를 합해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합니다.

또한 부부가 서로 돕는 배필인 것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는 자녀를 생산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자식을 잉태하고 낳을 수 없습니다. 요즘은 인간들이 타락해서 동성간의 결혼을 인정하자는 말이 공공연히 나돕니다 마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결혼은 자식을 생산하는 이성간의 결혼에 국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남편과 아내가 제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셨다는 것은 하와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아담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하면, 남편이나 아내는 서로에 대하여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먼저, 아내에게 주시는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로 24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이 말씀에 보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무릇 어떠한 공동체이건 위아래의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수평적인 공동체나 조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급은 같더라도 머리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지시를 받는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원만하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가정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비록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완전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대표하고 머리 역할을 하는 가장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남편이 가정의 머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무엇일까요? 예, 몸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몸인 아내는 머리인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남편의 말이 옳건 틀리건 상관없이 무조건 따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른 말씀만 하시듯이, 남편은 아내에게 사리에 맞는 요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것은 최선이 아니고 차선이지만 남편의 말이기 때문에 들어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의 권위를 세워줌으로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세계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수컷이 암컷보다 외모가 크고 화려하다는 사실입니다. 말이나 사자는 암컷은 갈퀴가 없으나 수컷은 위엄스러운 갈퀴를 갖고 있습니다. 꿩이나 닭도 수컷은 높은 벼슬을 갖고 있으나 암컷은 벼슬이 작습니다. 공작도 수컷이 화려한 날개를 뽐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남자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벼슬이나 갈퀴가 있습니다. 곧 남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벼슬이 짓뭉개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세워주면 기분이 좋아져서 그 다음은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8절에도 말씀하기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기꺼이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을 두신 여 성도님들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보장받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 더 한층 남편에게 양보하는 것을 봅니다. 불신 남편에게 믿는 아내의 단정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3장 1절로 4절에는 “1)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남편에게 주신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로 28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남편이 할 일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곧 목숨을 다 바쳐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제 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된 사람은 아내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3장 19절에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베드로전서 3장 7절에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데 비인격적으로 아내를 대우하고 괴롭힐 리 만무합니다.

이처럼 남편과 아내가 각자의 분수를 지키고 제 역할에 충실 한다면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할 점은, 내 남편이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내 아내이기 때문에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이 원칙을 준행하심으로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들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가정의 구성원은 처음에는 남편과 아내로 출발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자식들이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따라서 부부 사이만 좋더라도 자식들이 속을 썩이면 가정의 행복이 깨어지기 쉽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먼저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 공경은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또 인륜에 관한 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보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 1절로 3절에는 “1)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그러면 이러저러한 복을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그러면 이러저러한 복을 주겠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그러면 이러저러한 복을 주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이 부모 공경에 대해서는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그만큼 부모 공경이 중요함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부모 공경의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3장 20절에는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돈을 많이 벌어다 주는 것보다, 이 사회에서 크게 성공하는 것보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장 기쁘게 여깁니다.

혹 부모가 경제적인 능력이 부족해서 남들처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많은 공부를 시켜주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녀된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식들이 여럿 있는데도 불구하고 독거노인이 되어 가난하고 외롭게 생활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은 부모님이 계신 사람들은 자식으로서 생활을 책임지고 보살펴 드릴 뿐 아니라, 자주 문안을 드려서 외롭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국의 소망을 가지시고 남은 여생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사실 수 있도록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부모님이 계시거든 만사를 제쳐놓고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최상의 효도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중에 돌아가신 후에 눈물 흘리고 후회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3장 21절에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된 사람들은 자녀들을 실망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자기 부모의 경제적인 능력이나 재능을 보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품을 보고 존경합니다. 특히, 가족의 생계와 안전을 책임진 아버지로서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할 때 자녀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같은 책임을 소홀히 하고 행실이 본이 되지 않을 때 자녀들은 부모에 대하여 분노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부모는 자녀들을 올바로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6장 4절에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혹 보면 부모의 희망을 자녀들을 통해서 성취하려는 경우를 봅니다 마는 그것은 자녀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일로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된 자로서 먼저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정직하고 양심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몸소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 하나님 중심의 바른 생활을 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모 공경과 자녀 교육이 올바르게 이루어질 때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는 가정이 위기를 맞이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건실하고 행복한 가정을 지켜나가기를 원하신다면, 오늘 설교와 같이 첫째로 가정의 소중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가정을 떠나서는 달리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남편과 아내가 제 분수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남편은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할 때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셋째로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시는 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가정은 구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마음과 힘을 모아야 합니다. 정원사가 꽃나무에 정성껏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가지를 쳐 주면서 가꾸듯이 우리의 가정도 온 가족이 인내를 가지고 성심껏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온 가족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웬만한 의견의 차이점은 너끈히 해소할 수 있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녀들도 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가정에 불협화음이 생겨날 수가 없고 주 안에서 화평과 희락과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들은 바 말씀대로 실행하심으로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불신 이웃들에게 드러내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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